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마지막 한 장이 남았다. 올해도 딱 한 달 남은 것이다. “와, 정말 세월이 빠르다” 세월이 가는 속도는 나이에 비례한다고 한다. 20대는 20km, 50대는 50km의 속도로 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가 어렸을 때는 그렇게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 마음이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문득 유년시절이 떠오른다. 고향이 수원인 필자. 유년시절에 대한 추억도 모두 수원에 관한 것이다. 유년시절의 놀이는 자연과 함께 했다. 가까이 있는 팔달산은 우리들의 놀이터였다. 동네에서 놀다가 심심하면 팔달산을 찾았다.
그 당시 우리들은 ‘팔달산’을 ‘팔딱산’으로 불렀다. 동네에서 구비되어 온 ‘팔딱산’에 대한 재미난 이야기 하나. 우리는 그 이야기를 믿었다. 그럴듯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어느 때인가 수원에 물난리가 나 온 동네가 물에 잠겼는데 그 중 ‘팔딱산’ 윗부분만 남아 팔딱팔딱 뛰고 있었다는 것. 지금은 믿기지 않지만 그 당시 우리들은 그렇게 믿었다.
팔달문에 관한 이야기도 있다. 한글은 물론 한자도 잘 모르는 나이였기에 우리는 ‘팔달문’을 ‘남대문’으로 알고 있었다. 서울에 남대문이 있듯이 수원에도 남대문이 있다고 믿었다. 또 시내버스 안내 푯말도 남문으로 씌여져 있었다. 수원사람들은 팔달문을 남문으로 불렀다. 한자로 씌여진 ‘팔달문’을 ‘남대문’으로 읽었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 시종을 알리는 신호가 사이렌이었다. 지금은 대부분의 학교가 교실 음악 타종을 하지만 그 당시는 학교뿐 아니라 인근 동네에도 싸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것으로 주민들은 시간의 흐름을 짐작하였다. 팔달산 남쪽에도 ‘ㄴ’ 자 모양으로 된 흰 건물이 있었다. 그 곳에서는 정오가 되면 수원 전체에 싸이렌을 울렸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소리였다.
팔달산은 우리의 소중한 놀이터였다. 막대를 줍거나 나뭇가지를 꺾어 칼싸움 놀이를 했다. 병정놀이로 나뭇가지로 진지를 구축했다. 진지에 숨어 보초를 섰다. 마치 군인처럼 암구호놀이도 했다. 암호를 제대로 대면 우리 편이고 그렇지 않으면 적군으로 간주했다. 그렇게 어린 시절의 추억을 만들었다.
겨울철이면 썰매를 직접 만들었다. 썰매발판이나 날은 집에 있는 것으로 하였으나 꼬챙이는 팔달산에서 구했다. 적당한 굵기의 나무를 구해 굵은 못을 연탄불에 달구어 거꾸로 박았다. 새총도 직접 만들었는데 ‘Y자’ 모양으로 된 나뭇가지 공급원은 팔달산이었다. 학교에서 난로 불쏘시개감으로 솔방울을 가져오게 했는데 그 때도 팔달산을 찾았다.
팔달산 아래 향교. 초등학교 시절 어느 여름철, 친구들과 함께 그 곳을 찾았다. 어미 참새들이 먹이를 물고 기왓장 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호기심이 발동한 우리들 그냥 있을 수 없다. 마침 소나기가 내린다. 빗줄기가 굵다. 온통 비를 맞으며 지붕위로 올라 기왓장 밑을 뒤져 새끼참새를 잡았다. 그 참새를 따듯한 품속에 넣어 집으로 가져갔으나 얼마 안 있어 죽고 말았다.
중학생 때에는 주로 일요일 팔달산을 찾았다. 그 당시 배드민턴 운동이 유행이었었는데 아침 일찍 기상하여 동네 친구들과 함께 강감찬 장군 동상 앞 도로에서 운동을 즐겼다. 배드민턴은 가까이 있는 학교 운동장이나 동네에서 해도 되었었는데 구태어 팔달산까지 찾아갔던 것이다. 팔달산 회주도로엔 배드민턴을 즐기는 사람들이 꽉 차 있었다.
팔달산은 처녀 총각 연인들의 훌륭한 데이트 코스였다. 어린 우리들은 그들의 데이트를 이상한(?) 시선으로 보았다. 남녀칠세부동석이란 개념이 머릿속에 들어가 있던 시절이었다. 수원시내 중심가에서 젊은 남녀가 손잡고 걸어가면 시선이 집중되던 때였다. 청춘의 연애를 아름답게 보아야 했는데 그런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탓도 있었다.
지금의 팔달산. 수원화성과 함께 수원의 관광명소가 되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국내 관광객뿐 아니라 외국인들도 많이 찾고 있다. 그들에게 지금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수원의 옛모습, 그리고 변천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수원 이해에 큰 도움을 주리라 본다. 어린시절 내 고향 수원과 함께 한 팔달산의 추억을 떠올려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