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은 바다를 사이로 한 이웃나라이다. 이웃관계는 좋을 때는 더 좋지만 나쁘면 피할 수도 없는 존재가 된다. 그래서 이웃을 잘 만나야 한다. 한일 월드컵 공동 개최를 몇 달 앞둔 2001년 12월 23일 아키히토 일왕은 68세 생일을 맞아 왕실에서 기자회견을 갖는 자리에서 폭탄 발언을 한다.
“나 자신으로서는 간무 천황(50대 천황·737∼806·재위 781∼806년)의 생모(生母)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돼 있어 한국과의 인연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천황의 선포는 월드컵 공동 개최라는 한일 간의 대형 축제를 앞두고 한국과 일본이 더 가까워졌으면 좋겠다는 취지에서 한 것이었지만 일본 내에서 금기로 통하던 천황가의 백제 유래설을 천황 스스로가 깼다는 점에서 파문을 일으켰다.
천황가가 백제 왕실과 밀접했다는 주장은 일부 한일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하지만 천황 스스로가 말한 것은 처음이었다는 점이 놀랍다, 8세기 후반에서 9세기에 걸쳐 재위했던 간무천황과 어머니를 구체적으로 거론했다는 점, 간무 천황 어머니가 무령왕 자손이었다는 ‘속일본기’ 내용을 그대로 인용해 자신도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밝힌 점 등은 파격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한국이나 일본에서 천황 발언에 대한 후폭풍은 별로 없었다. 일본에서는 아사히신문만이 발언을 보도했고 나머지는 모두 잠잠했다. 천황계는 만세일계(萬世一系)로 전해져 내려와 일본에서 자생했다는 황국사관에 젖어 있던 우익들이 민감하게 반응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정치적 발언이므로 일희일비할 필요 없다”고 일축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3년 뒤인 2004년 8월 3일에는 아키히토 일왕의 5촌 당숙이자 일본 왕족인 아사카노 마사히코씨가 수행원과 친척 2명만 데리고 무령왕릉(충남 공주)을 찾아 참배하고 간 사실이 이튿날 공주시의 발표로 알려졌다. 이들을 안내한 이석호 전 부여문화원장은 당시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백제 무령왕의 후손인 일본 왕족들의 무령왕릉에 대한 관심이 매우 크다. 이번 참배는 일본 내 여론을 의식해 비공식적으로 이뤄졌다”고 전했다.
이렇듯 일본 천황가와 백제의 인연은 단순한 전설이나 일부의 주장이 아니라 일본 왕실 스스로가 인정하는 대목이라는 점에서 한일 교류의 역사가 그렇게 간단한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한국과 일본이 더 가까워지려면 보다 오랜 역사로부터 비롯된 깊은 인연에 주목할 이유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