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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콩트> 살쾡이와 묵사발

아침부터 좁쌀 남편이 시답지 않은 일로 김영숙 교장의 기분을 내리꽂게 만든다.

아직도 평교사인 주제에 웬 도덕 군자처럼 잔소리는 그렇게도 많은지. 그 씨알도 안 맥히는 도덕 도덕 하니까 환갑이 다 되도록 아직도 평교사 신세를 못 벗어나지. 원로 교사라는 전혀 명예롭지 않은 이름하나 달고 젊은 교사 축에 끼이지도 그렇다고 나이에 걸맞게 관리자 축에 끼이지도 못해 어벙하게 무시나 당하면서 사는 주제에 무슨 놈의 얼어죽을 도덕 타령인지 남편만 보면 답답하다는 소리가 저절로 난다.

뭐 세상은 그렇게 사는게 아니라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고? 자기 앞가림이나 잘하라 그러지. "되도 안한 소리를 지껄여서 오늘 아침부터 기분을 잡치느냐"고 버럭 소리지르고 나오긴 하였지만 기분은 영 개운치가 않다. 평소에 "그러면 안뎌" 느린 충청도말로 어눌하게 읊조리다마는게 남편의 습성인데 오늘은 그 강도를 지나쳐 훈계조로 넘어가 있다는게 그녀의 기분을 몹시 상하게 한 것이다.

"나한테 감히 훈계를 하다니" 잔소리와 훈계는 질적으로 다르지 않은가. 나이가 먹더니 영감탱이가 망령이 났나 싶다. 그녀가 하는 일을 그냥 지켜만 보고 사는게 남편의 몫이지 않은가. 그런데 오늘은 감히 훈계라니. 그녀는 병적으로 누구에게든지 훈계를 듣고 사는걸 못견뎌하는 습성이 있다. 그녀의 별명은 살쾡이. 눈매가 매서운 그녀를 부하 직원들이 살쾡이라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진즉에 알고 있었다.

고양이과에 속하는 살쾡이가 다른 동물에 비해 사납다는것 밖에 아는 사실이 없지만 공격성이 강한 살쾡이는 그녀의 성향을 닮고 있어 무척 마음에 드는 동물인 것이다. 여자에게 동물을 빗대어 별명을 짓는 경우는 아마 드물 것이다. 미모가 출중해서 장미꽃이니 너무 가련해서 코스모스니 하는 꽃 이름을 붙이는게 다반사니까. 흔치 않는 족속에 속하는 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여기는 그녀에게 살쾡이란 별칭은 그녀를 흡족시키고도 남음이 있다.

이왕이면 그 자리에서 평생을 움직이지도 못하고 수동적인 형태로 자라야하는 식물보다는 쟁취하는 동물이 더 매력적이지 않은가 말이다. 영숙이라는 흔해빠진 이름보다는 살쾡이라는 동물적인 이름이 그녀에게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책상 위에 덩그마니 가로누워있는 명패에도 살쾡이라는 이름을 새겨넣고 싶을 정도다. 그러면 선생들도 더 내게 몸을 사리겠지.

그녀가 눈을 한 번 치켜뜨고 소리 한 번 질렸다하면 선생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해결책을 찾아내느라 분주하고, 꿔다놓은 보릿자루 같이 맘만 좋은 교감은 연실 교장실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며 상황 보고를 하느라 정신을 못차린다. 자기 한마디에 젊은 남자들로부터 머리가 희끗희끗한 교감까지 설설기는 모습은 몇 번을 봐도 통쾌하지 않을 수 없다. 일주일에 적어도 한 번은 이런 시험을 해봐야 살맛이 난다. 이 시험이 부하직원의 충성도를 재는 척도임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이 재미로 그녀가 학교에 오는건지도 모를일이다.

