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읽었던 시집을 다시 읽곤 한다. 그러나 마음에 감동을 준 시집을 다시 읽는 것이지 아무런 감동은 없고 읽기에 피로하기만 했던 시집은 읽지 않는다. 수십 년 시를 읽고 써왔지만 아직도 시를 읽는데 서투르다. 현대의 그 복잡하고 난해한 시를 읽으면 즐거운 것이 아니라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안 읽으면 그만이지 뭣 하러 고통을 느끼면서까지 시를 읽느냐 할지 모르지만 시를 읽고 싶은 호기심, 현대시를 알고 싶은 욕구, 문학작품을 읽으며 공감하고 시대와 함께 호흡하고 있다는 동질감을 찾아 자꾸 시를 읽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지없이 나는 허탈한 마음을 안고 책장을 덮게 된다. 그러던 중에 내 마음에 그 울림이 그대로 전달되는 작품집을 만나면 여간 반가운 게 아니다. 그런 시집들은 대개 대가들의 작품집인 경우가 많은데 젊은 시인들 중에서도 더러 그런 시집을 발견하면 기쁨이 크다. 그런 경우 시인에 대한 인상이 강렬하게 남아 있어 그 시인은 잊지 않고 마음에 각인된다.
가끔은 나도 속게 된다고 할까, 뭐 그런 일도 있다. 단편적으로 인터넷 메일로 배달되어 오는 시 중에 아주 마음에 쏙 드는 작품이 있어 그 시인의 시집을 사서 보고는 실망하는 경우가 있다.
그 시는 그러니까 그 시집에서 가장 쉬운 몇 편 중에 하나고 나머지 시들은 난해하여 내가 즐기기에는 무리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제 남이 써놓은 시를 억지로 이해하려고 애쓰지 말고 내가 좋아하는 시를 읽고 나의 개성을 살려서 쓰고 싶다.
옛날부터 나는 형식은 난해하지 않고 내용은 깊은 울림을 주는 시를 선호해왔다. 내용은 없이 겉모습만 복잡하고 난해하게 꾸며놓은 시를 이제 더 이상 신뢰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김종길 시인은 오래 전부터 내 마음에 자리한 시인인데 우선 이 시인의 시는 읽기 쉽지만 그 울림의 폭이 크다. <성탄제> <고고> <황사현상> 등등의 시는 얼른 제목을 봐서는 무척 난해하고 깊은 철학적, 형이상학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을 것 같아도 정작 읽어보면 따뜻한 기운이 가득하다. 인생의 참 의미를 깨달을 수 있는 진실이 속속들이 잘 익은 과일의 과즙처럼 입 안 가득 퍼지는 감동이 있다.
이 시집은 2004년 79세에 낸 시집 <해가 많이 짧아졌다>에 이어 83세에 낸 시집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시인은 어느 시집의 서문에선가 젊은 시절에는 과작(寡作)으로 일관하다가 은퇴를 하고 나이 들어 작품 발표가 많아졌다면서 너무 많은 작품을 쓰는 것을 오히려 염려하는 듯한 발언을 한 기억이 있다.
절제와 중용의 덕을 중시하는 선비 시인으로서 혹시 있을지 모를 무절제와 지나침의 과오를 스스로 경계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시인 스스로 경계하는 마음이지 독자로서는 그렇지 않다. 시를 쓰는 후배로서는 좀 더 자주 많은 작품을 선사해주기를 바랄 뿐인 것이다. 작품 몇 편 살펴보기로 한다. 관심을 가지고 선정한 작품이 아니고 페이지를 넘기며 읽다가 '이 작품 괜찮네' 하고 생각되는 세 편을 골랐을 따름이다.
은행 가는 길 ‧ 1
은행 가는 길, 나는 보도를 걷고 있는데 비둘기들은 보도와 차도의 경계선에서
누가 뿌린 것도 아닌 먹잇감을 열심히, 잽싸게 쪼아 먹고 있다.
사람이나 비둘기나 이 세상에서 먹잇감을 얻는 것은 한갓 우연인가, 아니면 필연인가?
