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는 그 어떤 재물을 많이 소유함이 아닌 주위에 사람이 많은 향기로운 사람일 것입니다. 유난히 비도 많았고 늦더위가 기승을 부렸던 올여름의 팔월 마지막 날. 팔백여 명의 전교생 앞에서 그분은 눈시울을 적시셨습니다. 평생을 교단에 살다 퇴임을 하게 되는 자리 “교장 선생님은 이 학교가 모교입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저의 후배들입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미래입니다. 사랑합니다.” 평소 조회시간이면 와글거리는 소리로 훈화 말씀이 들릴까 말까 하는 분위기인데 오늘은 누가 주의를 준 것도 아닌데 물을 끼얹은 듯합니다. 늦더위에 인조잔디에서 뿜어 나오는 열기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들은 숙연해지고 그 앞에 선 모든 선생님도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마지막 훈화 모습을 담고자 셔터를 누르는 순간 나의 시야도 흐려져 몇 번이가 뷰파인더에서 눈을 멀리해야 했습니다.
반환점을 돈 이십여 년의 교직생활 동안 여러 퇴임식을 보았지만 이렇게 가슴이 아리는 모습은 처음이었습니다. 더는 같이 있지 못하고 당장 내일 이 교정 어디에서도 그분의 모습을 뵐 수 없다는 아쉬움과 서운함이 가슴을 후볐습니다. 행진곡이 울리고 중앙현관 앞에서 입실하는 아이들을 끝까지 지켜보고 계신 모습이 시야를 떠나질 않았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걸으며 정년이란 법 조항은 왜 있는지 하늘은 왜 저렇게 파란지……. 교실에 들어가자 아이들은 “선생님들이 왜 우셨는지 알아요. 저희도 보름달 같은 교장 선생님 얼굴이 너무 좋아요.” 합니다.
팔월 초였습니다. 친화회에서 퇴임식을 하자고 하였지만, 교장선생님은 요란하게 보이는 게 절대 좋은 모습이 아니라고 극구 사양하셨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정작 자신은 퇴임을 앞둔 팔월 한 달 동안 지인들을 차례로 만나 인사를 하셨답니다. 그리고 어제는 전 직원들과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나 한다며 뷔페를 빌려 마지막 저녁식사 자리를 마련하셨습니다.
선생님들도 교단의 마지막 순간이라고 저마다 이벤트를 소리 소문 없이 준비를 하였습니다. 프로는 아니지만, 플루트와 전자오르간 이중주인 마이웨이, 기타연주와 새내기 남녀선생님들의 율동이 나눔과 열정으로 더 멋진 인생이란 작은 현수막 앞에 오색의 하트모양 풍선장식에 감동을 더하였습니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닌데 마음에 묻어나는 감동을 모두가 공유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마디를 위해 마이크를 잡으신 교장선생님의 모습을 보며, 처음 같은 학교에 근무한 시절과 비교하면 듬성듬성한 머리와 깊어진 주름살이 그동안의 시간을 말하고 있음을 느끼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보름달 같은 환한 미소를 머금은 얼굴은 언제나 정겹게 떠 있습니다.
사람의 성격과 삶의 모습은 표정에서 묻어난다고 합니다. 칭찬에 인색하지 않으셨고 베풂에 아낌이 없으셨던 교장선생님. 문득 지난해 6학년 담임을 하면서 수학여행을 일주일 앞둔 교장실에서의 일이 떠올랐습니다. 그때 교장선생님께서는 봉투를 내미셨습니다. 그것은 6학년 다문화 가정과 집안형편이 곤란한 아이들을 골라 수학여행비 내라며 주신 것이었다. 어쩜 이런 일이! 그리고 여행 첫날 숙소에서 인솔한 선생님을 모두 불러 내일 에버랜드 가서 목이라도 축이라며 또 봉투를 내미셨습니다. 그렇게 2박 3일 서울 수학여행길은 교장선생님이 계서 참 행복하고 든든하며 편안했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면 그런 일이 한두 번 아니신 것 같습니다. 자라나는 새싹을 위해 향토장학금도 아낌없이 내시고 주위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소리없는 천사의 손길을 여러 번 나누셨습니다.
추억은 시간이 지나면 반추를 동반하여 행복한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지난 칠월. 같이 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모두가 토요휴업일과 주말을 반납하고 비가 내리는 가운데 1박 2일의 지리산 둘레길을 가기로 하였습니다. 남해에서 출발하여 고흥을 거쳐 지리산온천에서 하루를 묵는 첫날 저녁자리. 진한 꿀 향기를 담은 꽃단지를 가지고 계신지 교장선생님은 여러 선생님에게 인기 최고가 되어 자정이 지나는지도 모르셨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구례군 운조루에서 시작되는 지리산 둘레길. 폭우가 내릴 것이라는 예보도 아랑곳하지 않고 시작한 그 길. 어쩌다 일행과 떨어진 우리는 한참을 지나 갑자기 굵어지기 시작한 빗속에 고립됐습니다. 무덤가에 난 오솔길은 삽시간 물에 잠기고 방향을 가늠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같이 있는 여 선생님 서너 명은 비에 젖어 입술은 파래지고 겁을 먹은 채 제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계속 간다는 것은 폭우로 말미암아 불어난 물로 어떤 위험이 다스리고 있을지 몰라 온 길을 되돌아 조금 떨어진 인가에 도착하여 처마 밑에 비를 피하고 옷을 말릴 즈음 저만치 교장선생님을 비롯한 다른 일행들의 돌아오는 모습이 보여 안도가 되었습니다. 그때 여 선생님 한 분이 무서웠지만, 부장 선생님이 계서 안심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왠지 어깨가 으쓱했답니다. 하지만, 그 당시 다른 곳에서 통화도 되지 않는 시점에서 교장선생님의 걱정이 더 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괜찮으냐는 말과 안도한 표정으로 물어보는 모습에서 잠깐의 이별이었지만 빗속에서 만나는 해후는 그동안의 근심과 힘든 것을 떠내려 보내고 기쁨으로 다가왔습니다.
