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박씨 아저씨를 처음으로 본 것은 쓰레기분리수거장에서였다. 허름한 옷차림에 오른쪽 다리를 약간 저는 모습으로 쓰레기를 분리수거하고 있었다. 학생들이 교실에서 가져온 쓰레기를 한 곳에 부어 놓으면 아저씨가 일일이 손으로 분리수거를 하셨다. 재활용 업체가 수거하기 좋도록 깡통은 깡통대로 비닐은 비닐대로 종이는 종이대로 차곡차곡 쌓아 커다란 마대에 넣는 식이었다.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쓰레기를 정리하고 나면 점심시간이 될 정도로 그 양이 엄청났지만, 박씨 아저씨는 묵묵히 그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셨다.
박씨 아저씨는 장애인 의무고용제도에 의해 우리학교에 채용된 고용인이다. 아저씨께서는 평소 말씀이 거의 없으셨고 얼굴표정 또한 포커페이스처럼 희로애락에 대한 변화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가까이 하는 사람도 없고 굳이 아저씨를 찾아가서 말을 거는 동료나 학생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쓰레기장 옆에 서 있는 두 그루의 벚나무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꽃잎이 눈발처럼 흩날리던 때였다. 나는 오전 수업을 마치고 자연의 아름다움에 취해 교정을 거닐다 마침 외발손수레를 몰고 잔디밭을 가로질러 오는 아저씨와 조우했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하고 내가 인사를 건넸지만 아저씨께서는 아무런 대답도 표정도 없으셨다. 혹시 잘 못 들으셨나? 하는 생각에 이번엔 더욱더 큰 소리로
“아저씨이~ 안녕하세요?”
인사를 했더니 아저씨께서는 그제 서야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지으셨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아저씨께서는 청력에도 불편함이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아저씨가 그동안 왜 사람들과 대화를 하지 않았는지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그날 아저씨와 나는 그렇게 안면을 텄고 가끔 점심시간이나 쉬는 시간이면 산책삼아 쓰레기분리수거장을 찾아 아저씨와 마주하는 시간을 가졌다. 아저씨께서도 내색은 안 하셨지만 내가 친절하게 인사하며 먼저 말을 거는 것을 은근히 좋아하는 눈치셨다.
한번은 퇴근 무렵이 다 되어서 쓰레기장을 찾으니 아저씨께서 내게 뭔가를 내미셨다. 그것은 다름 아닌 어른 밥그릇 크기의 작은 화분 하나였다. 언뜻 보니 새로 산 것은 아니고 아마도 학생들이 교실에서 키우다 싫증이 나니까 쓰레기통에 버린 것 같았다. 노란 화분에 심긴 것은 게발선인장이었는데 아이들이 물을 주지 않아 그만 시들어 거의 고사 직전이었다. 평소 대화중에 내가 식물과 화초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아시고 나를 주려고 쓰레기더미에서 골라놓으신 것 같았다. 아저씨의 마음 씀씀이에 나도 그만 코끝이 찡해졌다. 비록 먼지를 뒤집어쓴 하찮은 화분이었지만 그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나는 아저씨께서 주신 게발선인장을 화장실로 가지고 가서 깨끗하게 목욕을 시켰다. 그리곤 휴지로 물기를 꼼꼼히 닦아 제1교무실 양지바른 창틀 위에 놓았다. 온몸에 흰 먼지를 뒤집어쓰고 죽어가던 선인장은 며칠이 지나자 파릇파릇 생기가 돌았다. 죽어가던 가지를 잘라내고 행정실에서 요소비료를 얻어다 뿌려주는 등 지극정성으로 한 달을 보살피자 게발선인장은 붉은 자주색 꽃을 화사하게 피워냈다. 혼자보기가 너무 아까워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 아저씨께 보여드렸다. 휴대폰 액정화면 속에서 화려하게 변신한 화분을 본 아저씨께선 처음으로 환한 미소를 지으셨다.
