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맡은 아이들을 가르쳐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무엇보다 아이들의 신상파악이 선행되어야 했다. 아이들 또한 새로운 담임인 나에 대해 잘 모르는 터라 매번 대할 때마다 어색함마저 감돌았다.
담임을 맡은 지 며칠이 지났지만 고작 해야 아이들의 이름과 가족관계를 아는 것이 전부였다. 나름대로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여 상담하고 있으나 깊이가 없었다. 늘 그랬듯이 3학년이기에 대부분 상담내용은 대학입시와 관련된 것일 뿐, 개개인의 사소한 고민을 들어줄 시간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이메일을 통한 상담이었다.
그래서 1월 초 아이들에게 내 생각을 이야기했다. 새로운 담임인 내게 하고픈 이야기나 고민이 있으면 언제든지 메일을 보내라며 이메일 주소를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보낸 메일에 대한 답을 꼭 주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자칫 스팸 메일로 분류될 수 있다는 생각에 보낼 때는 반드시 제목을“누구 없소?”로 하라고 당부하였다. 그 이후 시간이 날 때마다 메일을 확인해 보았으나 아이들에게서 온 메일이 없었다. 내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동안 그 일을 잊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식사를 하고 난 뒤 자율학습 시작까지의 시간이 남아 교무실에서 인터넷 검색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메일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누구 없소?”라는 제목이 눈에 띠었다. 우리 반 아이 중 한 명이 내게 메일을 보낸 것으로 생각하고 반가움에 메일을 열어 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메일을 여는 순간 야한 동영상이 계속해서 창에 뜨면서 컴퓨터가 갑자기 다운되는 것이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컴퓨터를 다시 켰으나 작동하지 않았다. 전산 선생님의 말에 의하면,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 같다며 수리를 요한다고 하였다.
단지 메일 하나를 확인했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일이 복잡해질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컴퓨터를 복구하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소요되었다. 더군다나 컴퓨터에 저장된 모든 자료가 사라졌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그 이후, 메일을 확인할 때마다 지금까지 보내지 않았던 메일을 아이들이 보냈을 리가 없다는 생각에‘누구 없소?’라는 제목으로 온 모든 이메일은 읽어보지도 않고 바로 삭제해 버리는 습관이 생겼다. 아마도 그건 발신인이 확실하지 않은 스팸 메일을 열어 봄으로써 예전과 같은 일을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바람 때문이었으리라.
그런데 수요일 저녁. 한 아이로부터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문자메시지를 읽으면서 그 아이가 내게 상당한 불만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저는 약속을 잘 지키는 선생님이 좋아요.”
그 내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아이와 무슨 약속을 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그 아이에게 다시 문자를 보냈다.
“무슨 약속을 했는지 모르지만 화를 풀기 바란다.”
그리고 잠시 뒤, 그 아이로부터 짧은 메시지가 도착했다.
“메일 좀 확인하세요.”
메일이라는 말에 그 아이가 말하는 약속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바이러스 사건 이후‘누구 없소?’라는 제목으로 온 모든 메일을 읽어보지도 않고 삭제한 기억이 났다. 삭제된 메일 중에 그 아이의 메일이 포함되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메일 중에는 그 아이 외에 다른 아이들의 메일도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아이들에게 왠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그리고 이 사건을 전혀 모르고 있던 아이들은 이메일을 보내고 난 뒤 나로부터 답장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답장을 받지 못하자 담임인 나를 불신하게 된 것이었다.
다음 날 조회시간. 아이들에게 사과를 하고 난 뒤,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리고 글의 제목을“선생님, 제 고민 사세요.”로 하라고 하였다. 그제야 아이들은 오해가 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후, 생각보다 많은 아이가 이메일로 상담요청을 하였다. 그래서일까? 요즘 나는 아이들에게 답장을 해주는데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기만 하다. 그런데 짜증보다 행복한 비명이 터져 나오는 것은 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