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는 시대상황에서 살아남는 길은 힘을 기르는 일이다. 이 힘이 역사를 움직인다. 세계사를 움직이는 것이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의 중심세력은 미국파였다. 물론 건국 직후 인재가 모자라던 시절 고육지책으로 일본파가 중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나라의 틀이 갖춰지면서 우리나라의 발전을 주도해온 세력은 누가 뭐래도 미국파였다. 1960년대 이후 미국에서 공부한 군인.정치인.경영인.학자들이 사회 각 분야의 주역이 됐다.
자연스레 미국 배우기가 유행했다. 학자들은 미국의 사상과 제도를 가르쳤고, 기업들은 미국식 자본주의를 실천하였다. 그래서 미국적 가치, 예컨대 자유 민주주의나 시장경제.합리주의.실용주의 등이 우리 가치체계의 윗부분에 자리잡았다. 한마디로 미국은 우리에게 절대선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한때 이 구도에 변화의 조짐이 보였다. 그리고 아직도 그 흔적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반미정서의 확산과 함께 미국은 물론 미국적 가치를 무조건 배척하려는 풍조까지 나타났던 것이다. 그렇다고 미국파가 구축한 거대한 정치-경제-학계의 복합체가 깨진 것은 아니다. 같은 외국 박사라도 아직은 미국 박사라야 행세를 한다. 미국이 어떠네 하면서도 아들.딸 미국에 유학 보내는 것은 이 틀이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갈등을 헤쳐나온 정치인들은 이제는 미국 대신 유럽을 배우려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독일을 배우려는 경향이 강하다는 느낌이 든다. 하기야 '약탈적'이라고까지 불리는 미국 자본주의를 답습한 우리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분배의 정의가 웬만큼 실현된 독일식에 눈 돌릴 때도 됐다.
독일의 정치.경제.사회 체제는 흔히 '사회적 시장경제'로 표현된다. 요즘 다소 변하긴 했지만 아직도 독일 노동자는 세계에서 가장 적게 일하고, 가장 많은 월급을 받으며, 가장 휴가가 길다고 한다. 한마디로 노동자 천국이다. 노동자 권익을 중시하는 좌파 입장에서 본다면 이보다 좋은 모델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역대 정부가 심혈을 기울혔던 지방분권화, 나아가 수도 이전 추진에도 독일 따라하기의 흔적이 역력하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추지함으로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 것인가이다.
물론 독일 따라하기가 지금 처음 시도되는 것은 아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패전의 잿더미에서 라인강의 기적을 일으킨 독일처럼 한강의 기적을 만들고 싶어했다. 잘 사는 독일 농촌을 보고 새마을운동을 구상했고, 아우토반을 보고 고속도로를 건설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통일을 달성한 독일의 노하우를 배우려 했다. 남북 정상회담은 독일에서 배운 바가 많았을 것이다.
이처럼 두 전 대통령은 독일에서 경제발전과 남북문제를 주로 배우려 했다. 그러나 앞으로 정부나 정치지도자가 독일을 좀 제대로 배울 필요가 있다. 경제발전은 배웠지만 민주주의는 취약한 면이 있고, 북한을 지원했지만 독일처럼 북한의 인권문제와 연계시키지는 못했던 두 전 대통령의 전철을 밟지 말라는 의미일 것이다. 독일의 수도 이전 문제를 91년 독일 의회가 본에서 베를린으로 천도하기로 결정한 가장 큰 이유는 베를린이 독일의 미래에 부합했기 때문이었다. 통일을 앞둔 우리 민족의 앞날에 어울릴 것인지는지 깊은 고민이 필요했다.
과학을 바탕으로 한 기술력은 자본주의 시대에 이르러 무한경쟁력의 토대가 되었다. 끊임없이 “왜”라고 묻는 철학적 통찰을 모든 학문에 접목시켜 기술과 실제 응용분야의 기본을 강화했다. 이러한 사고의 틀을 정치·경제·사회·교육 등 국가운영체계에 도입해 시스템화에 성공한 것이 바로 독일의 힘이다. 한마디로 그륀틀리히(gruendlich·근본적)라는 단어가 독일의 사회제도와 독일인의 사고의 기본을 형성하고 있다.
이는 유럽의 맹주로서 역할을 계속 담당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흔히 독일인의 특성을 이야기할 때 근면과 검소함을 이야기한다. 이들이 원래 근면하고 검소한 것이 아니라 합리적인 사고의 틀에 의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기본적으로 형성된 사고의 틀이 행동에 나타나는 중요성과 함께 국가제도의 틀이 사회 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간파할 수 있다.
이미 이들은 오래전부터 독일의 합리성과 논리성에 의한 흔들리지 않는 뿌리의 저력을 인지하고 배워 튼튼한 자생력을 갖추었으며, 향후 지속적으로 밑으로 뿌리를 내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능력에 따라 보장하고 추호의 편법을 허락하지 않고, 개인의 관념과 부정부패를 거의 허용하지 않는 사회구조, 초월적 권력이 아니라 국가와 국민을 위한 힘을 요구하는 정치풍토를 이룬 독일의 원동력을 우리는 어떻게 도입하고 배울 것인가?
그동안 많은 지도자가 내놓은, 국가를 위한 수많은 정책의 결과는 과연 무엇인가? 불안하고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작금의 국제정세에 우리도 이제 국가 정책과 제도에 “왜”라는 질문을 심각히 던져야 한다. 특히 교육에서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왜"라는 질문은 없고 산책은커녕 빌딩 숲에 둘러싸여 오로지 아스팔트 길을 따라 학원만 오가는 우리 자녀의 정서를 다시금 돌아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