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는 ‘篤信好學(독신호학)’을 가훈으로 삼기도 하고 서예가들은 篤信好學(독신호학)을 즐겨 쓴다. 이 말은 논어(論語) 태백편(泰伯篇)에 나오는 말이다. 공자께서 篤信好學(독신호학)하라고 하셨다. 독실하게 믿고 학문을 좋아하라고 하셨다.
篤信과 好學을 둘 다 술목구조로 보아 “믿음을 독실하게 하고 학문을 좋아한다”로 해석을 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 篤信을 수식구로 보아 篤信이 好를 수식하는 것으로 보면 이렇게 해석이 가능하다. ‘돈독한 믿음으로 배우기를 좋아하다’라는 뜻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이렇게 볼 때 굳게 믿고 배우기를 좋아하라는 뜻이 된다. 굳은 신념으로 학문을 사랑하라는 뜻이다. 확고한 자신감으로 배우기를 좋아하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배우기를 좋아하고 책읽기를 좋아하되 돈독한 믿음을 갖고 임해라는 것이다.
배우기를 하면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을 구분하게 되고 배우기를 하면 나아가야 할 길과 나아가지 말아야 할 길을 분별하게 되며 배우기를 하면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지혜가 생기게 되며 배우기를 하면 가정을 살리고 나라를 살리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고 배우기를 하면 목숨을 걸어야 할 때와 목숨을 걸어서는 안 되는 것을 분별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배움에 임하라고 하는 것이다.
배움에 임하면 나라가 수치를 당치 않게 되고 건강한 가정, 건강한 사회, 건강한 나라를 만들 수 있고 정의사회를 실현시킬 수 있고 행복한 나라를 만들 수 있고 능력을 키워 비천함에서 벗어날 수 있고 세계에서 인정받는 나라, 존경받는 나라, 우러러보는 나라로 자리매김할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으로 배움에 임하고 배우는 것을 좋아하고 사랑하라는 것이다.
학문을 하면 어둔 세상을 바로 밝힐 수도 있을 것이며 학문을 하면 가난한 나라를 부한 나라로 만들 수도 있을 것이며 학문을 하면 학문을 하면 약한 나라를 강한 나라로 만들 수도 있을 것이며 학문을 하면 경제대국으로 만들 수도 있을 것이며 학문을 하면 세계를 선도할 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갖고 학문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보통 사람은 배움을 사랑하지 않는다. 배우는 것을 싫어하고 꺼려한다. 배우는 것이 개인을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나라를 살리는 역할을 할 수 있음에도 배우는 것을 기피한다. 많은 대가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피눈물나는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배우는 것도 폭이 좁은 것이 아니라 엄청 넓다. 배우면 배울수록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복잡해진다. 배우면 배울수록 고통이 따른다. 인내를 요구한다. 아픔을 이겨내야 한다. 그래서 배움을 좋아하지 않는다. 배움을 사랑하지 않는다.
배움에 대한 회의가 있기 때문에 배우지 않는다. 배움에 회의가 있는 자들은 ‘배워서 뭘 하나? 한글 정도 알고 돈 계산 정도 할 줄 알면 사는데 무슨 지장이 있느냐? 그런데 왜 배워야 하나?’하면서 항변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이 들면 들수록 공자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면 좋겠다.
돈 사랑하지 말고 배우는 것 사랑하고 노는 것 좋아하지 말고 배우는 것 좋아하고 오락 하는 것 즐기지 말고 배우는 것 즐겨야 한다. 10대 청소년들 모두가 ‘篤信好學(독신호학)’의 자세를 가지게 되면 우리나라의 교육수준이 지금보다 몇 배로 더 높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건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얼마든지 가능하다. 생각을 바꾸면 된다.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면 된다. 자세를 ‘篤信好學(독신호학)’으로 바꾸면 된다. 태도를 전화시키면 된다. 행동이 따르면 된다. 세계 제일가는 교육수준으로 높이는 것은 간단하다. 모두가 ‘篤信好學(독신호학)’의 정신을 갖고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