첫 번째 시험은 아지랑이가 아물아물 피어오르던 어느 봄날이었을 게다. 교장실에 그냥 맥없이 앉아있을래니 졸립기도 하고 심심하기도 해서 교실을 한바퀴 순찰한다. 그런데 박선생 반에 전에는 없던 멋진 나무가 사각 화분에 심어져 있는게 눈에 띈다. 군침이 돈다. 그냥 달라고 하기에는 너무 위압적인 것 같고 그렇다고 포기하려니 눈에 아른거린다.

"박선생, 이게 소나무 분재라는 거지. 꼭 정이품송을 축소해논 것만 같구먼. 이거 박생선이 직접 키운건가?""예. 제가 직접 키워본 것인데 교실이 하도 삭막해서 갖다놔 보았습니다.""거 참 멋지구만. 어쩜 이리도 잘 키웠누. 박선생은 솜씨도 좋아."

이만큼 추켜세워 주었으면 교장선생님 가지시라고 건넬 법도 한데 벽창호인 박선생은 그저 고개만 주억거릴 뿐 선뜻 가져가시라는 말은 입밖에도 내놓지 않는다. 여기서 포기할 살쾡이가 아니지 않은가. 맛있는 먹이감을 놓칠 이유가 없다. 상황판단에는 비상한 그녀의 머리가 회전하기 시작한다.

"박선생, 이 분재가 내 맘에 쏙 드는데 내 난 화분하고 바꾸는 것이 어떻겠나.""아니 교장선생님의 난 화분하고요. 어떻게 감히"

마음에도 없는 제의를 하니 박선생은 황송하다는 듯이 분재를 들고는 교장실까지 쫄래쫄래 따라온다. 분재를 책상위에 놓고는 갈 생각을 안한다. 기어이 난 화분을 가져갈 생각인가. 잔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깔아도 이 벽창호는 난 주위에서 침만 흘리고 있다. 너도 출세하기는 다 틀려먹었구나. 윗사람 눈치 하나 다스릴 줄 모르니 원. 쩝쩝 쓴 입맛을 다시며 화분 중에서 마음에 드는걸로 골라 가져가라고 한다. 박선생은 유심히 탐색하더니 제일 좋은 놈으로 골라들고 교장실 문을 나선다. 통밥을 20년이나 먹은 작자가 그런 머리하나 못 굴리니 그 나이에 그 흔한 주임자리 하나 못 차지하고 있지. 넌 틀렸어.

소태같은 입맛을 다시며 그녀의 영원한 딸랑맨인 묵사발 교감을 부른다. 내가 아끼던 난 화분이 없어졌는데 어떻게 된 일이냐고 빨리 찾아오라고 성화를 부려본다. 그녀 앞에서는 아니오라는 글자가 이 세상에서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듯이 행동하는 교감은 그 선한 눈을 어디둘지 몰라 안절부절하며 종종걸음으로 달려나간다.

걷는 것조차도 여자 같다니까. 지아비한테 꾸중듣고 달려나가는 여편네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녀는 후훗 웃음을 짓는다. 이 곳은 살쾡이인 나의 왕국이 아닌가. 조금만 있으면 난 화분이 돌아오리라. 바쁘게 돌아다닌 모양인지 이마에 땀이 송송 배어나온 교감 옆에 로봇처럼 난 화분을 든 박선생의 얼빠진 모습이 보인다.

"아니 글쎄, 이 박선생의 반에 떡하니 교장선생님의 난 화분이 올려져 있지 뭡니까? 한 눈에 보고도 교장 선생님의 난이란 걸 알 수 있었지요. 근데 이 박선생이 교장선생님의 준거라고 박박 우기지 않습니까. 이게 얼마나 아끼는 난인데. 이 철없는 박선생을 교장선생님의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주십시오. 다음부터는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단도리하겠습니다."

교감의 너수부레한 변명이 길어지는 동안 대역죄인이 되어버린 박선생은 완전 똥씹은 얼굴이 되어 고개도 제대로 못들고 있다. 그래 이게 사회라는 거다. 어디 내 물건을 감히 겁도 없이 가져가누.

