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바다 국립공원 가운데 태안 해안은 천변만화하는 해안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곳이다. 안면도를 포함한 총 530㎞의 해안선은 엄청 길고 복잡하다. 리아스(Rias)식 해안을 따라 사빈, 해빈, 육계도, 육계사주, 해안사구, 파식대, 해식애, 갯바위, 방사림 등이 곳곳에 진주처럼 박혀 있다. 이 가운데 생태적 가치가 돋보이는 곳이 신두리 사구(砂丘)다. 태안반도는 저산성(低山性) 산지와 구릉(丘陵)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차창을 지나가는 산들이 주는 눈 맛이 참 편안하다. 반계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어들면 불과 몇 분 거리에 신두리 바다가 있다.
신두리 해안은 황촌 양쟁이에서 방파제까지 4㎞ 남짓하다. 썰물 때 드러나는 모래밭은 폭이 무려 500m에서 1㎞에 이른다. 밀물과 썰물이 드나들어 어디까지가 바다이며 뭍인지 분간이 어렵다. 그나마 사구에는 숲이 그득하여 어디까지가 사구이며 산인지도 구분이 명확하지가 않다. 사구지역까지 포함하면 모래밭 면적은 60여만 평을 넘는다. 모래밭 뒤쪽으로는 해송 숲이 그득한 사구가 끝없이 이어져 있다. 모래밭과 모래언덕 사이를 비포장 바닷길이 운치 좋게 나있다. 사초 군락이 잔디처럼 깔린 모래벌에 소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사구에는 해안사구와 내륙사구 두 종류가 있다. 중동이나 몽골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내륙사구이며 우리 나라 사구는 모두 해안에 위치해 있다. 태안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많은 사구를 지닌 지역이다. 그 중 신두리 사구가 가장 규모가 크다. 특히 사구들이 끝없이 이어진 사구열이 멋지다. 사구는 바닷가라고 해서 생기는 게 아니다. 우선 모래가 충분히 있어야 한다. 그것도 바람에 잘 날리는 미사(微砂)라야 한다.
그리고 바다로부터 모래를 실어 올리는 파도가 있어야 하고 그 모래를 다시 이동시킬 수 있는 강한 바람이 있어야 한다. 모래는 강한 북서풍이 운반해준다. 태안 바닷가는 옛날부터 눈뜨고 다니기 어려울 정도로 모래바람이 유명했다고 한다. 신두리 사구에서 볼 꺼리는 단연 샌드험목(Sand Hummock)이다. 샌드험목이란 사구 위에 풀이 자라고 그 위에 다시 모래가 덮이고 거기에 다시 풀이 자라 덮이고 하는 활동이 반복되어온 지형을 말한다. 샌드험목은 모래가 겉으로 드러나 있지 않아서 멀리서는 사구임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사구는 토양이 척박하고 수분을 머금지 못하는 모래땅이기 때문에 식물들이 살아남기 어렵다. 수분이 없기 때문에 씨앗을 떨구어도 싹이 쉽게 트지 않고 어쩌다 용케 비를 만나 싹이 텄다 해도 계속 자라기가 어렵다. 그나마 모래바람에 시달리다가 모래에 묻혀버리기 일쑤이다. 사구의 식물들은 이러한 악조건 때문에 일단 훼손되면 원상태로 복원되기가 무척 어렵다. 사구의 식물들은 서로 군락을 이루어야 살아남는다.
