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부는 지난 6월 학교 구성원들의 공동생활규칙을 담은 ‘학교생활규정’ 예시안을 발표했다. 학교단위에서 자체적으로 생활규정을 만들기 곤란하므로 예시안을 제공해 달라는 학교현장의 요구가 빗발쳤다고 한다. 또 어디까지나 예시에 불과하므로 반드시 그대로 따라야 할 의무는 없으며 학교현장에서 적의하게 활용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예시라고 하더라도 학교현장의 지원에 그 취지가 있는 만큼, 도움은커녕 혼란만 조장한다면 이는 당초 예시안의 발표 취지에 맞지 않는 것이다. 학교생활규정은 예시안의 목적에서 밝히고 있듯이 학생, 학부모, 교직원이 준수해야 할 제반사항들을 규정함으로써 자주적 학습능력과 민주시민으로서의 생활 및 준법습관을 습득하게 하여 학교, 지역사회, 국가의 발전과 법치주의 사회 실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즉 초·중등교육법이나 학칙에서 정할 수 없는 세세한 내용을 규정하고 이를 스스로 준수함으로써 학교내 공동체간의 일체감을 높이고 학교생활의 만족도를 높이는 데 그 취지가 있다.
따라서 학교생활규정은 무엇보다도 구체적인 실천수칙을 담고 있어야 한다. 법률체계로 볼 때에도 가장 하위에 속하는 만큼, 보다 구체적이고 명료한 의미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상위법의 영역에 속하는 포괄적이고 선언적인 내용을 생활규정에서 반복하는 것은 학교현장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다음은 누구나 노력하면 지킬 수 있는 현실적인 내용이어야 한다. 학교생활규정은 법률적인 구속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구성원들이 스스로 지키는 가운데 학교 공동체 문화의 형성에 그 취지가 있는 만큼, 구성원들이 수용 가능한 내용을 포함해야 한다. 취지가 훌륭하다는 이유만으로 물리적으로 지키기 어려운 내용으로 구성된다면 이는 학교공동체의 발전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규정의 작성과정 또한 모든 구성원들의 참여와 폭넓은 의사가 반영되어야 한다. 어디까지나 학교구성원들의 실천수칙인 만큼, 학교구성원들의 폭넓은 여론을 포함시켜야 제대로 된 규정이 완성될 수 있다.
학교생활규정의 취지에도 불구하고 교육부가 발표한 예시안의 내용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우선 생활실천 수칙임에도 선언적인 내용들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예컨대 이성교제에 관한 부분에 있어 ‘남녀학생간 서로 존중하고 양성평등의식을 갖는다’ ‘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책임 있는 행동을 한다’와 같은 내용은 학생들에게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그 의미가 불분명하다. 차라리 구체적으로 남녀불평등이 발생할 수 있는 사례, 예컨대 은연중에 사용하는 성적 비하 발언은 남녀불평등을 조장하는 것이며 이에 대해서는 어떠한 책임을 질 수 있다는 식의 구체적인 예시가 있을 때 학생들은 좀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청소년기의 이성교제에 관한 사항을 학교생활규정에 포함시키는 것에 대한 타당성은 별론으로 하더라도 기왕에 포함시킨다면 명료한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용의 사항도 마찬가지다. ‘신발은 활동하기에 편리한 것으로 고가의 신발보다는 학생 신분에 맞는 검소한 것으로 착용한다’ ‘가방은 자유로이 하되 학생 신분에 맞는 것으로 한다’는 식의 표현은 학생 신분에 맞는 것이 무엇인지 그 기준이 애매하다. 예시안은 또 학생생활지도 전반에 관한 사항을 심의하기 위하여 생활지도 협의회를 두도록 하고 있다. 생활지도협의회에는 전 교직원들이 의무적으로 참여토록 하며 실무를 담당하기 위하여 생활선도협의회를 두도록 하고 있다. 생활지도협의회는 학교폭력 예방을 위한 계획을 ‘학교폭력추방위원회’의 심의를 거친 후 실행하도록 하고 있다. 또 상벌점제 운영을 위해 ‘학교생활평가위원회’까지 두도록 하고 있다. 이쯤되면 학교는 그야말로 위원회 천국이 될 것이다. 생활지도협의회는 기존의 직원협의회와, 생활선도협의회는 기존의 생활지도부 기능과 중복된다. 따라서 이러한 기구들은 그야말로 옥상옥의 성격이 짙다.
