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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탐방

하늘 아래 제일 서러웠던 소리꾼, 이화중선

예술에도 생애가 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흥할 때가 있으면 쇠할 때도 있다. 우리의 소리인 판소리도 여기에서 예외일 수 없다.

우리나라 국민 중에 판소리를 모르는 이는 없다. 노래는 몰라도 '판소리'란 이름은 알고 있고 소리꾼들의 노래를 어디서든 한두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그러나 소리는 모른다. 춘향이와 심청이는 알아도 그 노래는 모른다. 어렵기도 하겠지만 그만큼 대중으로부터 멀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 소리인 판소리가 대중들에게 가장 사랑을 받았던 시기를 뽑으라 하면 19세기부터 20세기 초가 아닌가 싶다. 이때 권삼득, 송흥록, 이날치, 김세종, 박유전, 정정렬 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명창들이 나와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민중은 그들의 소리에 울고 웃으며 흥겨운 몸짓을 함께했다.

그런 판소리가 이젠 대중들에게 어렵고 먼 소리로 인식되고 있다. 사실 판소리 발생 초기엔 쉽고 이해하기 쉬어 대중적인 음악으로 보편성을 띠었다. 그러다 점차 양반들이 향유하게 되고 왕실까지 판소리를 향유하면서 전차 어려워지기도 하고 예술성도 가미되면서 대중들로부터 멀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요즘 우리 판소리는 대중의 시대를 지나고 상실의 시대를 넘어 세계무대로 도약하고자 하고 있다. 가장 우리 것이 세계적이라는 말이 있듯 우리 판소리의 그 음악적 리듬과 예술성은 세계 어느 음악과도 견줄 수 있다 하겠다. 이런 판소리의 소리꾼을 찾고, 소리꾼들의 삶과 예술을 생생한 호흡으로 기록한 책이 있다. <한국의 소리, 세상을 깨우다>이다.

무덤가에서 귀곡성을 배운 송흥록

송흥록은 동편제를 만들었고 판소리의 중시조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그는 근대적인 판소리 발성법과 지금의 진양조 장단을 완성했다. 또 송흥록은 통성이나 폭포성(호령성)을 판소리 기본성음으로 확립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소리를 '폭포소리', '비바람이 몰아치는 소리', '태풍에 나무 부러지는 소리', '천병만마가 몰려와 천지가 진동하는 소리' 등으로 이야기했다. 그만큼 그의 소리엔 박진감이 넘쳤다 한다.

그러면서도 진양조의 가락을 완성했듯 그의 소리는 애절하고도 슬퍼 만인을 울렸다 한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그가 진주 촉석루에서 귀곡성을 부를 땐 음산한 바람이 불면서 촛불이 일시에 꺼진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사람들은 그의 소리가 접신의 경지에 이르렀다며 놀라워하고 이야기가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지난 1월에 해돋이와 해맞이를 동시에 볼 수 있는 익산 웅포에 간 적이 있다. 옛날보단 그 모습이 덜하겠지만 웅포는 경관이 빼어나고 아름다운 곳이다. 한때는 전국 5대 시장의 하나로 불렸을 만큼 번성했던 곳이 웅포다. 지금도 해마다 정초가 되면 이곳에서 해돋이 축제를 하곤 한다.

송흥록은 이곳 웅포에서 1800년 경 태어났다. 지금이야 웅포의 옛 영화는 지는 노을 속으로 스러졌지만 이곳에 가면 명창 송흥록을 만날 수 있다. 대밭 속에서다. 송흥록은 살아 대밭에서 귀곡성을 연마하더니 죽어서도 그 귀곡성을 연마하듯 대숲 한가운데 누워 있다.

귀곡성과 관련해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이 있다. 평소 귀곡성을 깨우치기 위해 애를 쓰던 송흥록에게 웬 아이가 찾아왔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아이를 따라 한 대숲 초당에서 그는 백발의 노인들을 만났는데 그때 노인들은 송 명창에게 <춘향가>를 부르게 했다.

노래가 끝나자 노인들은 귀곡성이 틀렸다며 노래를 따라 부르게 했다. 그리고 노인들이 따라준 술을 몇 잔 받아먹고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한 초분이었다. 그는 그때 기억을 더듬어 귀곡성을 창안하고 완성했다 한다.

하늘 아래 제일 서러웠던 소리꾼, 이화중선



"남원에는 광한루가 있고, 춘향이가 있다. 판소리가 있고, 명창이 있다. 우리가 광한루 난간에 기대어 춘향이나 심청이를 떠올릴 때면, 우리는 어느 박복한 여인을 떠올려야 한다. 저 건너 녹림 숲에 완월정이 들어서기 오래전, 근처 어느 술청에서 막걸리 사발에 술을 치던 한 어린 소녀를 아시는가. 자신의 서러운 노래로 고단한 겨레의 심금을 온통 울려놓은 그녀를 가억하시는가. 이화중선 그녀를."

남원은 춘향이의 고향이다. 그리고 판소리의 고향이기도 하다. 지금도 남원에 가면 여기저기서 소리꾼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판소리가 무대 안으로 들어갔지만 전주와 남원 등 전라도 일대에선 소리는 마당가에서 펼쳐지는 몸짓으로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화중선은 춘향이와 같은 애틋한 사랑도 없다. 삶이 춘향이처럼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도 않았다. 화려한 명성 뒤엔 슬픈 삶과 아픔이 판소리 명창 이화중선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그리고 생을 마쳤다. 이러한 이화중선의 삶을 극명하게 표현한 시가 있다. 서정주의 <바위옷>이다.


일정의 식민지 조선반도에 생겨나서
기생이 되어서, 남의 셋째 첩쯤 되어서,
목매달아서 그 모가지의 노래를 하늘에 담아버린
二十세기의 우리 여자 국창 이화중선.

- <바위옷> 중에서

이화중선은 판소리 명창으론 근대사회의 스타였다. 명창 임방울이 '쑥대머리'로 숱한 대중을 울렸다면 이화중선은 ‘추월만정’으로 대중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다. 하지만 그녀의 삶은 늘 고달팠다.

청산유수 같은 거침없는 창법과 고운 목소리로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었지만 자신은 지지리도 복이 없었다.

미숙아로 태어난 그녀는 3살에 어미를 잃고 친척집을 전전하다 술집 부엌대기가 된다. 그녀는 거기서 소리를 배웠고 명성을 얻은 다음엔 자신의 기저귀 한 번 갈아주지 않은 의붓어미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일생동안 소리를 했다.

그러다 결국은 여자로서의 행복은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채 1944년 일본에서 공연을 마치고 이동하던 중에 배가 전복되어 익사하고 만다. 평생 바리데기처럼 살다가 생을 놓은 그녀를 두고 서정주 시인은 '하늘 아래선 제일로 서러웠던 노래 소리를' 하다가 간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이화중선 그녀의 소리는 한과 삶이 함께했다. 화려한 명성 아래에서도 늘 외로웠고 고달팠다. 해서 그녀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그녀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하늘은 그녀에게 아름다운 목소리 하나만 주고 다른 복은 주지 않았다고.'

난 지금 심청가의 한 부분인 '추월만정'을 듣고 있다. 황후가 된 심청이가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애달픈 마음이 이화중선의 제자이면서 당대를 수놓았던 김소희 명창의 목소리로 마음을 촉촉이 적시고 있다. 가을 달밤에 들어야 제격이겠지만 화려한 봄꽃 아래에서 듣는 맛도 그리 나쁘진 않다. 소리를 들으며 하늘 아래에서 제일로 서러웠던 노래 소리를 하다가 간 한 여인을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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