악조건에서도 견디는 식물들의 지혜
모래에 묻혀 죽은 것은 살아남은 종들의 거름이 되고 지하에서 수분을 저장해주는 역할도 한다. 샌드험목이 바로 그러한 곳이다. 사구의 식물들은 내륙의 식물들보다 비교적 뿌리가 깊고 넓게 발달되어 있다. 그래야 바람에 쉽게 뽑히지 않고 건조하고 척박한 모래밭에서도 영양분을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사구의 식물들은 대체적으로 몸집이 작다. 갯메꽃도 유난히 작아 보이고 키다리 소리를 듣는 달맞이꽃도 키를 절반이나 낮추었다. 해당화도 몸을 반쯤이나 모래 속에 묻었다. 거센 모래바람과 척박한 지질 앞에 스스로 욕망을 비운 것이다. 식물만큼 지혜로운 것도 없다. 팔은 햇볕 많은 쪽으로 내밀고 발뿌리는 물기가 많은 쪽으로 뻗는다. 또 땅 속에서 바위를 만나면 그것을 타 넘어갈 줄 알고 추우면 잎을 떨굴 줄을 알고 바람이 불면 고개를 숙일 줄 안다. 우주의 질서에 순종할 줄 아는 지혜와 인내는 인간보다 더 하다.
사구의 식물로는 통보리사초, 밀사초, 갯그령, 왕잔디, 모래지치, 갯완두, 갯방풍, 갯금불초, 갯쇠보리 등 주로 여러해살이풀이 많다. 목본류로는 순비기나무, 해당화, 해송 등이 자란다. 신두리 사구에는 통보리사초, 갯메꽃, 갯방풍, 갯지치, 갯장구채, 솔장다리, 더위지기, 갯쇠보리 등이 상대적으로 많다. 생명력이 강하다는 질경이, 망초, 환삼덩굴, 달맞이꽃, 갯쑥부쟁이, 자리공 등의 귀화식물도 이곳에서는 맥을 못 추고 멀찌감치 뒤로 물러나 있다. 이곳 사람들은 통보리사초를 '삐비'라고 부른다. 같은 과의 보리사초는 주로 산지에 살고 통보리사초와 좀보리사초는 바닷가 모래밭에 군락을 이루며 산다. 단단한 목질의 뿌리는 땅속으로 넓게 뻗고 길게 휘어진 잎은 뿌리에서 난다. 잎의 가장자리는 톱날처럼 날카롭다. 열매는 마치 보리나 밀처럼 생겨 단단한 껍질에 쌓여있다. 통보리사초는 모래의 이동에서 살아남기 위해 뿌리를 깊이 박는다. 어떤 것은 거의 1m까지 깊이 박혀있다. 샌드험목 주위로 해송 숲이 그득하다. 이 해송 숲은 모래바람을 막아주는 썩 좋은 방풍방사림이다. 이 해송 숲이 있기에 사구 너머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다.[PAGE BREAK]왕쇠똥구리는 꼭 만나고 가야할 곤충
식물의 종들이 단순한 만큼 이곳에 서식하는 곤충의 종들도 단순하다. 기껏해야 메뚜기과와 나비과에 속하는 몇 종에 불과하다. 그걸 노려서 도마뱀들이 이따금 샌드험목을 어슬렁거린다. 아직 겨울잠을 자기에는 이르고 해서 슬슬 기어나와 힘 빠진 곤충들을 노리고 있다. 그러나 이곳에 와서 꼭 만나고 가야하는 곤충 친구가 있다. 바로 왕쇠똥구리다. 쇠똥구리라는 이름 그대로 쇠똥을 먹고산다. 쇠똥구리가 쇠똥을 경단처럼 뭉쳐 모으는 것은 집으로 운반해가기 쉽고 또한 갈무리하기 쉽기 때문이다. 쇠똥구리는 모래 속에다 깊이 20㎝ 가량의 구멍을 파놓고 그 안에서 생애의 절반을 산다. 그 안에서 짝을 짓고 알을 낳고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어른이 되어서야 밖으로 나온다. 쇠똥도 그 안에다 저장해놓고 먹는다. 왕쇠똥구리는 쇠똥구리와 달리 경단 같은 쇠똥 안에다 구멍을 파고 산란을 한다. 지열을 받아 부화된 새끼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쇠똥벽을 갉아먹으면서 자란다.
