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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탐방

고성 왕곡마을의 담벼락에 핀 벌집꽃



  - 동해안 북단에서 만난 민속마을

 흔히 전통마을이라고 하면 조선시대나 그 이전의 옛 집들이 모인 마을을 말한다. 대개 이 마을들은 도심과 떨어진 곳에 있으며 마을 지세가 평범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또한 수 백 년의 세월 속에서도 옛 전통과 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으며 처음 마을을 개척한 분들의 후손이 여전히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초가집과 기와집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전통마을에는 예스런 자취가 넘쳐나며, 마을 곳곳에는 옛 사람들의 방향이 곱게 피어 있다.

속초에서 통일전망대 방향으로 차를 계속 몰면 전망대로 가기 전 40km 지점에 우측으로 왕곡마을이란 표지판이 보이고 민속마을이란 부제가 첨부되어 있다. 기세 좋게 핸들을 우측으로 꺾은 후 굴다리를 통해 약 1.5km를 운행해보라. 그러면 한적하면서도 조용한 신작로가 나타나는데 한눈에 보아도 범상치 않은 어떤 마을의 기운이 느껴질 것이다.




입구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이곳이 강릉 함씨와 최씨의 집성촌이며 우리나라 북방 가옥의 원형이 잘 보존된 마을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안내판 바로 뒤에는 수 백 년은 족히 됨직한 아름드리 노송이 은은한 솔향을 풍기며 당당하면서도 부드러운 모습으로 서 있다. 눈을 감고 조용히 솔향을 음미하니 1.5km 떨어진 바닷가의 내음이 코끝에 스쳤다.

뒤뱃재, 골무산, 갯가산, 밧도산, 순방골 등 다섯 봉우리로 둘러싸인 왕곡마을은 우리네 산천의 여느 마을처럼 포근하면서도 아늑한 느낌을 준다. 다섯 봉우리의 엄호를 받은 덕분인지 6·25 때도 마을의 집들은 폭격을 피할 수 있었단다. 폭탄 3발이 마을에 떨어졌지만 모두 불발탄이어서 집들이 화를 면했는데, 다섯 개의 준령들이 마을을 지켜준 덕이라고 순박한 노인들은 믿고 있었다. 왕곡마을에서 휴전선까지는 불과 40km 정도인데 말이다.




왕곡마을은 전통마을로 지정되기 전까지는 오지 중의 오지여서 외부 사람들의 발길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마을 앞에는 송지호가 가로 막고 있는데다 바닷가의 공현진 마을에서 왕곡마을로 들어오는 고갯길은 하도 험해서 우마차도 오르기 힘들 정도였다는 것이다. 이런 오지에 마을이 형성된 것은 여말 선초의 상황과 관계가 있다고 한다. 예전 강릉 함씨 중에 함부열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공양왕에게 충절을 바친 사람이었다. 그래서 조선이 개국한 후 함부열의 후손들이 관의 탄압을 피해 오지인 왕곡마을로 숨어들었다는 것이다. 후손들은 외부와 단절된 채 마을을 개척하였고 명당인 마을은 여러 차례의 전화와 화마를 용케 피했다는 것이다.


임진왜란이나 6·25는 말할 것도 없고, 지난 1996년 발생한 고성산불에서도 마을은 한 터럭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왕곡마을의 한 가운데에는 우물이 없다는 사실이다. 마을의 형상이 물에 떠있는 배인지라 가운데에 구멍을 뚫으면 배가 가라앉는다는 믿음 때문이다.

현재 왕곡마을에는 기와집 20채를 포함하여 초가집과 나머지 집을 합쳐 약 50여 호가 형성되어 있다. 전통 한옥마을로 지정된 후 낡은 옛집을 보수하는 공사를 한 탓에 기와집과 초가집들은 산뜻한 맛을 풍겼다. 그런데 마을의 한 가운데에 가니 개천가 옆에 자리 잡고 있는 방앗간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일제시대에 건립된 듯한 방앗간은 물레식이 아닌 기계식이었는데, 낡고 녹슨 기계들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아련한 유년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그 방앗간 맞은편 개천다리를 지나면 복구된 초가집들이 몇 채 보인다. 이제 우리나라에서는 그 원형이 거의 남아 있지 않는 초가집. 이 초가집이 또 어떤 집인가? 천연 지붕 방수재인 볏짚을 여러 겹 쌓아 빗물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집. 통풍이 잘되는 구조인지라 여름에는 에어컨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시원하며, 겨울에는 어머니의 품과 같은 따뜻함을 안겨주는 집. 그뿐인가. 황토로 벽을 발라 해충의 접근을 차단하고, 세월이 지나면 자연스레 황토벽이 갈라져 늘 숨을 쉬도록 만든 집이 바로 초가집인 것이다.

왕곡마을 가옥의 특징은 마구간(혹은 외양간)을 부엌과 덧붙여 집 전체 형태가 ‘ㄱ’자가 되게 한 점이다. 춥고 긴 겨울을 마소가 잘 견디라고 따뜻한 부엌 옆에 붙여놓은 생존의 지혜가 돋보이는 구조인 것이다.




안동 하회마을의 전통 한옥이 규모가 큰데 반해 왕곡마을의 한옥은 20~30평 정도로 소규모라 작고 소박한 느낌을 준다. 하회마을에서 느껴지는 엄격함과 통제감이 없어 아주 정겹고 편안한 느낌, 민초들의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향내가 솔솔 풍겨온다. 기와집이 많은 이유는 마을 옆에 기와 굽는 공장이 있어 싼값에 공급받아서라고 한다.

다섯 개의 준령이 만들어낸 분지로 둘러싸인 왕곡마을. 해월 최시형 선생이 일본군과 관군의 눈을 피해 잠시 도피생활을 할 정도로 오지였던 왕곡마을. 이 왕곡마을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개별 기와집의 형상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마을 전체의 분위기와 마을을 둘러싼 주변 환경, 그리고 집들의 배치를 잘 보아야 한다. 또한 단순히 밖에서 이 마을들을 보지 말고 때로는 집의 툇마루에 앉아 고즈넉하게 흘러가는 구름과 바람을 살펴야 한다. 그러면 옛 흔적과 풍습의 향기가 느껴지며 다섯 준령의 미소가 그대들의 가슴에 조용히 스며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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