나도 말하자면 먹잇감을 얻기 위해 가는 길인데 문득 떠오르는 부질없는, 그러나 기실 거창한 물음
은행에 가는 길은 바로 시인이 걸어온 인생길이기도 하고 우리 모두가 평생 걸어가는 삶의 길이다. 은행으로 간다는 것은 경제적인 문제로 가는 것이다. 경제적인 것을 위해서 우리는 평생 동안 직장을 다니고 이곳저곳으로 이주를 한다.
국가도 경제발전을 위해서 길을 내고 공단을 조성하고 무역을 하는 등 모든 일은 1차적으로 먹고 살기 위해 하게 된다. 경제를 관리하는 모든 책임을 맡고 있는 곳이 은행이다. 이 노시인도 지금 은행으로 가고 있다. 은행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경제생활의 거점으로 자주 찾고 이용되는 곳이다.
은행에 가는 길에 시인은 차도와 인도 사이에서 열심히 무엇인가 쪼아 먹는 비둘기를 본다. 여기까지는 시인이 본 풍경의 소박한 묘사이다. 3연에 가서 시인은 자신이 본 풍경에 궁금증이 발동하고 의미를 찾기 시작한다. 그리고 4연에 가서 자신의 질문에 해답을 얻어낸다. 비둘기와 자신의 공통점을 발견한다. 그 공통점이란 먹고 사는 일이다. 비둘기도 시인도 먹잇감을 얻는 일은 실로 중대하지 않은가. 마지막 시행에 가서 시인은 먹고 사는 일이 얼마나 거창한 문제인지 스스로 놀라고 있다.
시는 먹고 사는 일에 무관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먹고 사는 1차적인 일이 해결된 이후에 시도 의미가 확장된다. 먹고사는 일이 해결 안 되면 시도 계속 먹고사는 문제의 주변을 맴돌며 더 이상 진척을 보이지 못할 것이다. 길거리에서 모이를 쪼는 한 마리 비둘기에게서 팔십 평생 삶의 본질을 잡아내는 눈이 바로 시인의 눈이다.
혹자는 이 시가 너무 쉽다고 해서 문학적으로 좋은 시가 아니라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시는 고급 시이다. 쉬우면서도 공감의 폭이 넓고 깊은 공명통을 울리게 하는 성찰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한 마리 먹이를 찾는 비둘기에게서 인생의 의미를 찾아내어 간결한 시행에 담아내는 능력 그것이 바로 노 시인의 역량인 것이다.
경이로운 나날
경이로울 것이라곤 없는 시대에 나는 요즈음 아침마다 경이와 마주치고 있다
이른 아침 뜰에 나서면 창밖 화단의 장미포기엔 하루가 다르게 꽃망울이 영글고,
산책길 길가 소나무엔 새 순이 손에 잡힐 듯 쑥쑥 자라고 있다.
해마다 이맘때면 항다반으로 보는 이런 것들에 왜 나의 눈길은 새삼 쏠리는가. 세상에 신기할 것이라곤 별로 없는 나이인데도.
김종길 시인은 오랜 경륜을 가진 시인이다. 봄이 왔다고 해서 어린이나 청춘남녀처럼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나이는 아니다. 그렇다면 봄을 맞는 노인들의 마음은 어떨까. 이 시를 보면 금세 80대 노인의 시세계를 엿볼 수 있다.
나는 아직 80대를 살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 연세에 어떻게 봄을 맞이하고 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는 있다. 시인은 매일매일 다반사로 보는 장미포기에 꽃망울이 영글고 소나무 새순이 쑥쑥 자라는 걸 경이의 눈으로 보고 있다.
'세상에 신기할 것이라곤 없는 나이'라고 했지만 저 경이로운 시인의 나날을 보면 실로 그 나이에도 세상은 신기한 것으로 가득 차 있음이 분명하다. 한동안 나는 연세 많은 분들의 시에 심취한 적이 있다. 최재형 시인(우리 문협 최제형 시인과 혼동하지 마시길)의 <당신에게 가는 길>이란 시집을 읽고 그런 경향이 더욱 두드러졌다.
그 후 신동집 시인, 조병화 시인, 신경림 시인, 랑승만 시인, 민영 시인, 김남조 시인, 홍윤숙 시인 등 80대 시인들의 시를 읽으며 세상을 먼저 사신 시인들의 노후의 삶을 이해하게 되고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젊은 사람들의 시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겸허와 예지를 배우게 된다.
