-구지가의 탄생지 구지봉에서 김해를 내려다 보다
'구지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노래 중의 하나일 것이다. 교과서에 실렸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 내용이 해학적이면서도 다소 엽기적(?)인지라 많은 사람들이 재미있게 생각하는 노래 중의 하나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우리가 배운 구지가는 노래가 아니라 일종의 '시'라고 생각하면 된다. 왜냐하면 당시 사람들이 이 시에 어떤 곡조를 붙여서 어떤 노래를 불렀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노래의 내용이지 그 박자나 음조는 아니다.
어쨌든 구지가는 참 재미있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라는 대목에선 야릇한 상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머리를 내어놓지 않으면 구워먹으리라'라는 대목에선 섬뜩함을 받기도 한다.
길이도 단 2수에다가 짧고도 간결한 구지가. 이 구지가는 경상남도 김해의 구산동에 있는 '구지봉'에서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에 탄생했다고 전해진다. 구지봉은 일명 '구수봉'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즉, 거북이의 머리란 이야기이다.

구지봉이 거북의 머리라면 그럼 거북이의 몸체는 어디일까? 거북이의 몸체는 지금의 허황후릉이 있는 평탄한 곳을 말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 구지봉에는 아픈 사연이 하나 있다. 일제 시대에 일본 놈들이 우리 민족의 맥을 자른다면서 허황후릉과 구지봉 사이를 자른 후에 길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거북이의 머리와 몸체가 동강난 형상을 만들어 놓았다.
최근에 와서야 겨우 구지봉과 허황후릉 사이를 다시 연결하였다니, 우리 후손들의 무지몽매함을 김수로왕이 안다면 그 얼마나 한탄할 것인가.
구지가의 탄생지이자 수로왕의 탄강지인 구지봉 정상에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이 하나 있다. 더군다나 그 고인돌 윗면에 적혀있는 '구지봉 고인돌'이라는 글씨가 조선시대의 명필 한석봉이 쓴 글씨라고 하니 조금 어안이 벙벙해지기도 한다.
물론 한석봉의 글씨라는 것은 역사적 고증을 거친 것이 아니라서 명확한 사실로 취급받기는 힘들다. 어쨌든 재미있기도 하고 신기하지 않는가.

구지봉은 산이라기보다는 해발 200m정도의 작은 언덕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이 구지봉의 정상에는 분명 청동기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고인돌 한 기가 넉넉한 품새를 지닌 채 김해 시내를 굽어보고 있다.
흔히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 사람들의 무덤이라고 알려져 있다. 돌 판으로 상자를 짜고 무덤 칸을 마련한 다음, 그 위에 작은 받침돌을 놓아 큰 돌을 지탱하는 구조로 된 것이 고인돌이라고 보면 된다.
구지봉의 고인돌은 전형적인 남방식 고인돌이며 240×210×100cm의 아담한 규모를 지니고 있다. 특이한 것은 '왜 하필이면 구릉의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느냐'하는 것이다.
그 동안 구지봉의 고인돌은 정식으로 발굴 조사를 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정확한 축조시기를 잘 모르는 상태다. 다만 사람들은 기원 전 3∼4세기경에 이 지역을 다스렸던 추장의 무덤일 것이라는 추측을 할뿐이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알 수 있다.
김수로왕이 탄강한 연대는 AD 42년 신라 유리왕 때라고 한다. 그럼 이 고인돌의 주인은 수로왕이 탄강하기 훨씬 전에 이 지역을 다스렸던, 일종의 왕이라고 볼 수 있는 인물이다. 수로왕의 탄강 설화는 아득한 먼 옛날, 청동기 시대를 훨씬 뛰어 넘는 시절에나 있을 법한 신비로운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어찌 보면 모순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 않는가 말이다.
엉뚱한 상상을 하나 해본다면, 혹시 이 고인돌이 김수로왕의 진짜 무덤이 아닐까? 현재 조성된 김수로왕릉은 명문가로 발돋움한 후손들이 만들어 낸 것은 아닐까?
신화와 전설에 대한 상상은 엉뚱하고 다양한 개연성을 열어놓을 수록 재미있는 법이다. 우리의 신화와 전설도 중국이나 서양 신화에 못지않게 영웅적이고 아름다운 내용을 지니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허황후릉에서 구지봉으로 오르는 길, 다시 말하자면 거북이의 몸체에서 머리로 오르는 길은 참으로 편안함을 안겨준다. 올라가는 길도 완만한데다, 천천히 올라가다 뒤 돌아섰을 때 보이는 허황후릉과 김해 시내의 모습은 한적한 평화를 준다. 짙은 옛 고향의 향기와 푸근한 그리움을 안겨준다.
구지봉 정상에 '신단수'가 한 그루 심겨져 있다. 여기에도 재미있는 사연 하나가 숨어 있다. 원래 이 자리에는 육가야를 상징하는 '육란'상이 모셔져 있었다. 즉 김해김씨의 종친회인 가락중앙종친에서 화강석으로 만든 육란 형상을 '김수로왕의 탄강지'라고 적힌 비문과 함께 설치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문화재청에서 이 육란이 "역사적으로 고증되지 않았다"며 가락 중앙 종친회에게 '자진 철거'를 통보했다고 한다. 처음에 종친회 측에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강력 반발했지만, 완강한 문화재청의 요구에 밀려 어쩔 수 없이 철거하고 말았다. 그 육란상은 현재 김수로왕릉의 한쪽 구석에 다소 초라하게 자리 잡고 있다.
구지봉에서 다시 허황후릉으로 내려가니 평탄한 대지에서 시원한 바람이 설핏 불어왔다. 재미와 편안함, 아주 먼 옛날의 흔적을 갖고 있는 구지봉. 고인돌 위에 쓰인 글씨가 한석봉의 글씨이든 아니든 그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중요한 것은 늘 우리들에게 상상과 환상을 심어주는 그 시절의 순수함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