"아니 뭐 그럴 수도 있지요. 박선생이야 세상이 다아는 순진한 사람 아닙니까."이 한마디면 그녀의 임무는 끝난 것이다. 난 화분도 돌아오고 분재도 얻고 너그러운 상사가 되고 일석삼조가 아닌가. 이 재미에 세상 사는 맛이 나는게 아니겠나. 아, 세상은 참 살맛나는 곳이다.

두 번째 꼽을만한 사건은 여름 방학 기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집에만 있으려니 심심하기도 하고 괜스레 머리도 아프고 해서 영양제나 맞을까 해서 병원에 가서 누워있는데 교감한테서 전화가 온다. 아침이면 학교에 왔다고 전화가 오고 점심이면 아무 이상 없다고 전화오고 저녁이면 집으로 무사히 간다고 전화오고 교감은 수시의 상황을 정확하게 보고하여 준다. 충실한 개가 주인을 위해 짖는 것처럼.

나이는 그녀보다 5살이나 위이지만 그는 언제나 깍듯하게 공손히 대한다. 그녀가 살쾡이같이 사나운 눈을 내리 쏘아대면 무슨 죽을 죄를 지은 대죄인 같이 고개를 읍조리고 잘못했다고 연실 주억거린다. 찾아보면 딱히 잘못한 것은 없는데 무조건 잘못했다고 먼저 빌어온다. 묵사발이 깨져야 묵사발밖에 더되겠냐는 듯 초점 흐린 눈을 꿈뻑이며 이리 동동 저리 동동 발을 구르는 그를 보면 남자가 맞는지 목욕탕에 데리고 가 확인하고픈 마음까지 든다.

여왕벌처럼 떠받들리는 것은 좋지만 자존심이 태어날 때부터 없는 사람같다. 처음에는 나이가 많아서 조금 망설여지기는 했지만 먼저 굽히고 들어와주니 나이어린 사람을 대할 때보다 더 심한 구박을 하게 된다. 걸레를 집어 던져도 무조건 잘못했다고 하고 서류를 집어던져도 흩어진 것을 줍기만 할뿐이다. 그녀의 이런 행위가 그의 골수에 박힌 노예근성이라고 자위하면서 그런 행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게 되었고 이제는 그 행위를 즐기기까지 되었다. 그를 묵사발이라 부른다는 것은 익히 아는 사실이다. 교장에게 하도 깨져서 더 이상 깨질 것도 없는 묵사발이라고 선생들이 지어주었다.

이 묵사발이 그녀가 병원에 있다는 소식만 듣고는 전국에 퍼져있는 교사들한테 교장이 과로로 쓰러지셨다고 비상연락을 쳐서는 순식간에 부하직원들이 벌떼같이 화분을 들고 과일바구니를 들고 병원을 쳐들어왔던 것이다. 멀리 울산에 사는 생활주임도 끼어있다. 울산에서 예까지는 빨리 온다고 해도 4시간은 족히 넘을텐데 기억해 두어야지. 깨서 맞이하기에는 그렇고 그저 자는척하고 있으려니 지네들끼리 너무 피곤하셔서 주무시나보다하며 두런두런하더니 쪽지에 메모를 남기고는 나간다. 고 놈들 참 귀엽기도 하지 영양제 맞으러온 사람한테 이렇게 병문안 오는 사람있으면 나와보라 그래. 이것도 그녀의 능력인 것만 같아서 한껏 흐뭇했던 날이었다.

세 번째는 오늘이 될 것이다. 수도 없이 부하 직원을 시험해보는 그녀였지만 오늘은 정말 역사에 길이 남을만한 사건이 되리라. 그리고 오늘은 기억하기도 좋은 가을 소풍이 아니가. 소풍이라고 아이들이고 선생들이고 다 들떠서 청소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트집을 잡아본다. 아니나 다를까 묵사발의 기기 작전이 나온다. 모두 제 불찰이라고 교장을 달래느라 진땀을 뺀다. 오늘 소풍가는데 따라가보라고 해도 막무가내로 교장옆에 붙어있다. 머리가 아파서 병원에 좀 다녀오겠다고 학교를 나서는 그녀는 괜히 웃음을 짓는다. 그러면 그렇지 역시 묵사발은 한 번쯤 쳐야 제맛이 난다니까.

