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은 뛰어난 기록문화를 가지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하여 많은 기록물이 최근에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요즈음은 과학과 기술이 발달되어 사건과 사고가 모두 영상으로 저장되고 있으며, 이것을 눈으로 확인하는 시대이다. 또한, 우리 일상의 발걸음은 널리 퍼져있는 CCTV가 기록하고 우리가 내뱉은 말은 음파로 저장되고 있다는 사실을 들으니 정말 놀라울 일이다.
우리 나라 역사를 살펴보면 조선조 태종에게 귀찮은 존재가 하나 있었다. 끈질기게 따라붙으며 잘잘못을 기록하는 사관이었다. 때는 1401년 태종이 화를 터뜨리며 ‘사관 금족령’을 내렸다. “편전은 임금이 쉬는 곳이야. 사관은 들어오지 마!”라고 명을 내렸다. 그러나 사관 민인생은 고개를 세우고 “정사를 논하는 편전에 사관이 들어오지 못하면 어찌 기록한단 말입니까. 사관의 위에는 하늘이 있습니다.”라고 대꾸했다. 3년 뒤인 1404년 태종 임금이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졌다. 임금이 급히 일어나면서 측근에게 입단속을 명했다. “이 일을 사관이 모르게 하라.” 그러나 기막힌 일이다. 사관이 ‘쓰지 말라’는 임금의 명령까지 고스란히 '태종실록'에 기록했으니 말이다.
춘추시대 제나라 재상 최저가 임금을 살해했다. 그때 사관 3형제가 차례차례 나서 ‘최저가 임금을 죽였다’고 썼다. 최저는 “쓰지 말라”면서 큰형, 둘째형을 죽였다. 하지만 막내동생까지 나서 사실을 기록하자 두 손 들고 말았다. 역사가들이 이렇게 서릿발 같은 기록 자세를 보인 까닭이 있다. ‘동사강목’을 쓴 안정복은 “쓰지 않으면 선악의 자취가 깡그리 사라져 난신적자들이 날뛰기 때문.”이라 했다. '춘추필법'에 따른 역사가의 객관적이고 엄정한 비판이 없다면 바로 ‘군자의 불행이요, 소인의 다행’이라는 것이다.
올 가을은 역사교과서 국정화 계절이 되었다. 최근 교육부가 역사교과서의 국정화를 결정하자나름 유명하다는 대학교 사학과 교수들이 줄줄이 ‘국정교과서 집필 불참 선언’에 동참했다. 한영우·이만열 등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낸 원로학자를 비롯한 다수 학자들도 국정교과서를 반대하고 있다. 모든 시대사를 통괄하는 학술단체인 한국역사연구회도 비상총회를 열어 대책을 논의할 예정이라고 한다. 가히 역사학계의 저항이라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일부 교육감들도 이문제를 지적하고 나섰다. 역사가의 엄정한 평가를 받아야 할 정치 지도자가 오히려 역사를 쥐락펴락하는 어이없는 상황이 일어나고 있다.
1735년 영조가 대신들과 나눈 밀담을 기록한 사초를 불태웠다. 전직 사관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목이 달아난다 해도 사필을 굽힐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사관이 목숨을 내놓고 직필하려는 이유를 알렸다. “후세의 폐단을 만들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지금 역사가들도 양심을 지키려 하고 있다. 후세를 위해…. 이같은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자기네 주장만을 옳다고 우겨대면서 이 나라 정국은 혼란의 안개 속에서 헤메는 모습을 보아야 할 것인가? 그 피해가 이미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다. 서로가 잘못이라고 정치권은 이야기한다. 그 사이에 질서유지를 위한 경찰도 피해를 입어 재정 손실이고 대항자도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이 안타깝다. 사람들은 어느 시대를 살았든 가릴 것 없이 자기의 시대가 역사에서 가장 격동기였다고 느낀다. 그 시대를 돌아보는 것은 그때나 이제나 역사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그래서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고치려는 소망에 기초를 두고 있다.
현대사에 들어와서는 망국과 광복, 그리고 분단과 한국전쟁, 한국민주화의 길,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사람들은 왜 세상이 이토록 어려우며, 하필이면 나의 시대에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원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되돌아보면 슘페터의 말처럼, 인류가 살아가는 모습은 5만년 전이나 지금이나 본질적으로 다름이 없었다.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끝내는 사람의 결심이고 행위의 모둠이었다. 역사주의자들은 역사의 흐름에 어떤 장엄한 예정조화나 시대정신이 존재했고, 거기에는 일관된 교훈이 연면히 이어져 왔다지만 의외로 역사는 단순했다. 인간의 오욕칠정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일상에서 겪는 애환이나 보대낌이 철학이나 이상을 비웃는 경우는 허다하게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