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주들은 기업의 주인(principal)이다. 경영자는 기업의 소유주인 주주로부터 경영을 위임받은 대리인(agent)이므로 주주의 이해를 받들어 기업을 경영하는 게 원칙이다. 그런데 보통 주인은 기업 경영 일선에서 떨어져 있고 대리인인 경영자는 가깝다. 그러다 보니 경영자는 대리인에 불과하면서도 간혹 주주 이익보다 자기 이익을 앞세워 의사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주주들은 경영자가 주주의 이익을 침해하는 의사결정을 못하도록 견제할 수 있는 기업지배구조를 요구한다.
매년 2∼3월은 전년도 12월말을 기준으로 기업 실적을 결산하는 주식회사들이 정기 주주총회(주총)를 여는 시즌이다. 주식회사들의 실적 결산은 반드시 12월말을 기준으로 하게 되어 있지는 않다. 회사마다 3월말, 6월말, 9월말을 기준으로 결산하는 회사도 있다. 다만 12월말에 결산하는 회사가 많기 때문에 보통 봄 주총을 본격 주총 시즌으로 본다.
올 봄 주총에서는 외국인 주주들의 지배구조(기업지배구조) 개선 요구가 주된 이슈로 제기되었다. 기업지배구조란 무엇일까? 기업의 소유와 경영에 관한 의사결정을 통제하는 방식 혹은 원리를 규정하는 제도·관행의 총체를 말한다. 한자어로 企業支配構造, 영어로는 corporate governance라고 쓴다.
오늘날 규모가 웬만큼 큰 기업에서는 기업의 소유와 경영에 관련된 의사결정에 다양한 참가자들이 간여한다. 이사회와 경영자, 노동조합, 사원 등은 기업 안에서, 주주와 채권자 그리고 거래처 등은 기업 밖에서 참가한다. 넓게 보면 시장(market)도 기업 밖에서 기업의 의사결정에 참가한다고 볼 수 있다.
기업 안팎에서 참가하는 사람들이 다양한 만큼 기업이 어떤 문제를 두고 의사결정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참가자들간의 이해관계도 달라질 때가 많다. 자연히 의사결정을 어떤 방식으로 할지, 의사결정의 규칙과 절차는 어떻게 적용할지, 의사결정을 통제하는 메커니즘을 어떻게 운영할지, 기업 안팎의 여러 참가자 중 누가 어떤 문제에 얼마나 권리를 행사하고 어떤 책임을 지게 할지 등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이런 문제에 답해 기업을 통제하는 메커니즘으로 기능하는 것이 기업지배구조다. 당연히 기업지배구조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서도 기업 안팎 참가자간에 이해득실이 엇갈리게 되어 있다. 전형적인 것이 이른바 ‘주인-대리인(principal & agent) 문제’가 생기는 경우다.
핵심은 주주의 경영진 견제
만약 어떤 기업을 소유권자, 즉 오너(owner)가 경영하고 소유와 경영에 따른 책임을 전적으로 진다면 특별히 지배구조가 문제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웬만큼 규모가 큰 기업은 회사 형태를 주식회사로 만들고, 주주와 경영자로 기업의 소유와 경영을 나누고 있다. 이렇게 하는 것은 경영 효율을 높여 기업의 소유자인 주주의 투자 수익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럴 경우 이른바 ‘주인-대리인 문제’가 생기기 쉽다.
