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숙 3번 문제의 정답이 무엇인지 대답해 본다” 영어과 장민영 선생님은 조는 듯 엎드려있는 걸찍한 체격의 여학생에게 질문 공세를 폈다. 눈을 덮고 있는 눈꺼풀이 커텐처럼 스르르 내려왔다가 슬쩍 위로 치켜뜨며 모든 것이 귀찮다는 듯 앉아있는 그 태연함과 여유로움에 서른살의 기백이 팔팔한 노처녀 장민영 선생님은 기가 막혀 죽을 지경이었다.
두발자유화 발표후 여고생들의 장발이 늘기는 했으나 현숙이는 느슨하게 땋아내린 긴 머리를 고무밴드로 질끈 묶은 후 앞머리 옆머리 할 것 없이 마구 내려와 털북숭이 강아지 꼴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교과서도 없고 단원에서 문제를 추출하여 프린트물로 만들어 배부한 시험지도 한쪽으로 밀어둔채 그저 넋을 놓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학창시절 장선생님은 모범생으로 반듯하게 성장했는데 부모님은 물론 선생들께서도 늘 칭찬을 아끼지 않은 학생이었다. 그리고 학업성적도 우수하여 세칭 일류대라는 A대학 영문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여 채용고사를 통해 당당히 교직에 몸담아온지 어언 7년이란 세월이 흘러 이제는 학생 다루는 법이나 교육에 관한 이론이 나름대로 정립이 되었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터였다. “인생에 연습은 없다. 오직 의욕적으로 정진할 뿐이다.” 라는 좌우명을 정해놓고 매사 열과 성을 다해 처리하는 스탕리어였다. 학교에는 가장 먼저 출근하여 하루를 시작하고 지도안은 파워포인트를 이용한 최첨단모형으로 작성하여 그 지역의 으뜸으로 선정되는 등 모든 면에 적극적이며 우수한 교사였다. 학생을 인솔한 야영이나 수학여행에서는 레크레이션 지도자가 되며 예술제나 작품전시회가 있을 때는 학생들 지도에 열과 성을 다하는 예술적 소양도 풍부한 교사로서 그 명성을 휘날리고 있었다. 정말 별명대로 <팔방미인> 다운 면모를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장선생님은 자신의 생활태도가 완벽한 만큼 <의욕상실, 태만, 무능>을 가장 혐오하기도 했다. 이렇게 의욕이 넘치다 못해 펄펄 끓는 장선생님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인간애 또한 남다른 편이었다. 결식학생을 남모르게 도와주는 일이나 학급의 결손학생을 방과후나 방학중에 가정방문하여 어머니와 같은 자애로운 마음으로 어루만져 탈선학생을 사전에 방지하는 등 헤아릴 수 없는 선행을 실천하는 모범적인 교사였다. 이러한 장선생님의 눈에 비친 현숙이의 모습은 어떻한가? 단정치 못한 용의, 열의없는 수업태도, 만사가 귀찮다는 듯한 표정은 너무 답답하고 한심스러울 뿐이었다. 대답을 촛점없이 눈을 내리깔고 있는 현숙이에게 장선생님은 다시 물었다. “현숙아, 너 진학할꺼지?” “안해요” “왜?” “그냥 하기 싫어서요.” “그럼 졸업 후에 무얼 할껀데?” “……” “희망이 있을 것 아니야. 졸업 후에 계획을 한 번 말해봐.”“없어요, 그냥 돈만 많이 벌었으면 좋겠어요.” “와아” 학급생 전원이 거의 일시에 폭소를 터트렸다. 여고 3학년이라면 정말 꽃다운 나이가 아닌가? 아직 삶에 찌들지 않은 이 순수한 시대에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세속성은 이들에게 생경한 단어일 것이다. “왜 돈이 그렇게 필요하니?” 장선생님은 불쑥 말을 뱉어놓고는 현숙의 모습을 다시 살펴보았다. 낡은 교복, 길게 기른 너저분한 두발상태, 어두운 얼굴 표정. 