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다 읽었던 시집을 다시 읽었다. 인천의 시인들에 대해서 좀 더 관심을 갖고 살펴보아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인천의 문학도 많이 발전했다. 소설도 수필도 십여 년 전에 비하면 눈부시게 발전했다. 시도 그렇다. 상당히 비중 있는 시집들이 연이어 출간되고 있다. 류인채 시인도 그 중에 하나다. 인천문학의 희망이 걸린 기대주임에 틀림없다. 수록 작품 전부를 다루기엔 무리고 특별히 선별하지는 않고 아무렇게나 펼쳐 읽은 작품 중에 세 편에 대해서 소감을 적어 본다. 우선 <거북>을 읽어보자.
거북
전동차 문이 닫히는 순간 덜컹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목과 두 팔이 문틈에 끼었다 성급히 빠져나간 두 다리만 문밖에서 버둥거린다 그러나 폐지 자루를 움켜쥔 손은 완강하다 손등에 적힌 갑골문자가 그가 헤맨 도시의 길들을 보여주고 있다
움켜쥔 자루는 꿈쩍도 않고 門이 큰칼*이 되어 깡마른 노인의 목을 겨누고 있다
절룩이며 거둔 따끈한 뉴스들 아무렇게나 접힌 아침이 너무 육중하다 방금 전까지 선반을 더듬던 손은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고 쫓기듯 두리번거리던 눈빛은 단도처럼 자루에 꽂혀 있다
안도 밖도 아닌 그 노인 눈만 끔벅거린다
이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여러 번 당해본 일이라는 듯 뜻밖에 덤덤하다
쇄골이 산맥처럼 뚜렷하다 찰나에 백년이 지나간다
잠시 후 방송이 나오고 잠깐 문이 열리고 그는 늘어진 목을 천천히 제자리로 거두어들였다
* 중죄인의 목에 씌우던 형구.
시를 다 읽고서야 왜 제목이 <거북>인지를 알겠다. 이 시는 전철의 종점 부근에서 목격한 기이하고 안타까운 광경을 묘사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우선 시의 제재는 한 노파다. 가난하고 남루한 고령의 한 노파가 폐지자루를 등에 지고 전철 문을 빠져나가려다가 문틈에 끼어버린 상황으로부터 시가 출발한다. 문틈에 끼어 있는 노파의 모습이 기이하게도 거북이를 세워놓은 모습과 닮은꼴이다.
안간힘으로 빠져나가려고 용을 쓰는 모습이 길게 목을 빼고 난처한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거북이와 닮아 있다. 등에 진 종이자루는 거북이 등껍질이고 허우적거리는 두 팔은 영락없는 거북이의 앞발이요, 가느다랗게 땅을 밟고 있는 두 다리는 거북이의 뒷다리다. 거북이가 드넓은 바다를 헤엄치며 등껍질에 갑골문자를 새겼듯 이 노파는 도시의 골목과 전철의 통로를 휘젓고 다니며 저 육중한 폐지자루를 채웠을 것이다.
폐지 줍는 노파는 우리 시에 이미 익숙한 제재가 되었다. 자본주의의 참혹한 불평등을 나타내는데도 나타나고 가난하고 병들고 고단한 삶의 아이콘으로 곧잘 등장하는 것이 바로 폐지 줍는 노파다. 김사인 시인도 <바짝 붙어서다>란 시에서 밀차에 폐지를 싣고 좁은 골목길을 지나가다가 자동차가 다가오자 벽에 납작하게 붙어 섰다가 자동차가 지나간 후 구겨졌던 종이처럼 다시 펴지는 노파를 시로 그려낸 적이 있다.
그렇게 길을 가다 보면 폐지 줍는 일은 노인들이 도맡아 하고 있고 그 광경은 바로 우리의 현실을 보여주는 시적 질료로써 자주 인용되고 있다. 그러니 이 시가 단순히 풍경을 묘사하는데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막막한 우리의 현실을 고발하고 실상을 폭로하며 시적 소명을 담당하고 있기도 한 것이다. 저 중노동으로 얻어지는 소득이 얼마나 되겠는가. 저 치열한 노동을 통해서 생명을 유지해나가는 노파에게서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느끼지는 않는가.