최근 단위학교 자율성 강화라는 명분으로 학교분쟁조정위원회 등등 그야말로 수많은 위원회가 정부당국의 사실상 강요에 의해 구성되고 있다. 그러나 기구가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기구의 설치에 따른 행정적 준비로 인해 잡무를 양산하게 되고 오히려 본질적인 업무에 소홀해 질 우려가 있다. 이번 생활규정에서 학교현장에 가장 직접적인 혼란을 초래한 것이 바로 체벌 관련 조항들이다. 교육적 수단으로서의 체벌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는 오랜 논쟁거리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체벌의 필요성은 일단 인정하고 그 시행에 관한 세부사항을 이번 예시안에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은 교사, 학생, 학부모 모두가 수긍하기 힘든 내용들일 뿐만 아니라 특히 교사의 교육권을 결정적으로 위축시킬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PAGE BREAK]예시안에 따르면 체벌 시행은 다른 학생이 없는 별도의 장소에서 반드시 제 3자를 동반하도록 하고 있고 체벌도구의 규격과 체벌 부위까지 지정하고 있다. 체벌은 교육적 필요에 의한 것이다. 때로는 현장에서 필요한 부분도 있고 시간을 두고 시행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판단의 몫은 교육전문가인 교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 체벌도구의 규격이나 체벌부위 역시 학생에게 상해를 입히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학교에서 자율적으로 결정하도록 해야 한다. 체벌하기 전에 교사는 학생의 신체적, 정신적 상태를 점검해서 이상이 없는지를 반드시 확인토록 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교사가 학생의 신체적, 정신적 이상 유무를 어떻게 확인할 것인지 막연하다. 특히 정신적 상태의 이상유무는 그야말로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식의 해석이 가능하다. 이는 자칫 체벌에 따른 모든 휴유증을 교사의 사전 점검 및 확인 의무 소홀로 돌릴 수 있는 빌미가 되며 교권침해의 결정적 요인이 될 수 있다. 이는 말로는 체벌규정을 만들었음에도 사실상 체벌을 전면 금지하는 규정이나 마찬가지다.
체벌 대상 학생이 대체 벌을 요구할 수 있다는 조항도 마찬가지다. 교육부의 주장대로 체벌은 다른 교육적 수단으로 불가능할 때 시행하는 최후의 교정수단이다. 그럼에도 학생이 다시 대체 벌을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은 논리가 맞지 않다. 더구나 학생이 스스로 체벌을 원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점에서 대체벌 운운하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 사실 이번 예시규정으로 인해 정부는 체벌에 대한 개념을 더욱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에는 체벌을 신체적으로 고통을 가하는 일체의 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즉 체벌에는 매를 드는 것 외에 벌주기 등 신체적 고통을 주는 모든 행위가 포함하는 개념이다. 그럼에도 이번 생활규정에는 마치 매로 때리는 것만이 체벌인양 그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교육부의 생활규정에 충실하여 매로 때리는 것 외에 운동장 돌기 등 각종 벌은 교사가 임의로 시행해도 되는 것인지, 그리고 그에 따른 모든 책임은 면제받는 것인지 정부는 책임 있는 답변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더욱 문제인 것은 정부의 체벌에 관한 일관성 없는 태도가 학교현장의 혼란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98년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은 불가피한 경우에는 체벌을 할 수 있도록 개정되었음에도 정부는 획일적인 체벌 금지로 확대하였다. 이 조치가 교권실추와 교실붕괴의 직접적 원인으로 비난받자 지난 3월 발표한 공교육내실화 방안에는 체벌 허용 쪽으로 방향을 정하고 최근에는 예시규정까지 발표하였다. 그러나 예시규정 내용의 타당성과 해묵은 체벌합법화에 대한 논란이 재연되자 이번에는 강제성이 없다는 식으로 슬쩍 한발 물러서고 있다. 이러한 어정쩡한 태도는 체벌에 대한 학교구성원간의 갈등을 증폭시키는데 일조하고 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학교생활규정의 법적 효력에 관한 사항이다. 생활규정을 준수하였음에도 예기치 못한 사고가 발생했을 때 학교구성원들은 어떠한 책임을 지는가 하는 문제이다. 특히 당사자간의 다툼이 사법적인 문제로 비화되었을 때 생활규정이 교사를 보호할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는 없다. 그렇다면 학교생활 규정을 애써 지켜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적어도 생활규정을 준수하였다면 사법적인 조치는 사법부의 판단에 맡기더라도 징계 등 교육행정상의 조치로부터는 자유로울 수 있거나 최소화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어야 한다. 스스로 제정한 규칙을 준수하였음에도 발생한 사고에 대해 교육행정 당국조차 교사를 보호하지 않는다면 학교생활규정은 유명무실해질 것이다. 교육행정의 기본방향은 단위학교의 자율성과 책임강화이다. 생활규정의 취지 역시 웬만한 문제는 학교 내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하도록 해 단위학교의 자율성과 책임성 강화에 그 목적이 있다.
그러나 예시안처럼 많은 위원회를 만들고 무조건적으로 참여를 많이 한다고 해서 자율성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학교는 어디까지나 교육의 장이다. 국회처럼 평등한 참여가 강조되는 민주성의 원리만으로는 충족될 수 없는 전문성의 원리가 지배하는 곳이다. 따라서 무분별한 참여보다는 학교 내에서 전문적인 영역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자율성 확보의 핵심이다. 교사의 전문적인 영역을 학부모가 인정해 주고 교사는 학부모와 학생의 교육적 요구를 수용해야 한다. 만약 학부모, 학생이 교사의 전문적인 영역을 간여한다면 이는 학교조직의 자율성과는 거리가 멀다. 이번 교육부의 예시가 학교에 혼란을 주는 가장 큰 이유는 학교에서 가장 필요한 교사의 전문적 영역에 대한 불인정에서 비롯되고 있다. 체벌의 경우 최소한의 절차나 규격은 필요하지만 어디까지나 교육적 수단으로서 교사의 영역에 속한다. 각자의 전문적 영역이 인정받지 못하고 교육주체간의 흥정거리로 전락할 경우, 학교단위를 지배하는 전문성의 원리는 부정되고 학교의 자율성은 요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