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5 한국교총해외연수로 인도를 다녀온 단상(斷想) -
화성동화중 김진대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할까? 사람들은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봤을 것이다. 고행을 통해서 행복이 무엇인지를 찾고자 한국교총인도해외연수에 선뜻 응했다. 인도하면 누구나 한 번 가고 싶지만 쉽게 실행에 옮기기 쉽지 않은 지역이다. 관광정보지에 의하면 인도는 ‘천의 얼굴’을 가진 나라로 인도를 여행하면 결국에는 흩날리는 먼지까지도 사랑할 수도 있게 된다고 한다.
델리 공항에 내리자마자 공항의 뿌연 먼지가 우리들의 행복을 찾는 여정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는 듯했다. 고행을 즐기기 위해 인도를 찾았다고 하지만 첫날의 도로의 풍경을 보는 순간 눈을 비비고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첫발을 내딛는 아침에 마음이 선뜻 내키지 않았다. 델리 중심가에서 소변을 보는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은 이해 안 된다고 할 것이다. 더구나 아침에 소가 길가에 누워있거나 돼지나 개가 쓰레기를 뒤지는 행위는 긍정적으로 보려고 해도 쉽지 않을 것이다. 이 상황에 대해 현지 가이드는 소나 돼지가 아침에 쓰레기를 뒤지는 행위는 길거리의 쓰레기를 처리는 고마운 존재라고 설명했다.
첫날부터 더 이해 안 되는 장면은 인도 수도 델리 중심가에서 버스로 이슬람사원으로 이동하는 도중에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불을 지펴 밥을 해먹는 행위나 남자들이 전신을 다 드러내고 목욕하는 장면이었다. 가이드는 그나마 델리는 사정이 다른 지역에 비해 나은 상태라고 하는데도 이러니 인도라는 나라에 대해 어떤 관점에서 바라봐야 할지 혼선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 여행에 목적이 행복이라는 의미를 찾는 것이었기에 매력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 나라 사람들은 행복을 어떻게 생각할까?
인도여행은 그 자체가 매력이라고 다들 말하지만 처음 방문한 나로서는 수도에서 벌어지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보고 혼란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가이드는 자기 나라에 대해 가감없이 보여주면서도 자기 나라 문화를 이방인에게 이해시키려고 노력하는 모습에서 또다른 매력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현지인 가이드는 인도사람들의 행복에 대해 팔자라는 관점에서 설명했다. 남을 원망하거나 자기 자신의 미력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살아간다고 했다. 나는 아무리 팔자라고 하더라도 나는 적어도 두 가지는 생각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자기에 주어진 삶을 자포자기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과 주어진 삶을 허무하다는 전제하에 다양하게 다가오는 다양한 삶을 모두 긍정적으로 수용하면서 살아가는 것과는 다르지 않을까 생각했다. 인도는 어떤 범주에 넣어야 설명이 가능할지 확언할 수는 없지만 기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을 듯하다. 기후가 사람들이 열심히 일을 하고 자기 발전을 꾀하기보다는 주변 환경에 적절히 순응하는 삶을 살아가게 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현지는 가이드 중간 중간에 재미있는 비유를 들어가며 자기 나라의 상황을 재미있게 설명했는데 위정자를 도둑에 비유했다. 어느 나라이든 제대로 된 관리가 그리 많지 않은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관리들은 국민 위에 군림하면서 국민을 하찮은 존재로 여기는 자라 할 수 있다. 인도도 이런 도둑들이 들끓고 있어서 국민들은 어려운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정부 고위급 관리 들은 넓은 저택에서 잘 살아가고 있다고 그 저택들을 보여주었다. 인간들의 삶이 극과 극을 오고 가고 있음을 볼 때, 아쉬움이 남는다. 마침 여행기간이 선거기간이었는데, 거리에는 주지사 선거 출마자의 벽보를 여기저기에서 볼 수 있었다. 가이드의 말이 모두 신뢰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어떤 주는 주지사의 무능이 인도 국민의 삶이 동물에 버금하게 만들었다고 여행기간 내내 자주 언급했다. 이 말이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것은 이런 위대한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는 나라라면 세계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찾아오는 관광객들로부터 벌어들이는 자본으로 더 많은 관광객을 불러 모으기 위해 관광 인프라를 구축한다면 세계 7대 불가사의라고 하는 타지마할 궁전을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가지 않아도 될 것이다.