우리학교에서는 한 달에 한번 정도 교직원 친목회 겸 배구대회를 실시한다. 그럴 적마다 푸짐한 음식과 주류를 준비하여 먹고 마시는데 그때마다 박씨 아저씨께서는 회식에 불참하곤 하셨다. 아마 다리도 불편하고 귀가 잘 들리지 않으니 행여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까봐 스스로 그런 자리를 피하시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아저씨가 안쓰러워 안주와 막걸리를 꼭 챙겼다가 아저씨께 가져다 드리곤 했다.
한번은 아저씨께서 학교 식당에서 나온 각종 종이박스를 펴서 외발손수레에 가득 싣고 분리수거장으로 가기 위해 야트막한 언덕길을 오르고 있었다. 비교적 경사도가 약한 언덕이었지만 살얼음이 살짝 언 상태라 아저씨께서는 자꾸 헛발질만 할 뿐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 쉬는 시간이라 지나가는 학생들도 여럿 있었지만 흙과 음식물 찌꺼기로 범벅이 된 손수레를 선뜻 밀어주는 학생은 없었다. 결국 아저씨께서는 혼자서 언덕을 오르다 그만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나는 과학관 3층 교과교실 복도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다 부리나케 아저씨한테 달려갔다. 그러나 내가 달려갔을 때 아저씨께서는 이미 땅에서 일어나 옷에 묻은 흙을 툭툭 털고 있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아저씨 얼굴 한쪽이 시멘트바닥에 긁혀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아저씨를 모시고 급히 교내 보건실로 달려가 상처부위를 소독하고 약을 발라드리며 내일은 출근하지 말고 하루쯤 쉬시라고 간곡하게 말씀드렸다.
다음날 아침, 7시30분쯤 출근하는데 교차로 사거리에서 아저씨를 보았다. 예의 그 절뚝거리는 걸음걸이로 출근을 서두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차에 태워드리려고 내가 경적을 몇 번 울렸지만 아저씨께서는 오직 앞만 보고 걸음을 재촉하셨다. 나는 운전석 창문을 열고 "아저씨~" 하고 불렀으나 아저씨께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골목길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그 뒤로도 아저씨께서는 크고 작은 사고가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지각이나 결근을 하는 법이 없어 크게 신뢰가 갔다. 그렇다고 봉급을 많이 받는 것도 아니었다. 빠듯한 월급이었지만 아저씨에게는 천금보다 귀한 돈이었다. 가장으로서 세 명의 가족을 부양하고 생활비를 대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돈이고 소중한 직장이었다.
나는 아저씨의 성실한 모습을 보면서 7년 전 돌아가신 선친을 생각했다. 힘든 농사일 속에서도 자식들의 뒷바라지에 온 심혈을 기울이시던 아버지. 아들 녀석이 대학에 합격했다며 함박웃음을 지으시며 거칠어진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시던 아버지. 당신의 다리가 썩어가는 줄도 모르고 행여 자식들이 알까 숨겨 오시다 겨우 수술대에서 한 쪽 다리를 잃으셨던 아버지. 이 땅에서 아버지로 태어나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아버님들께 새삼 고개가 숙여지는 순간이다.
아저씨가 학교에서 하는 일은 주로 잔디밭과 화단 잡초 뽑기, 정원수 손질하기, 급식실에서 나오는 잔반 수거하기, 가을이면 교정의 낙엽 쓸기 등이다. 장애로 인해 일이 비록 느리고 서툴지만 맡은 일에 대해서는 꾀를 부리거나 낙출(落出)시키는 법이 없었다. 언제나 근면 성실한 자세로 집중해서 일하는 아저씨의 모습을 보며 나 또한 날마다 많은 것을 깨달으며 배우고 있다. 그동안 나는 수업이 많은 날에는 어떻게 하면 쉽게 한 시간을 때울까 요령피울 일만을 생각했었고, 딸아이에게 남들처럼 좋은 대학에 가지 못했다고 구박하고 짜증을 냈었다. 비록 경제적으로 풍족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은행에 빚도 없고 온 가족이 모두 건강한데도 그게 최고의 행복인 줄도 모른 채 계속해서 허기진 들개처럼 욕망을 쫒으며 살아왔던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사람에게 있어 장애란 무엇일까? 팔다리가 불편하면 장애인이고 팔다리가 정상이면 비장애인일까. 몸이 정상이면서도 마음이 병들고 타락한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단순히 사지가 불편하다고 해서 무시하고 잘못된 선입견을 가지고 백안시하는 모순을 저지르고 있다. 오히려 몸은 비록 불편하지만 영혼이 아침이슬처럼 맑고 깨끗한 장애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이야말로 이 타락한 세상에 한 줄기 구원의 빛이 될 천사들이 아닌가.
