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멸치의 세 가지 공통점은 첫째. 좁은 문을 좋아한다. 둘째, 남 따라 한다. 셋째 떼거리로 몰려다닌다.’ 이 말은 2012년 11월에 발간된 박진욱의 ‘바람과 이슬로 몸과 마음을 씻고 조선의 귀양터 남해 유배지를 찾아서’ 중 지족해협 죽방렴을 찾은 대목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 책의 시작은 유배객 후송 류의양이 처음 건넜다는 노량에서 문을 연다. 그리고 한 여름날 자전거에 다리품을 팔아 남해의 곳곳을 돌아보며 옛 문헌과 전해오는 이야기를 근거로 한 포토에세이 형태로 발간되어 남해에 담겨있는 사연을 누구나 쉽게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하였다. 책을 읽어보면서 지은이가 남해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사람보다 더 남해에 관한 역사와 민담, 설화를 잘 알고 있는 것에 대하여 지금껏 남해를 떠나본 일이 없는 남해 사람으로서 부끄러움이 앞섰다.
남해를 더 잘 아는 방법은 무엇일까? 남해유배문학관이 건립된 이후 2012년에 제3회 김만중 문학상시상식이 있었다. 그 중 소설부문에 임종욱의 ‘남해는 잠들지 않는다’라는 작품이 대상으로 선정되었다. 뒤이어 제1회 김만중문학상수상작 독후감 대회와 전국 유배문학스토리텔링 대회가 개최되었다. 이를 계기로 서서히 유배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으며 얼마 있지 않으면 김만중의 유배지 노도가 문학의 섬으로 새롭게 단장된다고 한다. 이런 시점에서 앞에서 말한 수상작품이 남해를 어떻게 피력하고 있는지 궁금하였는데 결과는 남해 사람으로서 부끄러움을 가지게 하였다.
소설은 허구의 세계다. 하지만 그 밑바탕은 사실의 씨앗이 발아하여 허구의 꽃으로 피어난다. 즉 허구 속에 진실이 숨어있는 셈이다. 대상 작품에서는 김만중의 유배 당시 남해의 풍물, 인심, 생활상이 작가의 머릿속에서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어 재탄생하고 있다. 남해에 태를 묻지도 않은 사람이 어떻게 남해를 속속들이 잘 알고 있는지 경이로웠다.
‘수구초심’이라는 말이 있다. ‘여우가 죽을 때 머리를 자기가 살던 굴로 향한다.’는 말로 고향을 그리워 하는 마음을 담은 한자성어이다. 모든 사람에게 고향은 있다. 고향은 유년의 기억을 언제나 되새김 하게 만들고 그리움으로 남아있다. 어쩌면 영원한 어머니의 품인지 모른다.
내 고향 남해! 올겨울 김만중문학상수상작 읽기와 독후감을 쓰면서 남해에 대한 문외함을 반성하며 내 고향을 보는 시각이 새로운 화두로 다가왔다. 당신은 남해에 대하여 얼마나 잘 알고 있습니까? 모든 사람은 자기 근본에 대한 궁금증과 자긍심이 있다. 그 뿌리와 역사를 기록한 책이 성씨별 족보이다. 하지만 족보는 한집안의 내력으로 국한되지만, 고향에 대한 내력은 집안의 성씨를 벗어난 공동체로 엮어져 숨을 쉬며 미래로 이어진다.
남해를 방문한 사람의 남해에 대한 첫인상은 어떠할까? 남해는 남성적인 거제도와 비교하여 해안선이 아름답고 산세가 부드러워 여성성을 가진 섬이라고 말한다. 지도를 보고 어떤이는 남해를 엄마가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으로 보는가 하면 어떤 이는 의자 모양이라고 하기도 한다. 어찌하던 두 의견 모두 포근함과 휴식을 주는 여유를 가진 섬으로 함축할 수 있다. 하지만 객지 사람들은 남해사람의 성향이 배타적이고 투박하고 거칠다고 한다. 정작 남해에 몸을 담고 하나가 된 사람은 그런 성향에 대하여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왜 남해사람이 배타적이고 거칠다고 느끼는 것일까?
남해는 고려 시대부터 왜구의 노략질 때문에 살기 어려운 곳이었다. 남해에서 왜구와의 싸움으로 유명해진 사람이 고려 시대 정지 장군의 관음포 대첩, 조선수군기지가 있고 최영 장군을 모신 미조의 무민사, 그리고 임진왜란의 마지막 싸움인 노량해전과 더불어 관음포 앞바다에서 전사한 이순신 장군으로 대변된다. 남해는 지리적으로 한양에서 멀어 중앙정부의 힘이 미약한 곳이었다. 기껏해야 현령이 있을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민초들이 왜구의 노략질을 피해 살아남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였는지 가히 상상이 간다. 때론 섬을 버리기도 하였으며 사람들 스스로 성을 쌓고 왜적의 침입을 대비하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곳이 바다에서 돌을 건져다 쌓은 설천면 진목리의 대국산성이며 남면 상가리의 임진성이다. 이 임진성이 일명 민보 산성이라 불리는 것을 보면 쉽게 수긍이 갈 것이다.
앞에서 말한 박진욱의 글 중에서도 이런 왜구와 관련된 부분이 있다. 일본군은 임진왜란의 마지막 싸움인 노량해전에서 대패한 이후 운요호사건으로 강화도조약 체결 전까지 우리나라 근해에 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무력으로 조선을 침탈한 이후 전국 곳곳에 파출소를 세우고 일본인 파출소장을 두었지만 유독 남해의 설천면 노량파출소만 조선인 파출소장이 근무했다고 한다. 이유인즉 일본인 파출소장이 오면 얼마못가 급사를 하는 일이 많아 아직도 식지 않은 이순신 장군의 혼백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 한다. 그리로 현대건설에서 남해대교를 건설할 당시 일본인 기술자의 도움을 받았는데 기술자들이 가까운 하동이나 남해읍에 머무를 수도 있었겠지만 이순신 장군이 무서워 저 멀리 여수에 숙소를 정하고 잠깐 둘러보는 형태를 취했다고 하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19번 국도가 통과하는 관음포를 보자. 그곳은 일본의 침략사에 치욕적이고 굴욕적인 장소였다. 그래서 일제강점기 많은 사람들을 불러서 매립을 하여 농경지로 만들었다고 한다. 오지도 가지도 못한 퇴로가 막힌 관음포 만에서 일본군은 조․명연합 수군의 공격으로 전멸하였으며 임진왜란의 종지부를 찍었던 곳인 만큼 일본으로서는 떠올리기 싫은 역사였다. 이런 왜구의 침탈에 시달린 남해 사람들의 생존 방법은 처절했으리라 생각된다. 그것이 대를 이어 남해 사람의 성향으로 자리를 잡은게 아닌가 한다.
박진욱은 남해섬을 둘러보고 물러남의 아름다움, 돌아감의 지혜, 멈춤의 여유를 말하고 있다. 남해에 몸담고 사는 자신보다 더 상세하게 남해 곳곳을 알려주고 있다. 남해사람이 아닌 타향사람이 남해에 관하여 관심을 두고 책까지 펴내는 것을 보며 남해에 발을 딛고 사는 사람으로서 부끄럼과 더불어 좀 더 내 고향 남해에 대하여 더 많이 알고 관심을 가지는 것이 고향의 뿌리를 깊게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