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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본지모니터 백춘현교사의 금강산 답사기


아! 금강산… 또 하나의 '우리'가
있는 곳, 그 곳이 꿈엔들 잊힐리야

지난달 23∼29일까지 실시된 교원 금강산연수. 참여교사들의 총평은 '百聞이 不如一見'. 그들이 보고 느낀 것이 무엇이길래 모든 교사에게 이
연수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일까. 연수 참가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백춘현<서울세종고 교사>

장전항의 아침은 참으로 신비로웠다. 새벽 6시, 모두가 잠든 사이에 배는 항구에 들어와 있었다. 북한에 간다는 설렘으로 잠을 설쳤던 우리는
일어나자마자 상 갑판으로 달려갔다. 아, 거기에는 새로운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만난 세계, 그렇게 말도 많고 탈도 많던 미지의
세계, 두려움과 호기심이 교차하는 또 하나의 '우리'가 조용히 깨어나고 있었다.
장전항은 군사적 요충지이니 절대로 촬영하지 말라는 몇 번씩이나 받은 교육을 무시하고 싶었다. 그만큼 아름다웠다. 아니 그것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충격이었다. 거기에서 내가 본 것은 이미 사라져버린 지 오래된 나의 어릴적 고향의 모습이었다. 나지막하게 누워있는 기다란 산허리에 깊게 푸르른
소나무의 모습은 참으로 낯설면서 또한 친근한 모습이었다. 남한에서는 그렇게 조금도 손상되지 않은 산의 온전한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점에서 북한의
산은 낯설었다. 삐죽 솟은 철탑과 허리를 가로지르며 흉물스럽게 지나가는 절개로와 그 길을 요란하게 달리는 자동차의 물결에 어느 틈에 익숙해져
버린 내 눈에 전신주 하나, 도로 하나, 차 한 대 없는 북한의 산은 그렇게 낯설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에서 그 산은 아주 어릴 적 아득한
기억의 저 편에서 바라보던 모습 그대로이기도 했다. 아, 저것이 북한이구나.
하늘은 투명했다. 회색의 낮은 건물들 속에서 그들은 조용히 깨어나고 있었다. 북한의 집들은 모두가 회색 빛이라서 자연 속에서 튀지 않는다.
심지어는 새로 지은 집들조차 우중충한 회색 빛이다. 텔레비전으로 보았을 때는 몰랐는데 실제로 와서 보니 건물에는 전혀 페인트칠을 하지 않았다.
문득 칠하는 데 많은 돈이 든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금강산으로 가는 길은 절차가 복잡했다. 일렬로 번호대로 줄을 서서 한사람씩 여행증을 들고 거기에 도장을 받아야 입국이 가능했다. 나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관광은 대체로 일렬로 줄서서 가기였다. 그리고 우리에게 견디기 힘든 그 줄서기가 북한 사람들에게는 생활화되어 별 불편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들은 길을 걸을 때도 일렬로 걷고 있었다. 남한 인구의 절반밖에 안되는 2,200만이 살고 있다는 북한에는 대체로 사람들이
적었다. 그러나 군인들은 많았다. 다섯 명이 걸어가면 그중 둘은 군복을 입고 있었다.
금강산 가는 버스 안에서 보았던 북한 소년병사의 눈매는 복잡했다. 그는 한 쪽으로는 엄청난 증오심을 뿜어대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에서 그의
눈가에는 숨길 수 없는 부러움과 동경이 착잡하게 묻어나고는 했다. 그런 소년의 처연한 눈매와 저 만치 보이는 어린이의 모습이 결국 내 코를
시큰하게 만들었다. 어린이들은 명색이 조잡하고 낡은 천으로 된 옷을 입고 있었다. 열심히 손을 흔드는 그들은 웃지 않았다. 어린이들 뒤에서
머리를 수건으로 묶은 그들의 어머니도 열심히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러나 그 어머니도 웃지 않았다.

