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60년대의 보릿고개를 넘어 이제는 세계가 부러워할 정도로 잘 먹고 잘 사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지금 국사교과서를 가지고 격렬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광복 후 극심했던 이념대립을 보는 것 같다. 서로가 자기 주장이 옳다고 선전하고 있을 뿐 대화를 하는 장은 조금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20여일간 토론 한 번 없는 모습이 아쉽다. 드디어 정부는 급하게 교과서의 ‘국정화 고시’라는 선택을 하였다. 미국도 1800년대 중·후반 미국은 격렬했다. 독립 후 계층 간 대립과 전쟁 그리고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영역에서 새로운 질서를 찾으려고 몸부림쳤다. 당연히 모순과 갈등이 많았다.
이런 환경을 배경으로 태어난 것이 초절주의다. 초절주의는 미국의 문제를 자주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미국만의 독특한 정신으로, 어떤 현상의 안과 밖을 동시에 아우르는 낭만주의 철학이다. 이 가운데 에머슨은 현실의 모순과 갈등을 극복하고 삶에서 진정한 마음의 자유를 얻는 방법을 이야기했다. 그가 가장 중요시 생각한 것이 자립이다. 자립을 위해서는 수많은 시련과 고통이 따른다. 그 시련과 고통을 이겨내려면 지속적인 각성이 필요하다. 자립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다른 사람들과 협동하면서도 그들에게 지나치게 의지하지 않아야 한다. 즉 자신이 중심을 잡고 살아야 한다.
우리는 풍요의 시대에 살고 있다. 물질적 풍요는 정신의 나태를 불러올 가능성이 크다. 핍박도 어려움도 없이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목표 상실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물질주의가 팽배할수록 인간성 파괴는 피할 수 없다. 문제는 물질과 정신의 조화다. 물질이 정신을 크게 앞서면 인간은 물질의 노예가 되기 쉽고, 정신이 물질을 지나치게 앞서면 삶이 공허해지기 쉽다. 이러한 상황에서 에머슨은 양자의 조화와 균형을 추구했다. 자연 속에 투영된 이상적인 정신을 지향하면서 현실의 사회적 역할과 지위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랑은 달콤하지만 또한 고통스럽고 골치가 아프다. 인류애 같은 고귀한 사랑은 세상을 구원하고 평화를 가져오지만, 남녀의 불장난은 지나친 집착과 욕망으로 인간을 파멸시킬 수도 있다. 최근에는 중학생간에도 남녀간의 사랑이 깊어져 이를 고민하는 부모가 늘어나는 현상은 이를 잘 반영한 것이다. 남녀 간의 사랑이 인류애와 같은 보편적인 사랑이 되려면 끊임없는 이해와 용서를 통해 정신적으로 승화되어야 가능하다.
우리 주변에 많은 꽃이 피어 있다. 그 중 내 방 창문 밑 화단에 핀 장미는 이전에 피었던 장미나 자기보다 아름다운 장미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 존재할 뿐이다. 장미처럼 자연과 더불어 현재에 살지 않는다면 인간은 결코 행복하거나 굳세게 살 수 없다. 에머슨은 일상의 자연과 삶 속에서 행복을 찾으려 했다. 인간의 삶은 순간순간 현재만이 있을 뿐이다. 과거로 돌아갈 수도, 미래를 잡을 수도 없다. 지금 여기 현재의 삶을 즐기지 못하는 사람은 미래를 즐길 수 없다. 일상이 곧 한 사람의 일생임을 강조했다.
에머슨의 인생 철학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부터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많은 미국인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동양철학도 받아들인 그는 인생을 잘 살 기 위해서는 세상의 근본 원리를 이해하고 유동적인 삶의 상황에 맞게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파했다. 세상의 변화와 삶은 단편적이지 않고 총체적이다. 에머슨은 양면적으로 인생을 바라보았다. 현실에 발을 붙이고 살고 있는 이상, 현실의 문제가 아무리 어려워도 도망갈 수 없다. 현실 속에서 우리에게 닥친 문제를 '수용'하고 '이해'하며 극복하는 에머슨의 '초절'하는 지혜가 여전히 필요한 것 같다. 대화와 타협은 중요한 민주주의 원리다. 국민들의 일상을 흔드는 정치원은 말로는 대화와 타협을 이야기 하면서도 이를 실천하는 모습이 진정 누구를 위한 정치인가 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