자연도 이방의 마음을 아는지 첫날 대통령을 버스로 여행하는 것을 안개가 방해하기 시작한 것이 어쩌면 다행이 아니었을까? 시내주요 건물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을 위안삼았다. 이어 인도의 국부라고 칭송되는 마하트마 간디화장터에서 간디는 비폭력 평화를 주장하는 것은 좋았지만 국민의 의식을 좀 더 깨우쳐주는 방향으로 선회해서 잠자는 국민을 깨웠더라면 지금과 같은 모습의 나라는 아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참으로 다행한 것은 인도 곳곳에서 우리나라의 박정희 대통령이 주창했던 ‘새마을 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나라의 현재 총리도 선거 기간내내 화장실이 없어서 거리에서 아무 곳이나 소변을 보는 이런 모습을 개선하고자 일정 거리마다 공중화장실을 만들고 이런 정책을 완성하고자 5년씩 3번 당선시켜달라고 공약을 내걸었다고 한다. 정말 인도가 우리나라처럼 새마을 운동이 성공적으로 잘 이루어지길 소망한다. 나는 이것이 인도 사람의 눈을 보고 성공을 확신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인도 한 학교에서 학생들의 눈에서 밝은 광채를 볼 수 있었다. 아마도 그 아이들이 어른들이 되어 세계를 누빌 때는 지금과 같은 인도 아닌 중국처럼 슈퍼 인도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어쩌면 성장의 극한에 이렀기에 인도 우리 발전의 답이 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어 자이푸르로 이동하여 ‘암베르성’에 우리 일행들은 산에 올라서 인도의 대부분의 건축물에서 볼 수 있는 붉은 사암으로 만든 성을 보았다. 이 성은 무굴황제 악바르의 참모 출신인 ‘만 싱’이 짓기 시작해 그의 후대 ‘자이 싱’이 완성시켰는데, 재미있는 것은 12개 부인의 방이 있었는데 서로 만나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또한 산 정상에 이렇게 많은 돌을 어떻게 날랐을까? 누가 이 돌들을 이 높은 산 위에 가져왔을까? 백성들은 위정자들의 정권을 유지하는데 불쏘시개에 불과했을까? 인도인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마침 내려오면서 인도 국민들이 물의 궁전 앞에서 먹이를 계속 물속으로 던져주고 있었다. 물론 종교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지만 백성들은 그대로 자기의 행복을 어떤 형식으로 든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의 통치는 총리가 중심이 되어 인도를 이끌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이 나라에는 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시티 팰리스(city palace)를 방문함으로써 알게 되었다. 현지 가이드는 세계 첫 번째의 계획도시로 300년 전에 형성되었다고 설명했다. 사실 내가 살고 있는 수원도 신도시라는 점에서 가이드의 말은 확인할 필요는 있지만 어찌되었건 이 궁전은 온통 분홍색으로 되어있어서 일명 분홍색 도시로 불리고 있었다. 입구에 새들이 똥을 수직으로 투하하는 바람에 조심조심해서 들어가야 했다. 종교적인 의미 때문에 새들이 귀중한 문화유산을 훼손하는 모습이 비단 여기뿐만 아니라 타지마할 궁전에도 볼 수 있었다. 물론 종교는 그 어떤 이념으로 뛰어넘을 수 없는 도그마이므로 어쩔 수 없다지만 이런 것도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봤다. 이 궁전에 현재 이 왕조 41대 왕인 14살의 Padmanbh Sigh(2011-현재)라는 분이 살고 있다고 한다. 지금도 이 왕의 영향은 이 지역에서 막대하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경주에 천성대가 있지만 이 나라에도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300년 전에 세워진 천문대가 있는데 20초까지 정확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시대 왕조는 이것을 만든 목적이 궁합, 띠를 정확하게 지정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말을 가이드로 듣긴 했지만 이것이 과연 백성들은 행복했을까? 다만 이방인이면서 시대를 달리 하는 위험한 발상이긴 하지만 의문을 가져봤다.
이 번 연수에 가장 핵심이 되는 타지마할 궁전을 눈으로 보는 날에는 연수생들 모두 탄성이 입과 손이 연신 카메라를 학대하기 시작했다. 주요 포토라인에는 사람들로 넘쳐나 줄을 서서 대기하는 모습도 보였다. 우리는 이 궁전에 대해서 이미 잘 알고 있다. 정말 알려진 대로 무굴제국의 황제 ‘사자한’이 사랑하는 왕비의 죽음을 애도하여 국력을 기울여 건설한 타지마할 묘궁은 누구도 이 대건축물의 아름다움에 토를 달 사람을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이 건축물이 세계 7대 불가사의에 올라있기도 하다. 처음에는 나 역시 수없이 카메라로 여러 각도에서 이 건축물의 아름다운 장면을 담았다. 그런다면 이 건축물 내부로 들어가 보고 자세히 관찰하고 다시 강을 보면서 한 참 생각하다 다시 돌아보니 하얀 대건축물이었던 타지마할 묘궁이 빨간 핏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이 건축을 완성하기 위해 동원되었을까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평가절하하기 시작했다. 다만 이 나라의 종교를 이해하기 못하고 이방인의 관점에서 왜곡할 수 있는 위험함이 있을 수 있다. 어쩌면 이 건축물을 짓다가 죽은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해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핏빛 달러가 돔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인도 국민이 맨발도 달러를 줍고 있지만 그 돈은 모두 어디로 갔는지 손바닥에는 빈 손이었다. 자세히 보니 그 돈은 국민들 손으로 들어가지 않고 위정자들 손에 들어가는지 백성들은 맨발 맨손이었다. 그러니 타지마할 묘궁 관광 인프라도 제대로 구축하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또 다른 각도에서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는 학교에서 토론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는 나는 그렇지 않다고 여러 사람들에게 자주 이야기한다. 사실 우리나라는 신라시대부터 화백제도와 같은 형태로 토론이 정치적인 제도에 효과적으로 반영되고 있었지 않나? 이 타지마할 묘궁이 건축할 때도 우리나라 조선시대 사대부처럼 임금 앞에서 “마마 죽여주시옵소서.”라고 말하지 못했을까 생각해봤다. 만약 우리나라처럼 ‘사자한’ 황제 앞에서 극렬하게 반대한 신하는 왜 없었을까? 여기에 이름 없는 백성들의 뼈는 얼마나 많을까? 대건축물의 양면성을 언급하지 않는다면 이 백성들은 저승에서도 제대로 숨쉬지 못할 것이다. 이런 점도 생각해봐야 인도 백성들이 행복할 것이다.