회심의 미소를 머금고 집에 가 팔자로 누워 전화를 건다. 병원 갔다가 집에 가서 쉬고 있는데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하라고. 몇 시간 단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전화가 온다. 소풍 아무 사고 없이 잘 갔다왔다는 교무주임의 전화다. 그 전화에 남선생들의 박장대소하는 웃음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들려온다. 지네들끼리 웃을 일이 있어서 웃었을 터이나 교장은 모두 내가 그 자리에 없으니 나를 도마에 올려놓고 비웃는 것만 같아서 교감을 바꾸라고 하고는 역정을 낸다.

무슨 놈의 젊은 놈의 전화 예절이 그 따위냐고 어른 알기를 개떡같이 알고 있는 이런 학교에 더 이상 있을 수 없다고 명예퇴직 하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교감의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잘못이 있다면 용서해 달라고 그런 소리만은 거두어 달라고 사정을 한다.

오늘은 이것으로 성이 안차니 끝까지 가보자고 마음먹은 교장이 여기서 이 좋은 놀음을 그만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가 1시간 뒤에 학교에 갈테니 명예퇴임 서류를 해놓으라고 큰소리치고는 딱 끊어버린다. 다방에 가서 차 한잔 마시고 가면 되겠지 느긋하게 미스김 옆에 앉혀놓고 수다 떨다가 학교로 간다. 모두들 퇴근도 못하고 날 기다리겠지. 눈물을 흘려가며 나의 명예퇴임을 막을 것이고.

아니나 다를까 선생들이 줄줄이 사탕으로 엮어 들여져 오며 한창 일하실 나이에 능력있는 교장 선생님께서 명예퇴임한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며 거두어 달라고 읍소를 한다. 이 모습을 보니 꼭 내가 태종 이 방원 같다. 왕세자한테 자리한 번 물려준다는 말 한마디했는데 신하들이 밤새 읍소하는 그런 장면이 떠오르니 흐뭇하기 그지없다. 내심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화가 풀리지 않은 척 '한 번 마음먹은 것이니 철회할 수 없다'고 판에 박힌 소리를 한다. 뒤이어 묵사발이 죄인처럼 들어와서는 거두어달라는 읍소를 한다. 절대 그럴 수 없는 일이라고 단호하게 못을 박는다.

"꼭 명예퇴임하셔야 겠습니까?"
교감이 재차 묻는다. 그녀는 '한 번 정한 마음은 그르칠 수 없다'고 단호히 못을 박고는 눈을 지그시 감고 얼른 서류나 가져오라고 엄포를 놓는다. 그러면 집에도 가지 않겠다고. 집에까지 쫓아와 사정할 묵사발의 모습을 그리며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데 교감의 한마디가 그녀의 눈을 번쩍 뜨게 한다.

"꼭 그러시다면 할 수 없죠. 여기 교장 선생님이 원하시던 명예퇴임 서류입니다. 갖고 가셔서 제출만 하면 되도록 완벽하게 준비해 놓았습니다. 이제 됐습니까?"

이 무슨 마른 하늘의 날벼락이란 말인가. 고개를 쳐드는 법이 없던 교감의 고개가 어느새 빳빳이 서있고 그의 눈은 불타고 있다. 교감의 눈동자가 저리 정열적인 때가 있었던가. 교감의 눈이 무섭다. 살쾡이는 다름 아닌 교감이었던 것이다. 묵사발이 살쾡이였다는 사실에 놀라며 누런 서류봉투를 든 김영숙 교장의 손이 심하게 떨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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