분명 현숙이네는 경제사정이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장선생님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왜 현숙이의 희망이 돈을 많이 버는 것일까 잠시 생각하고 있는데“선생님 얘 별명이 뭔지 아세요?” 유난히 쾌활한 성격의 명진이는 자신의 짝지 영미를 가리키며 키득거렸는데 그건 현숙이의 난처한 입장을 무마하기 위한 의도적인 배려이기도 했다. “글쎄 무얼까?” 영미는 둥글넙적한 얼굴이 꽤 노숙 해보이지만 머리에는 엉뚱하게 리본이 달린 머리띠를 애교스럽게 하고 있었다. “얼굴을 보세요” 장선생님은 영미의 둥글넙적한 얼굴 때문에 문득 메주를 떠올렸으나 차마 자존심을 다칠까 염려되어 대답하기 난처해서 머뭇거렸다. “혹시 콩으로 만든……?” “맞아요, 콩으로 만든 메주예요. 메주는 메준데요, 머리에 리본이 있어서 선물용 메주예요” 교실안은 또 한바탕 여학생들의 밝고 예쁜 꽃구름으로 채워졌다. “선생님 이건 또 무엇이라고 하는지 아세요?” 명진이는 이번에는 털털하기로 소문난 정하의 목언저리를 가리켰다. 정하는 목에 프릴이 달린 블라우스를 교복 속에 입고 있는데 분홍빛 프릴이 교복 칼라 밖으로 삐죽이 내밀어져 있었다. “글쎄, 그건 또 뭘까? 블라우스에 프릴이 달렸네. 공주님이니?” “아니예요, 정하가 공주님 같아요? 이런 호박받침이예요.” 드디어 배꼽을 쥘 만큼의 맑은 웃음을 소녀들은 아 터트렸다. 그러나 현숙이는 여전히 그들과 동떨어진 이방인의 자세로 입가에 약간 미소만 더올릴뿐 별 반응이 없었다. 소녀들의 청아한 웃음을 끝으로 수업을 마치고 나온 장선생님은 현숙의 담임선생님 동의하에 <생활기록부>를 확인해보았다. 편모슬하에 동생이 셋이나 있는 가난한 집안의 장녀였다. 아, 그랬었구나! 금전에 애착을 가질 수밖에 없는 가정환경 속의 현숙에게 장선생님은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는 연기자가 되고 싶어요. 수업 중에도 연기하는 상상을 많이 하고 또 그 때가 가장 행복하거든요. 빨리 돈을 많이 벌어서 엄마를 편하게 모시는 것이 꿈이예요.” 어느날 현숙이와 교정의 벤치에 나란히 앉아 대화를 나누던 중 희망을 물었을 때 현숙의 입에서 나온 말은 장선생님의 가슴을 뭉클 하게 했다. 별 생각 없이 그저 타성에 젖어 학교를 오가는 아이로 착각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어린 나이에 가정의 경제상태를 뼈저리게 체감하며 현실극복을 늘 꿈꾸어 온 모습이 애닯기까지 했다. 그후 장선생님은 대학에서 배웠던 <섹스피어 희곡집> 번역판을 선물하는 등 현숙에게 관심을 쏟았고 차츰 현숙이도 마음의 문을 열고 가까이 다가와 집안의 어려움을 털어놓기도 하는 아름다운 관계로 발전되었다. 어느덧 몇 개월이 흘러 입시전쟁을 치르고 난후 연례행사로 이루어지는 <졸업발표제>를 앞두고 졸업생들은 들뜬 기분으로 학급마다 연습에 여념이 없었다. 드디어, 학생들이 고대하던 발표제의 막은 올랐고, 하이라이트인 연극 <배비장전> 이 공연되었다. 현숙이가 걸찍한 체격에 한복을 입고 배비장의 역할을 천연덕스럽게 하는 것이 아닌가? “수업 중에는 병든 병아리 같던 애가 배비장을 멋지게 하던데? 탤런트 기질이 충분해” 현숙이를 기억하는 선생님들은 이구동성으로 현숙이의 연기능력을 칭찬하며 그간 현숙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점을 모두 시인하기도 했다. 정말 사람이란 외모의 다양성만큼이나 개성, 취향, 능력 등이 다른 것을 가끔씩 잊어버리고 학생 전체를 교사자신의 시각에서만 평가하려하지 않았던가? 모든 학생이 성실하고 학업성취도가 높고 학력이 우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은 얼마나 큰 오류인가? 거대한 사회가 구성되기 위해 능력의 다양성이 필요한데도 불구하고 학부형이나 교사들은 한결같이 동질성만을 강조하지 않았던가? 