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시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와 일본 열도와의 교류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2300여 년 전 우리 고조선과 삼한시대 조상들이 집단이동하면서 전해준 벼농사가 본격화되자 일본 역사는 수렵과 채집이 생산 기반이었던 조몬시대(기원전 1만 년∼기원전 5세기)와는 질적으로 다른 야요이 시대(기원전 5세기∼기원후 3세기)로 넘어간다.
미국의 문명사학자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세계적 베스트셀러이자 퓰리처상 수상작인 ‘총, 균, 쇠’의 개정 증보판(2003년)을 내면서 야요이 시대에 선진 농업기술을 갖고 이주한 한국인의 조상들이 오늘날 일본인의 조상이라고 주장해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이론은 단순한 주장이 아니라 DNA 분석이라는 과학적 실험 결과에 따른 것이었다.
즉, 일본 고대인인 조몬인과 야요이인의 두개골 유전자를 채취해 현대 일본인과 일본에 살던 원주민족 아이누족과 비교 분석해보니 조몬인이 현대 일본인이 아니라 아이누족을 닮았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현대 일본인의 유전자는 야요이인 것을 닮았다.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이 유전자가 한국인과도 닮았다는 것이다.
다이아몬드 교수는 유전자 분석 외에 고고학 분자생물학 인류학 언어학 등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한 논문 말미에 “과거 현재의 여러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해볼 때 한국과 일본은 성장기를 함께 보낸 ‘쌍둥이 국가’와도 같았다”며 “이런 사실은 이후 역사를 거듭하며 불편한 관계를 맺었던 양국을 생각한다면 아이러니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고 말했다.
가혹한 식민 지배와 아직도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일본 정치인들의 후안무치를 생각한다면 ‘쌍둥이 국가’라는 말에 불편해하는 한국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일본인도 자신들이 조몬인으로부터 진화해 최소 1만2000년간 독자성을 지켜왔다는 학설을 선호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조상이라는 다이아몬드 교수의 주장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고대 한국과 일본의 교류사 흔적이 짙게 배어 있는 현장을 돌다보면 다이아몬드 교수의 주장이 무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대표적인 유적지를 우리는 한반도와 가까운 일본 규슈 열도 내에 위치한 사가현에서 만나게 된다. 이곳은 한반도와의 직선거리가 200km 정도밖에 되지 않아 과거부터 현재까지 매우 긴밀한 교류가 이뤄진 한일 교류 현장이다. 사가현 일대에 위치한 간자키군 간자키정과 미타가와, 히가시세후리 등 3개 마을 87만 m²(약 26만3000평)에는 요시노가리 역사공원이 넓게 펼쳐져 있다. 이곳은 야요이 시대 말기 생활상이 정밀하게 복원된 역사적 장소이다.
‘요시노가리’는 한국어로 ‘좋은 들판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멀리 보이는 산들을 배경으로 풍요롭고 넓은 들판에 청명한 날씨는 일본이 아니라 호남평야 같은 포근함과 친근감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지형을 보면 배를 타고 건너온 낯선 땅이었지만 전혀 낯설지 않은 이곳에 도착한 우리 조상들이 정착하기에는 최상의 조건이었을 것 같았다.
가라쓰를 굳이 인천으로 비교한다면 요시노가리는 서울이라 할 수 있다. 배를 타고 인천에 도착한 이들이 정주하기 좋은 땅을 찾아 육지로 들어와 정착한 곳이 바로 요시노가리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일본 고대 문화의 최전성기를 보여주는 야요이 시대 유물이 대거 쏟아져 나온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곳에는 나무 울타리가 둘러쳐 있다. 이는 논농사를 시작하면서 생긴 잉여 생산물을 지키고 식량 쟁탈이 일어나자 외부의 적을 막기 위해 만든 방어물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 역사를 보는 시각은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전했다는 것만 강조하며 우위라는 우월감을 내세우는 것이 것이 아니라 한국과 일본이 각자의 문명 전환기에 상대방에게 매개자 또는 촉매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즉, 일본의 선사 고대 시대에는 한국이 중국 문명을 전한 전수자였고, 한국 근현대 문명 형성기에는 일본이 서구 문명의 매개자 역할을 했다. 고대 문명 교류도 이런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