72세, 79세, 83세에 연이어 시집을 낸 김종길 시인의 생활이 어떠할지는 금방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실로 경이롭지 않은가. 삶의 마지막까지 자연 속에서 경이로움을 찾아내는 놀라운 관찰, 마르지 않는 감성의 샘, 후배가 본받아야 할 귀한 교훈이며 정신적 자산인 것이다.
영국의 시인 워즈워드는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보면 내 가슴은 뛰누나/ 내 어렸을 때도 그랬고/ 어른 된 지금도 그러하네/ 내 늙어서도 그러하리/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이 몸 죽으리' 하고 노후에 까지 저 자연 속에서 경이로움을 발견하고자 열망했던 것이다. 바로 워즈워드의 그 염원을 우리의 노시인이 성취해 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가랑잎 한 잎
나의 아침 산책은 대개 수유리 01번 마을버스 종점 맞은 편, 커피자판기 옆에 놓은 벤치에서 끝난다.
봄철에서 가을철까지는 그 주변에 담배꽁초며 빈 담뱃값, 종이컵, 맥주캔 등이 나뒹굴고 있어 그 전날 밤 그 벤치에서 젊은 애인들이나 실직한 젊은이들이 밤늦도록 노닥거리거나 한숨지으며 연실 담배만 피운 것을 알 수 있는데,
오늘 새벽엔 기온이 영하 4,5도로 떨어져 그 벤치엔 먼저 온 사람도 없고, 간밤에는 젊은이들도 오지 않은 듯 그 주변도 말끔히 정돈된 대로다.
그러나 벤치는 오늘 아침 비어 있지 않다. 거기엔 언제 떨어졌는지 가랑잎이 한 잎 나보다 먼저 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나도 그 옆에 말없이 걸터앉는다.
생각해보면 나 또한 한 잎 가랑잎, 머잖아 흙으로 돌아가 필경에 흙이 될 것을. 오늘 아침엔 길가의 추운 벤치 위에서 잠시 한 잎 가랑잎과 자리를 함께해보는고나.
이 시도 매우 산문적으로 시적인 압축과 생략 등의 장치는 없다. 그러나 읽고서 감동이 전해져 오는 것은 여느 시와 마찬가지다. 그 감동은 어디서 오는가.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유명 시인이기 때문인가. 시인이 영문학자이고 대학교수 출신이라는 선입견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감동의 힘은 시 속에 함유된 진실이 시를 튼튼하게 떠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산문처럼 풀어졌다고 보기 쉬우나 사실은 군더더기 하나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적재적소에 시어가 배치된 짜임새 있는 한 편의 시인 것이다. 인생의 깊은 의미가 감지되는 서사가 있고 기승전결이 잘 배치되어 있다.
이 시의 핵심 시행은 마지막 연의 첫행 "생각해보면 나 또한 한 잎 가랑잎"이다. 나를 가랑잎 한 잎과 동일시하는 겸허한 자세, 그것은 아무나 쉽게 얻을 수 있는 시상이 아니다. 인생을 진지하고 경건하게 살아온 사람이나 말할 수 있는 삶의 자세다.
이 시엔 젊은 애인들, 그리고 실직자에 대한 관심이 표명되어 있고 마을버스 종점의 커피자판기가 등장하는 등 서민들 속에서 서민과 함께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는 시인의 소박하고 따뜻한 정서가 녹아 있다. 그리고 살아온 일생에 대한 겸허한 성찰이 있다. 낱말 하나 군더더기로 붙어 있지 않고 현학적이거나 두드러진 시적인 기교라곤 없다.
하루 일과 중 짧은 어느 한 순간을 붙잡은 풍경에 자연과 사회와 시인의 생각이 어울러져 있을 뿐이다. 필자도 가끔 다른 사람의 고도로 정교하게 시적 장치를 사용한 시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에 부족함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런 대가들의 시를 읽으며 위안을 얻는다.
박경리, 피천득, 홍윤숙, 구상, 김남조 등의 시를 읽으며 시가 반드시 고도의 상징이나 비유로 쓰이지 않아도 좋겠다는 생각을 얻기도 한다. 김종길 시인의 시는 이런 설명이 오히려 구차스럽다. 그냥 읽으며 조용히 음미하는 것이 좋은 독서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