[PAGE BREAK]주주들은 기업의 주인(principal)이다. 경영자는 기업의 소유주인 주주로부터 경영을 위임받은 대리인(agent)이므로 주주의 이해를 받들어 기업을 경영하는 게 원칙이다. 그런데 보통 주인은 기업 경영 일선에서 떨어져 있고 대리인인 경영자는 가깝다. 그러다 보니 경영자는 대리인에 불과하면서도 간혹 주주 이익보다 자기 이익을 앞세워 의사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그렇게 할 경우 경영자 자신은 이익을 봐도 기업은 부실해져 주주에게 손해를 입히는 일이 생길 수 있다. 주인과 대리인이 분리된 현대 기업 경영에서는 이런 식으로 기업이 잘못 나갈 수 있다. 주주로서는 평소 경영자의 행동을 일일이 따라다니며 통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런 일이 생길 때 피해를 입기 쉽다. 그래서 주주들은 경영자가 주주의 이익을 침해하는 의사결정을 못하도록 견제할 수 있는 기업지배구조를 요구한다. 대개 이런 경위로 경영자가 주주의 뜻을 벗어나지 않도록 견제하는 장치를 어떻게 만들 것이냐에 현대 기업지배구조 이슈의 핵심이 있다.
우리 나라 기업지배구조 특징
올 봄 국내 기업들의 주총에서 주주들은 어떤 지배구조 개선을 요구하는 걸까? 기업의 소유와 경영의 권한이 대개 오너와 경영자로 쏠려 있는 현실을 바꾸자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기업지배구조는 대기업의 경우 소유와 경영의 권한이 재벌 총수에게 집중되어 있는 점이 특징이다. 주주나 은행 등 채권자와 시장의 규율을 포함한 기업 내외 이해관계자들의 견제 기능은 크게 취약하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2000년 4월 현재 자산 규모 순위로 상위 30대 기업의 발행 주식 가운데 4.5%를 재벌 총수와 그 가족(특수관계인)이 소유하고 있다. 이것만 보면 총수의 소유지분이 얼마 안 되어 보인다. 하지만 총수가 지배대주주로 있는 재벌 그룹(공식명칭은 ‘대기업집단’이다) 내 주요 계열사는 그룹 내 다른 계열사들에도 출자하고 있다. 이 지분까지 감안하면 총수의 그룹 내 계열사 지분 합계는 2000년 현재 43.4%나 된다. 이런 식으로 재벌 총수들은 자신이 직접 보유한 기업별 지분은 얼마 안되지만 계열사간 상호보유분까지 합한 지분 규모를 무기로 그룹 내 모든 계열사를 지배한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총수가 있는 재벌 그룹 25개의 계열사 590개 가운데 총수나 그 가족의 지분이 전연 없는 곳이 전체의 53.2%인 314개 사나 된다. 이처럼 재벌 총수가 재벌 계열사 전체에 자신의 공식 소유지분을 훨씬 뛰어넘는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은 일종의 편법적 기업지배다. 그런데 기업에 이해가 달린 관계자들은 총수 말고도 많다. 기관투자가나 소액주주(증권거래법상 개별 기업이 발행한 전체 주식 가운데 1% 미만의 주식을 가진 개인이나 단체), 은행이나 기타 채권자, 사원들과 노동조합 등 여러 부류다. 하지만 국내 기업은 전통적으로 재벌 총수가 절대적 지배권을 행사해 왔고, 총수의 일방적 기업 지배를 견제할 제도가 없었다. 제도가 있다 해도 제대로 기능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기업지배구조를 구성하는 기업 내 제도의 대표격은 이사회(board of directors)다. 이사회는 경영진의 보수와 임면을 결정하는 권한을 갖고 주주를 대신해 기업 경영을 기업 내부에서 견제, 통제하는 역할을 하는 게 원칙이다. 그런데 국내 기업에서는 전통적으로 이사회가 주주들에 의해 선출되고 주주를 대표하기보다는 사실상 기업 총수가 임명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총수의 이익을 반영하는 거수기 역할을 했다.
[PAGE BREAK]그런 기업지배구조는 19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문제가 있다는 공론에 부딪쳤다. 대기업 총수나 경영진의 전횡을 방치하는 낡은 기업지배구조가 부실 경영을 방치해 국가적 경제위기를 부르는 요인으로 지목된 것이다. 이후 정부와 기업 안팎에서 기업지배구조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져 사외이사제 도입 등 제도 개혁이 진행되었다.
