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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탐방

비극의 기억이 다시 있어서는 안된다

광양여중에서는 학생들에게 6.25를 계기로 올바른 국가관을 갖도록 하기 위하여 6월 21일 7교시에 학생 간부학생을 대상으로 학교장 특별수업을 실시하였다. 우리 민족사에 6.25등 험난한 고비가 많았지만 이를 극복한 것은 자랑스러운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바로 알아도록 후세들에게 전달하여야 국가가 바로 설 수 있다. 한국내부에서도 갈등이 많이 있는데 오늘의 대한민국이 나가갈 방향을 바로 잡게 될 것이라는 생각때문이다. 수업을 실시한 후 3학년 한 학생이 수업을 듣고 쓴 기록이다.

"비극의 기억"

나는 책을 좋아하고, 그래서 많은 책을 읽었다. 박완서 작가는 그 수많은 책들 중에서 찾아낸,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이다. 천의무봉이라 불리는 문체로 써낸 많은 글 중에는 6· 25 전쟁 전후를 배경으로 하는 글들이 꽤 많았다. 그래서 한번은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읽었던 적이 있었다. 아름다움에 몸서리가 쳐질 듯한 봄을 묘사하는 따스한 글이었고, 나는 죽 읽어내려갔으나 여기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엄마에게도 나에게도 새롭게 전개될 생활에 대한 예감이 충만한 특별히 아름다운 5월이었다. 그러나 하필 19 50년의 5월이었다. (중략) 그 해 6월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 부분을 읽고 나서는 뒤의 내용을 편히 읽지 못했다. 뒷 내용에 바로 ‘그 해 6월’이 나온 것이 아니었는데도 나는 그때 후편인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를 이미 읽은 상태였고, 그것은 그 모든 책을 읽기 전에도 알고 있었던 사실과 더해져 나를 불안하게 했다. 박완서 작가의 책들은 직접적으로 가장 참혹한 장면을 보여주지 않으면서도,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섬뜩하고 참담한 마음이 서서히 피어오르게 했다. 박완서 작가의 책들을 읽고 있노라면 오로지 어렴풋한 짐작만으로 채워졌던 전쟁의 끔찍함이, 오히려 담담하게 서술된 문체에서 점점 더 퍼덕거리게 생생해져 내가 잠겨버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석 달쯤 지나 공부에 바빠 감정들이 마음속 밑바닥에 조금씩 가라앉았을 무렵, 학교에서 교장선생님의 안보교육 특강 수업에서 다큐멘터리 하나를 보았다. 6·25에 참전하셨던 분들, 그 중에서도 주로 재일교포의 자녀들이 아버지의 나라에 와 싸운 이야기였다. 아내와 아이가 있는데도 죽음을 무릅쓰고 고향을 떠나 아버지의 나라를 지키러 나간 사람……. 아직 대학생인데도 전쟁에 나가기로 결심했던 사람……. 각종 작전에 동원되어서도 언어의 차이로 고생했지만 끝까지 온 힘을 다했던 사람들……. 그분들이 쏟았던 힘과 노력만큼 그분들의 미래도 밝았으면 좋았겠지만…….

휴전 후 다시 가족이 살던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분들이나, 심지어는 돌아가신 분들도 상당히 많았다.  640여 명 중 135명 전사. 그 중 한 장의 사진은 나를 가장 큰 충격으로 몰고 갔다. 손과 발이 몸쪽으로 오므라든 채 빳빳이 굳어 죽어있는 군인의 모습. 그 뒤에 이어진, ‘사람이 여기에 총을 맞으면 피가 조금씩 나오다 손발을 이렇게 하고 죽는다, 그 모습을 자주 보았었다.’라던 앞서 나온 사진을 설명하는 증언은 나를 더 큰 충격에 빠뜨렸다. 전쟁 영화나 소설에서 묘사되는 것은 종종 보아왔지만 그저 잔인할 뿐이었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의 이 같은 모습은 다시 재현된 것에 비할 바 없이 충격적이었다. 비극이었다.

한 민족이 둘로 갈라져서 싸우는 비극, 이라는 자주 나오곤 하는 말을 쓸 것까지도 없었다. 6·25 전쟁으로 약 440만 명의 사상자와 민간인 사상자 (오롯이 남한 측에서만이다) 약 140만 명, 그리고 이산가족 1000만 명이 발생했다. 말로 이루 다 할 수 없는 비극이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토록 참혹한 모습이 다시 재현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TV에서부터 교과서까지, 북한과 관련되었다 하면 꼬박꼬박 나오던 ‘평화통일’이라는 말의 무게가 새로이 깨달아졌다. 그러기 위해서 얻고 지켜내야 할 안보의 중요성도 새삼 다가왔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아픈 기억이지만, 꼭 되새겨야 한다. 우리나라의 역사에 무슨 일이 일어났고, 왜 그러하였는지, 또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도,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안타깝게도 각종 언론매체에서 비치는 남북관계는 오늘도 위태롭다. 그러나 우리는 역시 기억해야 하며, 60년 전의 우리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할 것이다. 그랬을 때 우리나라는 진정한 안보의 길로, 평화와 손을 잡고 들어서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지금, 이렇게 현재의 대한민국에서 무사히 생활할 수 있도록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그분들께 정말로 감사한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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