예전에 이 모래풀밭에는 소들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소를 기르는 집이 크게 줄어들었다. 게다가 해수욕장 유흥업소에서 소를 사구에 풀어 먹이지 못하도록 잔소리를 하기 때문에 최근 들어 왕쇠똥구리가 눈에 띄지 않는다. 유감스럽게도 왕쇠똥구리는 사람 똥은 먹지 않는다. 정말 더러워서(?) 먹질 않는다. 그 속에 온갖 방부제와 항생제와 오염물질이 섞여 있다는 것을 왕쇠똥구리도 알 것이다. 그 밖에도 모래 속에는 다양한 생명들이 살고 있다. 길앞잡이 애벌레와 애명주잠자리 애벌레도 모래 속에서 반생을 지낸다. 개미귀신도 모래 속에다 함정을 만들어놓고 숨어 있다가 함정에 빠진 곤충들을 귀신처럼 잡아먹는다. 드넓은 초원 곳곳에 진주 같은 습지가 숨어있고 그 습지 가장자리로 백로들이 화려하게 날아들고 있다. 태안반도는 어딜 가나 새들이 많다. 신두리에도 사구와 인접한 숲에 박새, 까치, 직박구리, 굴뚝새, 딱따구리, 붉은머리오목눈이와 같은 텃새들이 살고 있다. 여름이면 종달새, 청호반새, 동박새, 후투티, 제비, 귀제비, 휘파람새, 호랑지빠귀, 물총새, 유리새, 꼬마물떼새 등이 쉽사리 관찰된다.
개발바람 타고 풍전등화 운명에 놓여
새들이 지나간 발자국들이 여기저기 총총 나 있다. 바닷가 모래밭을 주무대로 하는 중부리도요도 가끔 모래언덕으로 올라와 사냥을 한다. 신기한 것은 신두리 사구에 멧토끼와 족제비가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구를 넘어 샌드험목지대와 습지를 잇는 발자국들이 바람이 만들어놓은 물결모양의 바람모래밭에 뚜렷이 남아있다. 그런가하면 똥도 여기저기 앙큼하게 싸놓았다. 산으로 이어진 곳에는 노루 발자국까지 나 있다. 누룩뱀과 도마뱀 같은 파충류도 신두리 사구에 기대어 사는 식솔들이다. 표범장지뱀은 모래 속에 은신해 있다가 곤충이 지나가면 잽싸게 공격해서 낚아챈다. 사구의 배후에 습지가 몇 곳에 자리하고 있다. 비가 잦은 여름철에만 물이 고였다가 사라지는 늪지도 있지만 일년 내내 물이 고여 있는 늪지도 남아있다. 습지 주위로 갈대, 물억새, 갯버들과 같은 습지식물이 자라고 있다. 물속에는 물자라, 물장군, 왕잠자리 애벌레, 달팽이 등을 비롯하여 몇 종의 물고기들도 어울려 살고 있다. 이따금 백로, 황로, 왜가리, 농병아리, 흰뺨검둥오리도 날아든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이 습지에 와서는 금개구리를 꼭 만나고 가야한다. 금개구리는 초록색 등짝에 두 줄의 굵은 황금색 줄이 있다. 금개구리는 환경부 보호종으로 지정되어 있는 희귀종이다. 암수 구별은 배의 색깔로 알아내는데 유난히 노란 녀석이 암컷이다. 맹꽁이는 이 습지에다 산란한 후 금개구리와는 달리 산이나 모래언덕 풀밭으로 사라진다. 그나저나 이 광활하고 신비한 사구도 개발 바람에 풍전등화의 운명에 놓여 있다. 신두리 사구는 원래 마을 공동소유였으나 이런 저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개인 소유가 되어버렸다. 오랫동안 이 지역에 있던 군사시설들이 다른 데로 옮겨가자 사구의 새 주인들은 온통 모래뿐인 언덕에다 나무 몇 그루를 심어놓고 농림지와 준농림지로 바꾸었다. 이미 상당한 면적은 부동산에 눈 밝은 기업의 차지가 되어버렸다. 환경단체들이 사구의 개발을 반대하고 나서자 일부에서는 생태계보전을 반대한다는 현수막을 내걸고 임전무퇴를 외쳤다. 다행히 환경부가 보전지구로 지정하는 바람에 싸움은 수그러들었지만 불씨가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