표류하고 있는 사외이사제
사외이사란 해당 기업에 고용되지 않은 이사를 말한다. 원칙적으로 기업 소유자나 경영자로부터 독립된 신분으로 이사회에 참가하므로 이사회의 독립성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98년 2월부터 유가증권상장규정으로 상장법인에 해당되는 기업은 전체 등기이사 중 4분의 1을 해당 기업에 고용되지 않은 사외이사로 구성하게 했다. 2000년 증권거래법 개정 때에도 같은 조항을 넣으면서 자산 총계 2조원 이상인 대형 법인은 전체 등기이사의 2분의 1, 최소 3인 이상을 사외이사로 선임하도록 했다.
사외이사제 도입과 함께 소액 주주가 경영진을 견제할 수 있도록 소송을 제기하는 데 필요한 규제도 완화했다. 기업 회계의 투명성을 높이고자 부실회계감사에 대한 처벌 규정도 강화했다. 이처럼 기업지배구조를 개선하려는 법제 개선 등 일정한 노력이 기울여졌지만 외환위기 이후 국내 기업의 지배구조가 얼마나 개선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사외이사제만 해도 제도만 도입됐을 뿐 형식적으로만 운용되고 있다는 평가가 많다. 법이 의무로 두게 하니 마지못해 두되, 대주주나 경영진의 이해관계에 맞는 사람을 골라 앉히는 기업들이 많다는 것이다.
사외이사 운영 실태를 알려주는 최근 자료로는 시민단체인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이 2003년 9월 삼성, LG, SK, 현대,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등 6대 그룹 54개 계열사의 사외이사 163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발표한 것이 있다. 이 조사에 따르면 전체 사외이사의 31.3%는 퇴직 관료를 포함해 회사와의 관련성이나 이해관계가 있는 인물이 차지한다. 경실련 조사 대상 6대 그룹 가운데 군소 주주나 주주제안 형식으로 소액주주가 후보를 추천해 이사를 선임한 경우는 전연 없었다. 그보다는 대주주의 영향력 아래 이사회가 구성되고, 그런 이사회에서 사외이사 후보추천위원회를 만들어 후보를 추천해 선임하는 사례가 많았다.
외국인 주주의 부상(浮上)
시민단체 등에서는 이사회의 독립성과 소액주주의 참여를 높이는 방향으로 사외이사제도의 보완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재계에서는 사외이사 선임 문제는 전적으로 기업의 자유의사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외이사제가 경영 의사결정을 지연시키고 도전적 투자를 어렵게 하거나 중요한 기업 정보를 유출시키는 창구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점 역시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입장에 따라 주장이 엇갈리지만 이런 와중에서도 국내 기업의 지배구조는 점점 더 변화가 불가피할 전망이다.[PAGE BREAK]변화의 동인(動因)은 사외이사제 같은 법제보다 기업 내부에서 더 많이 올 것으로 보인다. 그 중에서도 주목되는 내부 요인은 외국인들의 지분이 커지고 있는 현상이다. 자본시장 개방 이래 외국인들은 국내 여러 기업에서 지분을 키워놓고 본격적으로 지배구조 개선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증권거래소 집계로 올해 2월 2일 현재 단일 외국인이 지분을 5% 이상 보유한 국내 상장사가 130개나 된다. 2002년 말보다 64.6%(51개)나 늘었다. 외국인이 국내 최대주주보다 지분이 많은 상장사도 2002년 말 29개에서 2003년 말 41개로 늘어났다. 이들 회사의 국내 최대주주 지분율은 평균 24.39%인 반면 외국인 지분율은 38.91%다. 외국인들은 우리 나라의 기업지배구조가 여전히 개선 여지가 크고 경영의 투명성도 낮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런 생각과 오너의 생각이 부딪치면 앞으로 주총에서 외국인 주주측과 오너측이 표 대결을 벌이는 사례도 늘어나고, 외국인의 주도로 지배구조가 주주에게 유리한 쪽으로 바뀌는 일도 점점 더 많아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