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없는 설움은 직접 당해 본 사람이 아니고는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일본에 근무할 때 8.15 광복절 행사 때 태극기를 바라보면서 애국가를 부르면서 눈물을 흘리는 노령의 재일동포들의 모습이 아직도 머리를 스쳐간다. 이제는 그런 아픔을 직접 느낀 세대도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다. 그런 사람 가운데 기억되는 사람이 바로 손기정(1912~ 2002) 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손기정 선수는 1936년 8월 9일 제11회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시상대에 섰다. 그의 마라톤 제패는 민족의 쾌거였다. 하지만 금메달을 목에 건 그의 표정은 매우 어둡게 느껴진다. 식민지 조선 청년 손기정은 기념품으로 받은 월계수 묘목을 들어 일장기가 새겨진 가슴을 가렸다. 일본 국가가 연주되고 일장기가 오르는 동안 그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사인 요청을 받으면 일본식 이름 대신 '손긔졍'이란 한글을 쓰고, 그 옆에 한반도를 그려주었던 스물네 살 청년에게 시상대 위의 짧은 순간은 잊고 싶은 기억이었을지도 모른다.
80년이 흐른 지난 8월 19일 리우올림픽 배드민턴 경기에서 일본의 마쓰토모 미사키,다카하시 아야카 조가 여자 복식 우승을 차지했다. 준결승에서 한국의 정경은,신승찬 조를 이겼다. 한국팀을 누르고 올라온 이들은 사상 첫 올림픽 배드민턴 금메달을 일본에 안겼다 주었다. 경기 후 환호하는 두 사람 뒤로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1980~90년대 한국 배드민턴 최고 스타이자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박주봉(52) 감독이었다. 일본 선수들을 안아준 그의 왼쪽 가슴엔 일장기가 선명하게 보였다.
박 감독은 2004년부터 13년째 일본 대표팀을 이끌고 있다. 배드민턴 변방이었던 일본에 감독으로 부임한 그는 일본팀의 체질을 바꿔놓았다. 대표팀 전문 훈련 시설을 만들고 합숙 훈련을 도입하는 한편 뿌리 깊은 패배 의식을 고치려 노력했다고 한다. 박 감독이 도입한 '한국식 시스템'은 4년 뒤 베이징올림픽에서부터 위력을 발휘했다. 여자 복식팀이 준결승에 올랐다. 이어 출전한 런던올림픽에선 은메달, 이번엔 금메달까지 거머쥐었다.
일본 국민은 자국의 배드민턴 종목의 도약에 '박주봉 감독이 없었다면 일본 배드민턴이 평생 빛 볼 일 없었을 것'이라며 박수를 보냈다. 그것은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박주봉 가슴의 일장기를 가리키며 '박 감독은 친일파냐'란 비난을 하는 사람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이 '일본이 우리 나라 감독에게 배워서 금을 땄다니 정말 자랑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80년 전 나라를 잃었을 땐 세계를 제패하고도 지우고 싶었던 한 서린 일장기가 이번 리우에서는 한국 지도자의 능력과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는 자랑스러운 성취의 상징이 됐다. 한국인 손으로 만들어낸 세계 1등이란 결과는 한국인 가슴의 일장기가 더 이상 치욕이 아니라 자랑일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보기 싫었던 일장기가 이렇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는 시대가 되었다. 이처럼 절대적인 것은 없다. 그만큼 자랑스러운 앞에는 훌륭한 지도자가 있었고 이를 따르는 선수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한다. 지도자가 훌륭해도 선수와 소통이 안된다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이는 스포츠에만 해당하는 사례가 아니다. 해방 이후 한국은 많은 분야에서 일본으로부터 기술을 배웠고, 그를 바탕으로 일본을 뛰어넘기 위해 땀 흘려 뛰었다. 자동차, 반도체 산업의 발전이 그렇게 이뤄졌다. 그러나 이런 흐름을 잘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진정한 극일은 이런 것이다. 극일은 요란스럽게 떠드는 구호가 아니라 실력 문제이다. 일본팀을 이끌고 올림픽 무대 정상에 선 박주봉 감독이 이를 실증적으로 보여줬다. 그가 이번 올림픽에서 이룬 성과와 그가 받은 박수가 한·일 양국에 과거사의 아픔을 털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새로운 모델이 되길 바란다. 아직도 이 지구촌에는 어두운 곳이 많다. 한일양국이 배우고 가르치고 협력하면서 이 어두운 지구촌 사회를 밝혀 나가길 기대하여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