생명의 고귀함, 그 생명을 끝까지 완수하려는 노파의 강한 집념과 끈질긴 생명력을 깨닫게도 된다. 시의 마지막 장면에서 비로소 노파의 승리를 확인한다. 그 승리는 고귀한 생명의 확인이며 숭고한 노동의 승리인 셈이다. 길게 늘어졌던 목을 천천히 제자리로 거두어들인 노파에게서 우리는 희망을 본다. 이제 다시 두 번째 시를 읽어보기로 하자.
이끼의 시간
공터에 버려진 수레 하나 때 절은 손잡이를 치켜들고 전봇대에 등을 기대고 있다 싣고 나르던 짐들은 모두 어디에 부렸을까 먼 길을 가던 바퀴가 헐렁해졌다 길과 길을 이어주던 힘이 멈춰있다
눅눅한 때를 건너온 시간의 흔적 푸른 이끼가 기울어진 수레의 바닥을 타고오른다
저 수레가 걸어온 길을 알 것만 같다 단단하게 조였던 시간이 느슨해지고 길은 이곳에 멈춰있다 해가 구름 사이로 잠깐 들어간 사이 바람이 손잡이를 슬쩍 만지다 간다 그 손에도 이끼가 묻어 있다
이끼의 시간이 굴러가느라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 시도 한 풍경에서 씨앗을 얻어 발아시킨 한 그루의 시다. 그 풍경은 버려진 수레다. 오랫동안 길과 길을 연결하며 짐을 실어 나르던 수레가 이제 수명을 다해 전봇대에 기대어 앉아 있다. 앉아 있다기보다 수명을 다하여 이끼의 시간을 견디고 있다. 뼈마디는 풀어져 있고 힘은 빠져나갔다. 눅눅한 시간을 건너와 지금은 온몸에 이끼가 덮이고 있다. 움직이지 않는 수레의 몸뚱어리를 바람이 슬쩍 건드리고 간다.
그 바람의 손에도 이끼가 묻어난다. 그렇게 이끼의 시간을 견디고 있는 아니 지난 삶을 되돌아보기라도 하듯 수레는 지금도 덜컹거리고 있다. 이 시는 단지 사물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는듯하지만 실은 우리 인생과도 무관하지 않다. 수레는 펄펄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였다. 주인과 더불어 길과 길을 잇고 잔뜩 짐을 지고 세상을 활보하던 생명체였다. 그러나 늙고 노쇠해지고 더 이상 기력이 없어지고 마침내 수명을 다하여 지금은 한 개 시신이 되어 이끼에 몸을 맡기고 있다.
그러나 시신으로 누워 있는 몸이지만 비극적으로 느껴지거나 암울한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다. 잠깐 구름 사이로 해가 들어가긴 했지만 여전히 햇빛이 비치고 바람이 슬쩍 손잡이를 만지고 지나가기도 한다. 덜컹거리는 수레 본래의 음악도 여전히 들려오는 상황이다. 몸이 헐렁해지고 느슨해지긴 했지만 죽음의 절망적인 상황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편안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 시인의 죽음에 대한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심상을 읽을 수 있다.
이 시 2연의 ‘눅눅한 때를 건너온 시간의 흔적’이 중요한 시행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눅눅한 시간은 현재의 시간이 아니다. 수레가 펄펄 살아 움직이던 시절의 시간이다. 그러니까 수레는 일평생을 눅눅한 시간 속을 살아왔다는 것이다. 눅눅한 시간은 어떤 시간일까. 죽어서 이끼를 기르게 한 그 눅눅한 시간은 지나온 우리의 현대사의 시간이다. 전쟁이 지나가고 혁명이 지나가고 가난과 노동이 묵묵하게 굴러가던 시간이 바로 눅눅한 시간이 아니겠는가. 이제 저 수레는 그 눅눅한 시간을 다 살고 이제 바통을 후세에게 넘긴 상태다. 그 바통을 이어받은 다음 세대는 어떤 시간을 펼쳐야 할까. 적어도 눅눅한 시간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아니 삶이란 언제나 눅눅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 세 번째 시를 읽어 보자.
