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 개그 프로그램에 ‘술 푸게 하는 세상’이라는 코너가 인기를 끈다. 이 코너가 인기를 끄는 이유는 연기자들의 연기가 진짜 같다는 느낌 때문이다. 특히 박성광의 술에 취한 연기는 진짜인지 연기인지 구분이 힘들다.
하지만 이 코너가 진짜 인기를 끄는 이유는 취중에 뱉는 말 한 마디 때문이다. 박성광이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며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말을 뱉는다. 이 말은 연기자의 말이지만, 이 세상의 중심에 서지 못하는 다수의 울분을 대신 토하는 감정이입이 있어 호감이 간다.
이 세상 대다수 이름 없는 사람들은 팍팍한 인생살이에 힘들고 지치면 술로 위안을 삼는다. 아니 술로 위안을 삼는 것이 아니라 슬프기 때문에 술을 마신다. 이런 상황이 ‘술 푸게’라는 말에 함축되어 있다. 즉, 이 말에는 ‘술을 푸게 하는 세상’이란 뜻에 ‘슬프게’라는 의미가 덧붙어 있다.
이 세상에서 주목받지 못하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세상을 향하여 주먹질을 하고 푸념하며 술을 푼 기억이 누구나 있다. 우리는 삶에 지쳐서 때로는 거리에 비에 젖은 신문지 조각처럼 거리를 헤맨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개그로 표현되는 박성광의 술주정은 우리 모두의 푸념이고 넋두리 같다는 느낌이다.
나란 위인도 살아오면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경쟁의 대열에 섰다가 쓸쓸하게 돌아선 적이 많다. 같은 나이 또래에 있는 사람들은 장학사도 되고 교감도 되는 것을 보면, 분명 나는 경쟁 사회에서 낙오자임이 분명한 것처럼 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슬퍼할 일이 아니다. 우리의 인생은 등수를 매기는 것에 있지 않다. 1등만이 되는 경쟁은 우리가 잘못 만들어낸 가치 지향이다. 그것은 우리의 인생을 올림픽과 혼동하는 것이다. 인생은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 1등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가는 것이다. 남과 다른 나의 삶을 설계하는 것이 우리가 가야할 길이다.
인간의 삶이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쇠퇴하고 언젠가는 정지되는 생명의 유한성이 있다. 물리적 개념으로 보아도 인간은 남과의 경쟁에서 언젠가는 패배해야 하는 슬픈 존재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영원히 1등을 할 수도 없고, 또 그것으로 기억되지 않는다.
그럼 우리가 마음속에 두고 오래 기억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남과의 경쟁에서 이긴 사람들을 기억하기보다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긴 사람들을 기억한다. 오늘날까지도 기리는 사람을 보자. 율곡 선생, 윤봉길 의사, 김구 선생 등 동서고금을 가릴 것 없이 인류의 현자로 추앙받는 사람들은 남과의 경쟁에서 1등을 한 사람들이 아니다. 이들은 자기 목표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았다. 그들은 각자 존재의 가장 깊은 영혼을 뜨겁게 담금질하는 삶의 자세를 가졌기에 우리에게 감동으로 남아 있다.
우리의 경쟁자는 더불어 살고 있는 그 누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우리가 남과 더불어 경쟁을 해서 얻는 것은 패배감과 실망감만 쌓인다. 자신의 삶을 향한 열정은 자신도 모르게 성취감을 얻게 된다. 그런 사람은 자연스럽게 공동체에서 선망이 된다. 이 세상에 나와 똑같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모두가 귀한 존재이다. 따라서 남과 더불어 경쟁을 하는 것보다 남과 다른 길에 매진해야 한다. 나는 이미 남과 다른 독창성을 지니고 있으니 내 길을 개척하면 자연스럽게 1등이 된다.
삶은 일생에 단 한번이다. 한번뿐인 인생을 남에게 얽매여 산다면 억울하고 부질없는 짓이다. 가치 있는 자기를 찾는 것이 의미 있는 인생이다. 우리는 누구나 가슴 속에 맑은 영혼의 샘물이 솟아나고 있다. 그 자체로 아름다운 존재이다. 올림픽처럼 순위를 매길 이유가 하나도 없다. 자신과 싸우는, 그리고 자신이 만든 세계에 도전을 하는 삶이 그대를 아름답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