일류병. 그래서 생겨난 억대의 쪽집게과외, 개인의 인성을 무시한 교육이 이런 맥락에서 생겨난 것은 아닌가? 장선생님도 주관적 잣대가 아닌 객관화된 잣대로 사람을 바라보아야 함을 깊이 깨달았다. 그리고 현숙에게 작은 쪽지를 준비했다. “…… 현숙아 꼭 네 꿈인 훌륭한 연기자가 되기 바라며 어머님도 편안하게 모실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그리고 연기는 네 삶의 이상향이니까 희망을 잃지 않도록 하고… 현숙아 너는 반드시 너의 유토피아를 소유할 수 있을꺼야. 그날까지 끊임없는 정진을 기대한다.” 현숙이가 졸업후 한가정의 장녀로 삶의 무게를 감당하기에 힘겨워한다는 소식을 동창을 통해 들으며 장선생님은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연기 능력이 있어도 지방에 묻혀 삶에 찌들어 있다면 그 치열한 별들의 전쟁에 어찌 동참 할 수가 있으랴.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며 현실만 원망하는 그런 세월이 흘러 현숙의 근황도 뜸해 궁금할 때 쯤이었다. 우연히 켠 TV에서 개그맨 컨테스트가 한창이었다. 각자 가지고 나온 소재로 혼자 또는 무리를 지어 참가자들이 혼신을 다해 열연을 하고 있었는데 이게 왠일이람. 현숙이가 혼자 등장하는 것이었다. 심봉사중에서 <뺑덕어미 상경기>라는 제목으로 학교무대 보다 더 능숙한 솜씨로 코믹하게 연기하며 관중을 사로잡는 것이 아닌가? 혹시 실수라도 하면 어쩌나 장선생님은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현숙아, 화이팅! 너는 꼭 될거야, 당선해야 돼” 장선생님은 계속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이윽고 모든 출연진의 연기는 끝나고 심사위원의 간단한 심사평과 함께 등위가 발표될 때 장선생님의 가슴은 콩닥거렸고 도무지 안정이 되지 않았다. 장려상, 동상, 은상, 금상까지 발표가 되도록 기다리던 현숙의 이름은 불려지지 않은 채 대상 수상자를 발표하게 되었다. 장선생님은 맥이 탁 풀리고 정신이 혼미해져오는 듯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유현숙> 이란 이름이 들렸고 현숙이가 흥분된 모습으로 단상에 나와 꽃다발과 트로피를 가슴에 가득 안았다. 눈에는 반짝하고 구슬이 비치고 있는데 만면에 미소를 띤 사회자가 현숙에게 다가왔다. “축하합니다. 소감 한마디만 해주십시오” 현숙이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하려는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저를 성원해 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리며 늘 삶의 무게로 고생하시면서도 제가 거울 앞에서 틈날 때마다 연습 하는 것을 묵묵히 지켜봐 주신 어머니 정말 고맙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늘 이 자리에 서기까지 저에게 큰 힘이 되어주신 분께 저의 이 모든 영광을 바치고 싶습니다. 여고 시절 은사님, 장민영 선생님, 선생님 오늘에야 비로소 제 유토피아를 찾았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장민영 선생님의 볼에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교사의 영원한 유토피아를 위해 내일 또 다시 아름다운 마음으로 학생들을 보리라. 창밖은 가을 달빛이 하얗게 쏟아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