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날(18일) - 여순감옥과 단동에서 흘리는 눈물
열어젖힌 커튼 밖이 훤해진다. 우리나라 시각 5시이다. 대련 시내가 젖어 있다. 밤새 비가 내렸고 지금도 이슬비가 내리고 있다. 힘든 일정을 예고하는 듯하다. 오늘은 대련에서 여순, 다시 압록강변 국경도시 단동까지 가게 된다. 체크아웃을 한다. 간밤 호텔사정에 어두워 물을 마셨는데 그 물이 프랑스산 ‘에비앙 물’이라 하여 한화 1만2000원을 지급해야 하는 웃지 못할 일이 일어났다.
첫 번째 목적지 203고지를 향해 대련 시내를 이동한다. 대련은 중국에 있지만, 서구열강의 침탈과정에 뼈아픈 경험을 가진 100년의 도시이다. 문득 중학교에 배운 가로수가 예쁜 대련 시내에서 러일전쟁의 포성에 짐도 제대로 못 꾸리고 떠나는 아쉬움을 표현한 구절이 생각난다.
대련과 여순은 랴오둥반도의 끝에 발해만을 끼는 바다로 진출하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이다. 194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여대로 불렸으며 지금은 한창 개발 중이라 도심과 주변의 이곳저곳이 파헤쳐져 있다.
한 시간 반 정도 달려 203고지 주차장에 도착한다. 안내자는 이곳 고지 정상은 군사시설보호 때문에 항구를 향하여 사진촬영을 금지한다고 말한다.
조금 걸어 올라가자 포탄 탄피를 녹여 만든 높이 10.3m의 포탄모형의 기념탑이 보인다. 군데군데 푸른 녹이 슬어 있고 한자와 더불어 러시아글씨가 각인되어 있다. 일본이 세운 전승 기념탑인데 러시아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은 의외이다. 사연인즉 이 고지는 러일전쟁의 중심이었던 곳이다.
1894년 대륙진출의 기회를엿보고 있던 일본은 운요호사건을 일으켜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고 동학운동을 빌미로 청일전쟁을 일으켜 승리한다. 청일전쟁의 패배로 청나라는 종이호랑이로 전락하고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여 막대한 전쟁배상금과 대만, 랴오둥반도 할양권을 갖게 된다. 하지만 일본의 대륙진출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부동항을 찾던 러시아와 강대국인 프랑스, 독일이 삼국간섭을 하여 강제로 이곳을 조차하게 된다. 그리고 러시아는 세계최강의 함대인 블라디보스토크의 극동함대를여순에 주둔시키게 된다. 다된 밥에 재 뿌린다고 러시아 때문에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고도 대륙진출의 기회를 놓친 일본은 1904년 여순항을 기습하여 러일전쟁을 일으킨다. 러시아는 부동항을, 일본은 대륙진출로를 확보해야 하는 상황에서 서로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이곳에서 전쟁하게 된 것이다.
한편, 청나라는 자기 안방에서 벌어지는 다른 나라의 전쟁을 지켜봐야 하는 치욕을 맛봐야 했다. 결국, 이 전쟁 승리의 열쇠는 203고지 점령에 있었다. 일본의 노기 마레스키 장군은 자신의 두 아들까지 잃는 무모한 돌격전으로 6만이란 사상자를 내며 이 고지를 점령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정밀 포격으로 여순항의 러시아 극동함대를 궤멸시킨다. 설명에 의하면 러시아는 세계최강의 함대인 발틱함대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러시아와 프랑스 세력의 확장을 견제하던 영국이 일본과 공수동맹을 맺어 수에즈 운하 통과를 거부한 것이다. 결국, 발틱함대는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아가는 항로를 선택한다. 긴 항해 중 아프리카에서 얻은 식수가 콜레라균에오염되어 막대한 전력의 손실일 입고 겨우 10%의 전력으로 쓰시마섬 인근해역에 도착하자 기다리던 일본의 해군에 의해 참패를 당한 것이다. 이 전쟁은 미국, 영국, 일본과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세력 전쟁이라고 할 만하다.
