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생에 벌겋게 바가지로 쏟아 모은 진액의 땀방울들 그 아픈 궤적들을 나는 지금 폐수처럼 날마다 하수구로 흘려버리고 있다 이건 아니다 이래서는 안돼 조바심치는 내 안에서 또 하나의 내가 아니야 버려야 해 버리는 일이 네게 남은 유일한 숙제 얼마나 잘 버리느냐가 얼마나 잘 살았느냐의 답인 것을 버리지 못하여 노욕을 쌓고 버리지 못하여 노추를 부리는 미련은 싫다 버리고 버려서 깨끗이 비워 내야 비상의 날개를 달 수 있다 돌아가는 날 날개 없이 하늘을 날을 수는 없으니…
한 생애 지고 온 영욕의 땀 그 무거운 생의 항아리 이제 미련 없이 말끔히 비워내야 한다 비우는 일만이 네게 남은 일 천천히 소리 없이 흔적 없이…
<시 감상>
삶의 마무리 단계에서는 비워내야 하는 일이 절실한 과제가 되는가보다. 법정 스님의 <버리고 떠나기>란 책을 흥미 있게 읽은 적이 있다. 스님은 시종일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버리고 떠나기라고 말하고 있다. 욕심을 버릴 때 자기 내면의 목소리와 진실 되게 만날 수 있으며 지금보다 조금만 더 겸손하고 더 욕심을 버리면 삶은 한층 여유로워진다고 말하고 있다. 박경리 선생의 유고시집 <버리고 갈 일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를 읽었다. 시집 속의 시 ‘옛날의 그 집’의 마지막 두 연은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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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 주었고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나를 지켜주는 것은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박경리 ‘옛날의 그 집’ 4.5연
여한 없이 인생을 살고 홀가분하게 떠나려는 작가의 겸허한 고백이 숙연하다. 나는 항상 노시인들의 시에서 가장 진실하고 장중한 메시지를 전달받곤 한다. 젊은 시인들의 치기어린 문장과는 사뭇 다른 인생의 쓰고 단 맛을 다 맛본 후의 마음속에서 거르고 걸러진 삶의 정수를 전달받는 것이다. 문장 기교면이나 언어감각 면에서는 젊은 시절의 작품만 못할지라도 그 깊은 울림을 동반한 내면의 고백은 우리가 여생을 사는데 좋은 지침이 되고 밝은 등대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오랜 체험과 사색의 정수를 가감 없이 전수받게 된다.
지난해 91세로 작고한 홍윤숙 시인도 모든 것을 비워내고 떠나고자 하는 절박한 심정을 전해주고 있다. ‘날개를 위하여’는 시인의 나이 88세에 펴낸 시집 <그 소식>에 수록되어 있다. 겸허하게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모습이 비장한 울림으로 전달된다. 시인은 “한 생애 쏟아 모은 진액의 땀방울들, 그 아픈 궤적들을 날마다 하수구로 흘려보내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마음 한 편에선 ‘아니다, 이래서는 안 돼’ 하면서도 또 한 편에서는 ‘아니야, 버려야 돼‘ 하는 절실한 질문을 자신과 주고받는 모습이 절박하다.
노욕과 노추를 버려 비상의 날개를 달고 싶은 시인, 한 생애 지고 온 영욕의 땀, 그 무거운 생의 항아리를 깨끗이 비워내려고 하는 것이다. 시인은 작고하기 3년 전 이 시가 실린 시집을 펴냈다. 이 시를 읽으며 유한한 삶에 저항하고자 하는 의지 또한 읽힌다. 그것은 생에 대한 강력한 의지이며 열망이다. 시인의 명료한 정신력과 왕성한 상상력을 기반으로 이 시가 집필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이 시집 이후 시인은 어떻게 여생을 보냈을까. 생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겸허한 귀의를 열망하며 감사와 찬미를 보내지 않았을까. 노시인의 시를 읽으며 나의 여생을 생각해 보는 것은 인간은 모두 같은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일 것이다. 공교롭게도 시인은 필자의 선친과 같은 해에 태어나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다. 삶과 죽음의 한 본보기를 보여주고 떠난 시인의 명복을 빌며 숙연한 마음으로 시인의 삶을 묵상해본다.
* 홍윤숙 시인: 1925년 평북 정주 출생. 서울대학교 사범대 국어과 졸업. <예술평론>으로 등단. 시집 <여사 시집>외 16권. 수필집 <자유 그리고 순간의 지상> 외 9권. 한국여류문학인회 회장, 한국시인협회 회장 역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