박씨 아저씨와 함께 근무한지도 어언 2년째로 접어들던 2014년 12월 중순경 아저씨의 표정이 유난히 밝다고 생각되던 어느 날, 아저씨께서 겸연쩍은 표정으로 작고 예쁜 사각형 봉투 하나를 내게 내밀었다. 봉투를 뜯어보니 결혼 청첩장이었다.
“와~ 축하드립니다! 따님이 결혼하시네요?”
나는 진심을 담아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결혼식은 12월 마지막 주 토요일 오후 한 시였다. 장소는 마침 우리 집과 가까운 시내에 있는 웨딩홀이었다. 아저씨의 표정을 보니 청첩장을 보여주기까지 많은 망설임과 갈등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직장동료들과도 그다지 친밀함도 없었고 당신 스스로도 자격지심 때문에 사람들과의 사교에도 거리를 두었으니 청첩장을 돌리기가 못내 쑥스러웠을 것이었다. 나는 아저씨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아저씨, 이거 제가 가져다 교무실 게시판에 붙여놓을게요. 선생님들께서도 축하해주실 겁니다.”
나는 제1교무실 출입문 입구 대형 게시판에 아저씨의 청첩장을 압정으로 꾹꾹 눌러 잘 붙여놓았다.
시간이 흘러 드디어 결혼식 당일, 걱정과 달리 많은 동료 교직원들이 식장을 찾아주었다. 교직원 모두와 숙직 아저씨. 그리고 급식실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들까지 대부분 참석해 아저씨 따님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해드렸다.
혼주석에서 불편한 다리로 하객들에게 반갑게 악수를 청하는 아저씨를 보니 언젠가 인터넷상에서 읽었던 기사가 생각났다. 공사장에서 척추를 다쳐 휠체어에 의존해 생활하는 아버지가 있었다. 이 아버지의 딸이 마침내 결혼을 하게 됐는데 예비 시어머니가 결혼식 때 친정아버지와 딸의 동반 입장을 강력히 반대했다. 창피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혼사는 파혼이 되었다. 천륜보다도 남에게 보여지는 체면과 위신을 더 중요시 하는 우리 사회의 비뚤어진 단면을 보는 것 같아 기가 막혀했던 일이 생각났다.
혹시라도 아저씨께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하지만 나의 이런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대기실에 있는 신부 얼굴은 더없이 행복해 보였고 신랑 쪽 사람들도 선하고 후덕해보였다.
식이 곧 시작된다는 안내 방송이 끝나자 드디어 면사포를 쓴 딸의 손을 잡고 박씨 아저씨가 식장 안 버진로드에 들어섰다. 결혼행진곡에 발을 맞추며 옥색 대리석과 생화 등으로 장식된 아름다운 신부 길을 한 발 한 발 걷던 아저씨의 눈에서 뜨거운 감격의 눈물이 흘렀다. 비록 장애 때문에 걸음걸이가 서툴고 어깨는 기울어졌지만 딸에 대한 아버지로서의 의무와 헌신은 산처럼 크고 높았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아낌없는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리고 아저씨와 신부의 인생길이 저 꽃길 장식처럼 아름답고 행복하길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