비룡폭포에서의 일이었다. 나는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사진 찍는데 정신이 팔린 나머지 그만 정자 그늘 밑에 앉아있는 북한의 환경 감시원들을
미처 보지 못한 것이다. 그들을 찍는 일이 가장 큰 금기라는 것은 방북기간 내내 교육받는 가장 핵심적 사항이었다. 영문 모르는 내게 다가온 여자
요원들은 나에게 무엇을 찍었느냐고 묻고 '觀瀑亭'이라는 현판을 찍었다는 나의 말에 사진기를 달라고 하였다. 그들중 하나가 카메라를 가져가더니
바로 조금 전에 내가 서 있던 위치로 돌아가서 파인더를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들이 찍혔으니까 필름을 잘라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냥 한 장면만 가위로 잘라내면 문제삼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해가 안되었다. 잠시 후에 그녀가 현상 안된 생필름과 현상된 필름을 구별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고 아무리 고의가 아니었다고 설명해도 통하지 않았다. 그녀는 필름만 달라고 했다. 난감했다.
그러다가 좋은 생각이 났다. 필름을 되감아 다시 다른 광경을 찍으면 되지 않겠는가. 그제서야 그녀들도 납득을 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까지 무사히 돌아오라는 동료 선생님들의 신신 당부가 맘에 걸려 그들과 인사도 나누지 않았던 나였다. 처음에 그들이 나의
직업을 물었고 선생님이라니까 자연스럽게 교육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녀들은 이렇게 물었다.
"남한의 학생들은 돈을 내고 학교를 다닌다지요"
"그렇지요. 초등학교 이상은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의 고등중학교에 해당하는 우리의 중학생들도 대부분 돈을 내지 않고 다닙니다.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혜택을 받아 중학교도 거의 의무교육처럼 되었지요"
그녀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혜택이라니 어떤 혜택을 받습니까"
"학비보조 등의 방식이지요. 실제로 자기 돈을 내고 학교에 다니는 중학생은 내년부터 10∼20%정도밖에 안된답니다"
나는 바로 오던 날 신문에서 보았으므로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다. 다시 그 중의 한 안내원이 물었다.
"선생님은 아까 글자를 찍었는데 왜 그랬습니까"
"아, 글씨에는 그이 성격이나 인품 등이 드러나고 또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나는 남한에서도 이런 사진을 즐겨 찍습니다. 여기에서 '관폭정'
글씨를 보니까 아주 반가웠어요. 저 글씨를 누가 썼는지 모른다는 것은 상당히 유감입니다"
이번에는 그녀도 동의했다.
"예, 그렇지요. 글씨에는 인품이 드러나지요"
그리고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금강산 오신 소감이 어떻습니까"
"참 좋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좋습니까"
"글쎄요, 그렇게 물어보시면 여러가지로 느낀 점이 참 많습니다. 너무 여러가지라서 뭐라고 한 마디로 말씀 들릴 수가 없네요. 좀 더 정리해봐야
할 것 같아요"
"그렇습니까. 우리는 여러 선생님들과 마음을 터놓고 솔직하게 대화하고 싶어요. 우리는 모두 마음을 열어놓을 준비가 되어 있는데 남한의 관광객들은
그렇지 않아요. 마음을 감추고 참말을 하지 않아요…"
내 머리 속에서 무엇인가가 반짝했다. '이건 유도심문이다. 만약 자칫 잘못하면 네 이름이 신문, 방송에 나게되고 여러 사람에게 큰 누를 끼치게
되는 거야'
나는 당황했다.
"그, 그래요. 참 좋은 말입니다. 정말 나도 그리고 싶어요…그런데…그렇게 하기에는 아직은 시간이 부족한 것 같군요…좀 더 시간이 흐른 다음에,
그때에는 마음을 열고 말할 수 있을 것 같군요…"

나는 서글펐다. 나도 그들 못지 않게 솔직하게 가슴을 터놓고 물어보고 싶고, 듣고 싶었다. 금강산에 오기 전에 나는 얼마나 그들과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싶어했던가. 이곳에 왔다가는 사람들이 부러워서 그렇지만 나에게는 아주 먼 꿈이기에 일부러 그들의 이야기를 애써 외면하려던 나였지
않았는가. 이 얼마나 귀중하게 주어진 기회인데, 이 얼마나 소중한 만남인데, 이렇게 밖에 말할 수 없다니…
금강산에 와서 처음으로 분단을 뼈저리게 느꼈다. 아아, 아직도 남과 북 사이에는 이렇게 큰 갭이 있구나. 서로 마음을 열고 말하자는 이야기를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구나. 나는 그녀의 눈을 처음으로 똑바로 바라 볼 수 없었다. 나는 무언지 모르게 아주 부끄러웠다. 미안했다.
피하고 싶었다.
다음에 꼭 또 오라는 그녀들의 말에 나는 대답을 못했다. '그래, 진짜로 또 오고 싶어. 차비만 모이면 반드시 올거야. 이렇게 깨끗하게 남아있는
이 고향 같은 곳에 정말 정말 또 오고 싶어…하지만 아직은 우리가 준비가 안된 것 같아. 당신들이 그 이야기를 솔직하게 받아들이고 그리고 나도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 때, 그때 나는 또 올 거야. 반드시 올 거야. 그날은 멀지 않았어. 그때 꼭 다시 올거야. 다시 한번 당신과 이야기할
거야. 그때는 서로 손을 부둥켜 잡고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할 거야. 반드시 이야기할 거야'

3박4일의 금강산여행은 짧으면서도 길었다. 북한 세관원들과 남자 공안원들은 무뚝뚝하고 말이 없었지만 그러나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북한의 사람들은
순박했다. 어떤이들은 농담을 받을 줄 알았고 웃을 줄도 알았다. 남측 가이드들과 친숙하게 스스럼없이 말을 나누는 북측 처녀들도 있었다. 아,
우리는 여전히 한 핏줄이구나. 우리는 결코 남일 수 없구나.
처음 북한 사람들을 보았을 때 콧날이 시큰해온 까닭은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중국의 연변 조선족들을 보는 느낌과는 또 다른 그 어떤 느낌.
그것은 아득한 내 유년시절의 고향의 느낌이 그대로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머리 수건을 질끈 동여매고 까맣게 탄 얼굴을 한 빛바랜 회색저고리와
검은 치마를 입은 아낙네, 코를 흘리며 박박깎은 머리에 기계충이 먹은 흔적을 감출 수 없는 아이들의 모습, 우리의 어린 시절, 배고프고
가난했던, 그러나 순박하고 인정있던 그 옛날이 거기에 살아 있었다. 나의 울음은 현재의 그늘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의 지나간 시절,
다시는 되돌이킬 수 없는 옛날에 대한 후회의 울음이었다. 없었던 것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커다란 아픔, 우리의 '한(恨)'에 대한 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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