역사는 왜 이렇게 아이러니할까? 그 당시 조선은 이런 열강의 도가니 속에 끼어 아관파천, 명성황후시해사건이란 힘없는 나라의 비애를 겪어야만 했다.
203고지는 해발 203m와 비슷하고 중국어로 나레이샨이란 말이 203과 비슷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일본엔 남의 나라에 세운 전승기념비로 자부심을 줄 것이고 러시아엔 통한의 곳, 청나라엔 치욕의 장소이다. 고지의 주변을 돌아본다. 모두가 요새화 되었다. 참호를 비롯한 당시의 흔적이 그대로이다. 고지 정상에서 조금 떨어진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곳에는 280㎜ 대포가 여순항을 향하고 있다. 정상에서 본 여순항은 목포 유달산에서 보는 목포항과 비슷한 이미지이다. 피로 얼룩진 고지를 내려오는 길. 산들바람이 불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발걸음을 재촉하며 여순감옥으로 향한다. 여순감옥! 1902년 러시아에 의해 건립되었고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증축하여 1945년까지 사용한 감옥이다. 또 101년 전 하얼빈에서 대륙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곳이다. 동시에 2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이곳은 감방과 부설공장, 고문실, 사형장까지 갖추고 신채호, 이회영 등 700여 명의 우리의 항일투사들을 패망할 때까지 처형한 잠들지 않은 원혼들이 머무는 곳이다.
비가 내리는 감옥마당에 앉아 독립기념관 김도형 연구위원의 설명을 듣는다. 비가 젖든 말든 울분과 비애가 치밀어 오른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의거를 일으키고 그해 11월 7일 이곳에 이송 수감된다. 그리고 이듬해 3월 26일 여기 사형실에서 순국한다. 수감생활을 하며 안 의사는 동양평화론과 안응칠 자서전을 집필했다고 한다.
감옥 안으로 들어간다. 벽돌의 색깔에서 러시아와 일본의 건축이 확연히 구분된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의 밀폐공포감과 어둠, 눅눅한 공기와 곰팡내, 죽음의 손길과 신음 등이 감방 곳곳에서 묻어난다. 독방, 빛이 없는 방, 취조실 등 지능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의 약점을 더 비집고 들어가 이렇게 잔인할 수밖에 없는 영장류의 악마 근성에 소름이 절여온다. 수인들의 여러 가지 전시물품을 보며 마지막으로 안중근의사가 갇혔던 감옥과 사형장으로 간다.
사형장 내부 천정에는 보에 달린 3개의 도르래에 교수형 장치가 되어 있고 마룻바닥은 네모로 구멍이 나 있다. 그 구멍 아래에는 둥근 통이 있다. 사형할 때 배설물을 담고 숨이 다하면 그 통에 시신을 넣어 인근 수인 묘지에 매장하는 관 대용이라 한다. 한 가지 충격적인 사실은 시신을 통속에 넣을 때 무릎이 꺾이지 않아 들어가지 않으면 염산으로 무릎을 녹여 꺾어 넣는다고 하니 그 잔인한 치밀성에 치를 뜬다. 안 의사도 저렇게 되었다 생각하니 기절할 지경이다.
이곳에서 사형당한 안 의사는 유족들의 유해반환에도 사후 파장을 두려워하여 일본군은 절대 비밀로 하고 인근 야산에 암매장했다고 한다. 지금 그곳은 많은 아파트가 들어서 안 의사의 유해를 봉안한다는 것은 참 난감한 지경이다. 그래도 신이 있다면 안 의사의 간절한 바람을 들어주길 빌어본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힘쓸 것이다.”
안 의사의 유촉을 받들지 못한 지금의 우리가 한탄스럽다. 그 안 의사를 비롯한 항일투사들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아닌가. 흐려지는 시야, 무거운 걸음을 옮기며 감옥을 벗어나온다. 감옥 앞 중국 상인들의 호객소리가 더 기분을 언짢게 한다. 돈만 벌면 되는가.
비 내리는 여순감옥을 뒤로 다시 대련으로 향한다. 점심 후 단동으로 가기 위해서이다.