나는 며칠 동안 돌아봤음에도 인도인들의 행복에 대해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침 우리 일행이 아그라에서 ‘잔시’를 거쳐 ‘카쥬라호’까지 버스로 12시간 이동하면서 인도의 구석구석을 볼 수 있었다. 이런 장면이 오히려 인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아침 일찍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에 여자나 남자나 여러 군데서 누가 보든 보지 않든지 엉덩이를 내리고 대지에 거름을 주고 있었다. 그리고 길 가장자리에는 쓰레기가 널려있지 않은 곳이 없었다. 또 그 쓰레기를 뒤지는 소가 있는가 하면 어떤 소는 먹다가 지치면 누워 자기도 했다. 여기에 돼지도 덩달아 뛰어다니고 개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지나가고 소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었다. 물론 이미 다 알고 있듯이 인도에는 종교적인 이유로 소를 죽이거나 잡이 먹지는 않는다. 한마디로 인도는 인간과 자연의 경계가 없어진 곳이었다. 인도가 인간도 함께 살아가는 동물이자 박물관이었다. 우리 인간도 동물이나 별반 차이가 없지 않다. 잘 생각해보면 우리는 아침에 깨끗하게 손을 씻고 깨끗한 옷을 입고 밥을 먹지만 그 배 속에는 똥을 한 무더기가 안고 살아가는 존재에 불과하다.
인도인은 내가 보기에 누구를 의식하지도 않고 비교하지도 않으니 행복하게 보였다. 이것이 진정한 행복이 아니겠는가? 우리나라는 아주 사소한 것도 목숨 바쳐가며 싸움을 벌이지 않는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 나라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본다면 좀 마음의 여유를 느끼지 않을까? 어쩌면 모든 비극은 남과 비교에서 생기지 않을까? 필자 개인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우리는 소통을 이야기하지만 자기 입장을 수용해주면 소통이고 그렇지 않으면 불통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극단의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도 이제는 어떤 형태로든 정신적인 행복한 삶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카쥬라호의 에로틱사원에서는 정사장면을 보면서 정사도 이 인도 국민은 행복의 한 방편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이 부분은 언급하는 것은 우리의 금기 사항이므로 언급하기에 조심스럽다.
우리 일행은 인도인에게 어머니의 강으로 여기는 갠지스강에서 인도인의 행복을 볼 수 있었다. 하루 일과를 끝낸 힌두교인들이 캔지스강에서 치루는 ‘아르띠뿌자’ 종교의식에서 힌도교인은 행복을 갠지스강에서 빨래하고 있었다. 그 다음날 다시 행복을 꺼내 입고 다니고 일터에 나가 행복한 마음으로 일하지 않을까 생각해봤다. 그 날 저녁에 나는 보지 못했지만 우리를 이끌고 간 한국교총회장님은 금방 죽은 듯한 시체를 사람들이 둘러메고 갠지스강으로 가는 모습을 보았다고 했다. 이 나라는 기후가 더워서 우리처럼 며칠 동안 장례를 치를 수 없는 것이기에 이런 모습도 볼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 이튿날 갠지스강에서 일출광경을 지켜보다가 보니 어린 아이들이 화장터에 시체가 타다가 남은 곳에서 돈이 될 만한 무엇인가를 줍는 장면이 눈에 띄었다. 죽음 옆에 삶이 꿈틀거림을 볼 수 있었다. 이제야 인도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 사람들은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일부로 보고 있었다.
가이드는 갠지스강물은 히말리야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이기에 성스럽고 실제로 이 물을 떠 실험해보니 박테리아도 생기지 않는다고 설명하지만 왠지 믿겨지지 않는다. 나는 아직 인도인이 아님이 밝혀진 셈이다.
마지막으로 종교가 화합을 해야 함에도 종교간의 투쟁의 장면이자 부처님이 최초로 설법한 부처님 초전 번륜지를 보고 이 여행을 마무리 지었다.
이 여행은 인간과 자연의 경계가 허물어진 인도를 마음 한 구석에 오래 동안 남겨두고 싶은 마음이 있다. 내 삶을 돌아보는 여유가 생겼다는 점에서 가슴이 따뜻해져
타지마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