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라지만 겨울답지 않게 포근한 날씨이다. 80년대 후반 대구대 교육대학원에서 특수교육의 꿈을 안고 함께 책상을 마주한 원우회 모임이 경남 김해와 창원을 중심으로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15일(금) 오후에는 오태석 교장님(경남은혜학교)의 안내로 가야국의 흔적을 전시한 국립가야박물관을 찾았다. 교과서로만 가르쳤던 실체들을 직접 보게 된 행운을 가졌다. 박물관을 둘러보면서 한반도에서 일찍 한 시대 훌륭한 철기문화의 꽃을 피웠던 가야국이었지만 결국에는 신라에 병합되는 역사의 흐름을 보면서 규모의 중요함과 힘의 원리를 또 다시 느낄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일본문화와의 교류에서 많은 영향을 준 가야문명의 찬란함을 뒤로 하고 경남은혜학교를 방문하였다. 넓디 넓은 김해평야의 한 벌판에 45학급의 학교가 덩그러니 자리잡고 있었다. 지역주민들의 학교설립에 대한 반대때문에 논 까운데 건축된 상황임을 직감하면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학생 숫자에 비하여 운동장이 지나치게 좁게 마련된 것이 매우 아쉽게 느껴졌다. 더 넒은 공간에서 힘차게 뛰어 놀 공간이 없으니 아이들의 발달은 더딜 수 밖에 없는 환경이다. 우리 나라가 소득으로는 3만달러에 근접하고 있다지만 의식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를 보여주는 단면이 아닐 수 없다.
16일 오전에는 고 노무현 대통령의 생가를 방문하였다. 토요일이라서 상당수의 방문객이 이곳을 찾고 있었다. 김해시에서 나온 해설사의 설명을 간단히 듣고 한 시대를 이끌어 온 민주화의 상징인 노대통령의 일생을 생각해 보았다. 1946년 9월 1일 봉하마을에서 2남 3녀중 막내로 태어나 가난한 시절을 보냈다. 부산상고를 진학하였지만 큰 꿈 때문이지 첫 직장을 두 달만에 그만두고 고시공부를 시작했다. 군 복무를 마치고 결혼도 하였으며, 1975년 제 17회 사법고시에 합격을 하였다. 어떻게 혼자 공부해 고시에 합격할 수 있었느냐는 물음에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뛴다."고 표현했다. 그후 2년간 사법연수원 과정을 거쳐 1977년 9월부터 대전지법 판사로 재직하였으며 1978년 5월 변호사를 개업하였다. 이처럼 도전과 성취의 과정을 밟았다.
이후 시국의 흐름을 배경으로 그는 권력의 그늘에서 안주할 수도 있었지만 그분의 80년대는 인권과 인간다운 삶의 추구를 위한 변호사로 활약이 두드러졌다. 이후 통합의 정치를 위한 노력을 하였으며, 97년부터 원칙과 소신에 의한 정치를 바탕으로 대통령 선거에 뛰어들어 당선됨으로 2003년부터 2007년 대통령직을 수행하였다. 재임기간 중에는 대통령 탄핵이라는 헌법상 최초의 기록을 남겼지만 국민에게 가장 사랑받는 대통령이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매우 엇갈리는 상황이었으며 스스로 비운의 길을 선택한 것이 매우 가슴 아픈 일이다. 이로 인하여 온 나라가 비통에 빠졌으며, 시민들은 충격에 휩싸였고 수사를 맡은 검찰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통근길 시민이 신호등을 만나듯 부엉이 바위를 바라보면서 어둠의 단면을 보게 된다. 이분에게는 그 누구도 버팀목이 되어 줄 수 없었다는 외로움과 감당하기 어려운 삶의 무게가 이 길을 택하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한 대통령이 태어나 성장하고 죽음에 이르는 여정을 보았다. 눈에 들어오는 절벽을 보면서 한 인간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오죽하면 죽음의 길을 스스로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는가를 길을 걸으면서 내내 생각해 보았다. 노무현 대통령의 어록에 의하면 "역사란 것은 정확하게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멀리 보면 보입니다. 눈 앞의 이익을 쫒는 사람과 역사의 대의를 쫒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의만 따르면 어리석어 보이고 눈 앞의 이익을 따르면 영리해 보이지만 그러나 멀리 보면 대의가 이익이 되고 가까이 보면 이익이 이익입니다." 라는 표현을 읽으면서 대의가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는 시간을 가졌다. 하지만 말로는 역사를 논하지만 쉽게 죽음 앞에서 무너지는 인간의 연약함을 보면서 인생은 역시 질그릇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