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고사 하루 앞둔 저녁,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로 내려왔다. 교무실은 질문하려는 아이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학종 시대’, 수시모집에서 학교 내신의 비중이 커짐에 따라 시험 때가 되면 한 점이라도 더 올리려고 아이들은 온갖 애를 쓴다. 어떤 때는 아이들의 행동이 도가 지나쳐 눈살을 찌푸리게 할 때도 있다. 그렇다고 아이들의 행동을 탓할 수도 없는 일.
퇴근을 위해 가방을 챙기려는 순간, 한 아이가 교과서를 들고 나를 찾아왔다. 그 아이는 다름 아닌 2학년 ○반의 ○○○였다. 사실 이 아이는 아이들이 영어 관련 모르는 문제가 있다거나 궁금증이 있으면 선생님을 찾지 않고 ○○○을 찾아갈 정도로 영어를 아주 잘했다.
그래서일까? 아이들은 ○○○에게 ‘영어 달인’이라는 닉네임을 붙여주기도 했다. 그리고 수업시간, 단 한 번도 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그 아이는 집중력이 매우 뛰어났다. 더군다나 모르는 내용은 반드시 알고 넘어갈 정도로 지적 호기심 또한 강한 아이였다.
그런데 그 아이가 중간고사 하루 앞둔 오늘 영어 선생님인 나를 찾아온 것이었다. 그것도 영어 교과서를 들고 말이다. 내심 그 아이의 갑작스러운 출현이 궁금해졌다. 녀석은 나의 퇴근을 막은 것에 죄송한 생각이 들었는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선뜩 꺼내지 못했다. 조금이나마 긴장을 풀어 줄 요량으로 나는 아이들이 붙여준 녀석의 닉네임을 부르며 나를 찾아온 이유를 물었다.
“영어 달인, 무슨 일이니? 내일 영어시험 있는 데 자신 있지?”
그러자 녀석은 내 말에 대답은 않고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선생님, 죄송하지만 제 고민 좀 들어주세요.”
당장 내일이 시험인데 고민 상담을 해달라는 녀석의 말에 순간 신경이 쓰였다.
“고민이라니?” “선생님, 제가 내일 영어 시험 잘 볼 수 있을까요?”
평소 영어를 잘하는 녀석이 영어 시험을 걱정하는 것이 조금 이상해서 물었다.
“영어 공부를 안 했구나. 그래도 넌 기본 실력이 있으니까 잘할 수 있을 거야. 그러니 포기하지 말고 열심히 하렴.” “……”
그러자 녀석은 대답 대신 교과서에서 성적표 여러 장을 꺼내 놓았다. 일부는 지금까지 치른 모의고사 성적표였고 또 다른 일부는 지금까지의 내신 성적 통지표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성적표마다 영어 과목 석차등급에 컬러 펜이 그어져 있었다.
영어 달인답게 모의고사 영어등급이 모두 1등급이었고 원점수 또한 매우 높은 점수였다. 그런데 내신 성적 통지표에 나온 영어 석차등급은 2등급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이제야 녀석의 고민이 무엇인지 조금이나마 이해되었다.
매번 모의고사를 보면 거의 백 점을 맞아 다른 학생의 부러움을 산 녀석이 학교 내신에서는 상위 4%를 벗어나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더군다나 영어 선생님인 내가 인정할 정도로 녀석의 영어 실력은 뛰어난데 말이다.
그런데 학교에서 치르는 녀석의 영어 시험 성적은 늘 2등급? 바로 이것이 녀석의 고민이었다.
사실 학교 시험은 모의고사와 달리 시험 범위가 명확하여 아이들이 이것 때문에 고민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상위 4%에 해당하는 학생들의 경쟁이 치열하기까지 하다. 한 문제만 틀려도 등급이 밀려날 수가 있다는 것을 녀석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매번 시험이 끝난 뒤 틀린 문제를 분석해 보면 몰라서 틀리는 것보다 실수로 틀리는 경우가 더 많다며 녀석은 안타까워했다. 모든 것은 꼭 1등급을 맞아야 한다는 녀석의 지나친 강박관념과 주위 사람들의 기대치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녀석에게 시험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것과 수업 시간에 배운 내용을 차분하게 정리할 것을 주문했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의 기대치에 신경 쓰지 말고 평상심을 잃지 말 것을 당부했다. 그러자 녀석은 조금 위안을 얻은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무튼, 내일부터 시작되는 시험에 녀석이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자신의 실력을 있는 그대로 발휘하길 바랄 뿐이다. 그리고 시험이 끝난 뒤, 녀석의 환한 미소를 기대해 본다. 상담을 마치고 교무실을 빠져나가는 녀석을 향해 엄지 척을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