엎질러지다
강의시간에 늦어 택시를 타고 왔다 수업시간보다 한 시간 앞질러온 생각이 문 앞에 서 있다 텅 빈 교실이 나를 보고 깜짝 놀란다
늘 그랬다 식탁을 훔친 행주를 냉장고에 넣고 휴대폰을 냉동실에서 찾기도 했다 반갑다고 다가서는 얼굴이 기억나지 않고 눈에 익은 길도 문득 낯설다
다닥다닥 공중에 떠 있는 플라타너스 열매가 낯설고 나무가 놓쳐버린 수많은 이파리가 낯설고 그 열매의 속이 낯설고 그 중심의 까치집이 낯설다 도대체 익숙한 것은 무엇인가
어딘가에 잠복했던 기억들이 툭툭 끊어지는 소리 들린다 수많은 기억의 동굴로 바람이 들랑거리는 소리도 들린다 과부하 된 기억들이 썰물처럼 쓸려나간 자리에
내가 있다 타인이다
이 시엔 자의식이 짙게 배어 있다. 나와 세상의 부조화가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다. 강의 시간 훨씬 전에 문 앞에 한 생각(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했다)이 서 있다. 거기 서 있는 생각을 보고 교실이 깜짝 놀라는 것은 당연하다. 한 시간이나 일찍 나타났으니 놀랄 수밖에 없다. 바쁘게 허둥대는 화자의 삶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어서 화자는 계속 허둥대고 낯선 풍경에 부딪친다. 익숙했던 길도 낯설고 눈에 익은 길도 낯설다. 그리고 늘 보던 플라타너스의 풍경도 낯설어진다. 급기야 내 안에 가득했던 기억들이 툭툭 끊어져 튕겨나가고 기억의 동굴로 바람이 드나들고 마침내 과부하 되어 가득했던 기억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에 내가 있는데 거기 서 있는 내가 낯익은 내가 아니라 타인이라며 시는 끝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화자의 의식 작용은 무엇에 기인하는 것일까. 우리는 종종 날마다 쓰던 어떤 낱말이 갑자기 낯설어지는 경험을 할 때가 있다. 그리고 오래 사귀어 왔던 친구나 동료가 갑자기 낯설어져 예전의 그 허물없던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화자도 그런 시점을 시로 형상화한 걸까. 아닌 것 같다. 그런 경험과는 다른 어떤 심리적인 까닭이 있을 것 같다. 어떤 자의식 같은 것, 일시적으로 우연히 낱말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과는 다른 깊은 생의 근저에서 우러나오는 무엇인가 있을 것 같다.
내 주변이 모두 낯설게 느껴지고 급기야 나까지 타인처럼 느껴지는 그 의식의 심저에는 세상과 화자 사이에 깊은 부조화가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종종 부딪히는 그 부조화가 어느 날 크게 확장되어 나란 존재 전체가 예전의 내가 아닌 타인으로 인식되기까지 이른 것은 아닌가. 모든 기억을 썰물처럼 쓸려 보내고 난 후에 만나게 된 타인 같은 나, 그 타인 같은 나가 바로 진정 나의 본 모습인지도 모른다.
화자는 어쩌면 비로소 나를 찾는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나를 텅 비워내고 새롭게 바라보는 나, 그 텅 빈 자리에 새롭게 세워나가는 나, 그 작업이 바로 시인의 시작 행위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시에서 희망을 본다. 시인은 세상을 낯설게 보는 존재다. 그 낯설게 보는 과정에서 언어미학은 발현되고 궁극의 자아와도 만나게도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는 절망의 시편이 아니라 희망의 시편이다.
이 시집 속엔 명편들이 가득하다. 꽤 오래 전에 다 읽은 작품집인데 시인의 작품 몇 편에 대한 소감을 쓰기 위해 다시 펼쳐보다가 거의 즉흥적으로 세 편을 골랐다. 꼭 이 작품을 써야겠다고 선정해서 쓴 것이 아니라는 점 이해하기 바란다. 문학에 있어서 어떻게 중앙이 있고 지방이 있겠는가. 모두에 얘기했지만 인천의 문학은 괄목할만하게 발전하고 있다. 앞으로 인천의 많은 시인 작가들이 전국적인 지명도를 가진 문학인들로 성장하길 바라며 짤막하게 적어본 소감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