향기로운 사람은 뒷모습도 아름답다 하였습니다. 제일 좋은 관리자는 지장, 용장, 덕장의 모습을 골고루 갖춘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장선생님은 이 모습을 모두 갖춘 분이란 생각됩니다. 자신의 경영관을 밝게 가지고 결정의 순간에는 사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희로애락은 언제나 잊지 않고 찾는 분이셨습니다. 어쩌다 약주라도 한잔하고 댁에 가시면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정말정말 행복합니다’라는 노래를 독창하며 손뼉을 치는 바람에 동네 사람 시끄럽다고 사모님께서 눈치를 준다고 하셨습니다. 너무 긍정적인 삶을 사시는 분이 아닐까요?
이제 가을도 깊어져 올 한 해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어제였습니다. 3층에서 내려다보니 현관 양쪽에는 그동안 긴 기다림과 손길을 머금은 국화가 환한 낮을 밝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국화꽃 속에서 떠난 교장선생님의 환한 모습이 아른거렸습니다. 지난해 이맘쯤 손수 국화를 재배하며 곁순을 따고 꽃봉오리가 솟아나면 뜨거운 가을볕을 피해 밀짚모자에 긴 팔 하얀 셔츠를 입고 지지대에 꽃받침을 묶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모습! 그러나 오늘은 가을빛 환한 그 빈자리에 벌들만 윙윙대며 지독히 허전한 향기만 있을 뿐입니다.
퇴임하신지 두 달이 지났습니다. 이제는 어떻게 지내실까? 바쁜 학교 일이 조금 마무리되면 그동안 사연들을 묻는 자리라도 한 번 마련해야겠습니다. 정말 좋은 사람은 언제나 그 향기가 그립고 동행을 하고 있다는 여운의 의미를 되새기며 퇴임 때 전한 ‘언제나 함께하는 비행을 꿈꾸며’란 이별의 글을 돼내어 봅니다.
꽃이 지면 잎이 더 잘 보이듯
누군가 내 곁을 떠나고 나면
그 사람의 언저리는 더 크다
처서를 넘긴 팔월 말
열어 놓은 창으로 귀뚜라미 방울벌레 소리는
스카프처럼 감기어 빈방을 휘젓는다
지독한 그리움
멍이 될 줄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마주하지 않았어야 하는데
인연이랑 이렇게 따뜻하고 슬프면서 질기다
여름이 비켜나는 초가을
빨간 백일홍 꽃보다 더 붉은 연정은
교단과의 긴 휴식이란 말에
콩대 타는 소리내며 눈물을 떨군다
사십 여 년의 긴 물결
마산을 거쳐 하동을 돌아
시집살이 보다 더 쓴 인동초 같은 지난 날은
기억속의 사진첩이 되고
이제
그 여정의 흔적은
듬성듬성한 하얀 머리카락에 세월의 꽃을 피우고
그립게 그립게 번져만 간다
돌이켜 볼까?
세월의 징검다리 되돌아 밟아 가면
젊음의 열정
고향 마당 고루고루 뿌린 가르침의 씨앗들
그 열매들은 오늘의 고향과 나라를 만들게 하였지
시간, 이별
그 누가 만든 율법인지 모르지
영원한 해후를 바라며
상사화의 모진 사연
파란 조각 바람에 날리며
언제나 포옹하고 싶어라
보름달 보다 환한 얼굴
아플 때나 힘들 때나
미소 띈 얼굴
엄마 손은 약손이란 말처럼
더 귀한 처방으로 어루만져 주셨지
배려와 나눔에 아낌이 없으신 분
탁배기 한잔에
콧노래 흥얼거리며
밀짚모자 눌러선 시골 할아버지 영상들
가슴을 열어 모두를 보듬고
영원한 웃음을 선물로 주셨지
언제였던가?
월급 세 번 남았다는 중얼거림
참 가슴을 아프게 했지
그래도 사실이 아니라며
비내리는 칠월
순천, 고흥, 지리산 둘레길을 돌아
함양상림 연잎에 그리움을 심었지
조그만 욕심
같은 하늘 아래 호흡하는 것만으로
마냥 좋았었지
그런 좋은 일들
소멸되지 않는 바이러스가 되어
동영상으로 돌아간다
사랑해
가장 어려운 말이면서
가장 아름다운 말
오늘 이 자리
단추만한 구멍을 뚫어서
사랑이란 감미로운 바람을
베풂이란 덕을 꿰어 주신 가르침
언제나
사랑과 배움이란 방안에서
이야기꽃을 피우겠습니다
누가 만들었을까?
이 지독한 그리움
저기 맴을 도는
빨간 고추잠자리에 실어
파란 가을 하늘 물들이고 싶다
언제나 함께 하는 비행을 꿈꾸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