중국식으로 준비된 점심이지만 사형장의 환상이 떠나지 않아 먹는 둥 마는 둥 일어서 차로 돌아온다. 비가 내려 질퍽거리는 거리를 어떻게 걸어왔는지 울분과 피로에 지쳐 눈을 감는다. 흔들림이 느껴져 눈을 뜨자 버스는 대련 시내를 벗어나 외곽을 달리고 있다. 다음 목적지 단동을 향해 가고 있다. 소요시간은 4시간 정도며 중간마다 휴게소가 있지만, 사정이 나빠 화장실 사용이 어렵다는 말을 들으며 자연스럽게 쉴 때마다 해결해 달라고 당부한다.
중국은 위기감과 절약정신이 강하며 먹을거리에 집착하는 다문화 다민족 국가이다. 달리는 길이 고속도로라 하는데 너무 썰렁하다. 하늘이 파랗다. 멀리 보이는 평원에는 옥수수가 지천으로 자라고 백양나무 울타리가 도로와 개울, 강의 경계를 알려준다. 푸름으로 자라는 농촌 들녘에 붉은 벽돌과 기와로 똑같은 형태의 가옥들이 집단으로 모인 곳이 눈에 지주 띈다.
오후 6시쯤 대련에서 380㎞ 떨어진 단동 톨게이트에 도착한다. 단동은 중국의 국경도시로 북한의 신의주와 인접한 도시이다. 인구구성을 보면 남한 사람이 3000~4000명, 북한사람이 6000명, 나머지는 화교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한글 간판들도 자주 보인다.
단동에서 보는 압록강은 어스름 지는 저녁과 검은 구름으로 말미암아 암울한 빛이 물들어 흐르고 있다. 압록강을 둘러보려고 배에 오른다. 흘러나오는 음악이 우울함 더한다. 6.25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정밀 폭격에 의해 끊어진 단교와 1943년 차량통행용 다리로 추가된 944m의 압록강 철교 밑을 돌아 멀리 위화도를 본다. 역사로만 들은 4불가론을 앞세워 회군한 이성계가 있었던 위화도가 보인다. 그리고 지척에 인구 60만의 신의주시가 손에 잡힐 듯하다. 이곳 압록강은 수많은 하중도가 있으며 수면은 북한과 중국이 공동 공유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 하중도 중 제법 큰 섬인 위화도와 항금평, 비단섬이 새로운 경제협력 개발 체로 떠올라 들썩이고 있다고 한다.
배는 철교 아래로 약간 더 나아간다. 불야성을 이룬 단동 시내와는 정반대로 반대편 강변의 고요함에 잠긴 신의주를 보며 아래로 내려간다. 간간이 군복을 입은 북한군인이 지나가고 녹슨 철선 위에서 불을 피워 저녁을 먹는 사람들이 보인다.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체재의 경제원리가 극명하게 대립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한쪽은 주체사상의 휘말림 속에 가난과 기근으로 고통받고 한쪽은 사회주의에 자본주의 경제체제 도입으로 부를 창출하고 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는 우리와 함께 영원히 계신다’라는 붉은 바탕에 대문짝 만한 글씨가. 강 가운데서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지도층의 다른 이념은 국민의 생활을 고통이 아니면 행복으로 몰고 갈 수 있다. 굶어 봐야 밥의 진가를 알 수 있는 법. 북한 지도층은 이런 실상을 얼마나 체험하고 있는지 의문이 간다.
흙빛으로 물드는 압록강을 돌아서 LED조명의 현란하게 춤추는 단동시내로 돌아온다. 도시의 광장에 많은 사람이 나와 체조를 하는 모습이 보인다. 언제나 남쪽에서 북쪽을 보았지만, 오늘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보고 있다. 국경도시 단동. 여느 도시의 번화한 모습을 보며 14층에 있는 숙소로 돌아온다. 창밖엔 어둠 속에 잠긴 압록강이 숨을 죽이고 현란한 시내와 암흑에 싸인 신의주도 들어온다. 6.25의 상처를 간직한 이념의 무서움이 새록새록 살아나는 압록강변 단동에서의 둘째날 밤이 저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