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재 가격 폭등세와 맞물려 우리 경제의 물가 안정 기조가 흔들리는 게 사실이라면 정부 당국이 물가 안정을 위해 환율 하락을 유도하는 정책을 펴야 마땅하다. 그런데 이런 정책은 경기의 버팀목 역할을 하는 수출을 촉진하기 위해 환율 하락을 막아야 한다는 또 다른 정책 요구와 모순된다. 어떻게 해야 좋을까? 해답의 실마리는 소비자물가지수 추이에 있다.
환율이란 서로 다른 나라의 기업, 정부, 개인이 거래를 위해 자국 돈(화폐, 통화)을 상대국 돈과 바꿀 때 적용하는 교환비율이다. 즉 ‘외환(외화·외국 통화·외국 화폐)의 교환비율(換率, foreign exchange rate)’이다. 미 달러를 프랑스 프랑과 바꾸는 비율도, 일본 엔화를 독일 마르크화와 바꾸는 비율도 환율이다. 그런데 국내 보도매체가 전하는 경제기사에서는 ‘환율’하면 아무 설명 없이 원화와 미 달러의 교환비율을 가리키는 뜻으로 쓸 때가 많다. 왜 그럴까?
첫째, 미 달러가 상품과 외환을 포함해 국제 거래의 중심이 되는 화폐 곧 ‘기축통화(基軸通貨, key currency=중심통화)’이기 때문이다. 둘째, 우리 나라에서 환율을 문제삼을 때는 원화와 미 달러의 교환비율을 가리키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세계에는 많은 나라가 있는 만큼 각국이 주로 쓰는 통화도 다양하다. 그 중에서도 미국 달러가 중심화폐로 쓰이는 이유는 뭘까?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으로 미 달러에 화폐로서의 안정된 값어치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만약 유럽이 미국을 경제력과 군사력으로 압도한다면 유로(Euro)가, 중국이 미국을 압도한다면 위안이 기축통화 자리를 뺏을 수도 있을 것이다.
환율은 수시로 오르내린다. 어느 나라 돈의 환율이 변한다는 것은 그 나라 돈의 대외가치(대외시세)가 바뀐다는 얘기다. 우리 나라 돈 즉, 원화의 환율이 달러 당 1100원에서 1000원으로 변했다고 하자. 달러 한 단위당 원화의 교환비율은 1100원에서 1000원으로 수치가 낮아졌다. 그만큼 환율은 ‘내린’ 것이다. 이때 원화 가치는 달러 가치에 비해 어떻게 변했을까?
[PAGE BREAK]전에는 미화 1달러를 손에 쥐려면 원화로 1100원을 내줘야 했다. 하지만 환율이 변해 이젠 1000원만 주면 된다. 외화 한 단위를 사는 데 치러야 하는 원화 액수가 100원 적어진 것이다. 그만큼 원화는 달러 한 단위에 대해 가치(값어치, 평가)가 오른 셈이다. 외화에 대한 원화의 환율이 내리면 외화 한 단위를 사는 데 치러야 하는 원화 액수는 적어진다. 그만큼 원화는 외화에 비해 가치가 오른다. 즉 환율이 달러 당 원화로 얼마인지 따질 때, 원화의 대외가치는 환율과는 반대로 움직인다. 환율이 내리면 그만큼 원화는 대외가치가 오른다. 반대로 환율이 오르면 그만큼 원화 가치는 떨어진다.
원화 가치가 오르는 경우를 두고 흔히 원화가 ‘평가절상’됐다(원화의 평가가 절상됐다)고 말한다. 원화 가치에 대한 평가가 높아졌다는 뜻이다. 이렇게 말하면 될 것을 절상(切上), 평가절상(平價切上)이라는 일본식 한자어를 써서 말하는 경우가 많다. 환율이 내리는 경우와는 반대로 환율이 오르면 통화의 대외가치는 떨어진다. 원화의 달러 대비 환율이 오르면 원화는 가치가 떨어지므로 ‘평가절하’ 되었다고 말한다.
환율은 어디서 어떻게 정해지나
환율은 외환이 거래되는 현장에서 주로 외환의 수요와 공급이 언제 얼마나 많이 이뤄지느냐를 따라 결정된다. 달러 수요가 다른 나라 돈에 비해 높을 때는 달러 가치가 오르고, 원화 수요가 외화에 비해 높을 때는 원화 가치가 높아진다.
외환이 매매되는 현장은 외환시장(foreign exchange market)이라고 부른다. 시장이라지만 남대문시장이나 청과물시장처럼 거래자들이 모이는 곳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외환거래가 이루어지는 곳이면 어디든 외환시장이다. 은행의 외환거래 취급 창구, 환전상 창구, 은행간 외환거래 현장 등이 모두가 외환시장이다. 외화는 세계 도처에서 교환되므로 외환시장은 세계 각국에 있는 셈이다. 외환 거래가 특히 많은 곳은 국제교역의 중심지인 선진국 주요 도시다. 뉴욕, 런던, 도쿄 등이 주요 외환시장으로 꼽힌다.
외환(외화)의 시세, 곧 환율은 주로 주요 외환시장으로 꼽히는 이들 국제도시에서 외환거래가 이루어지면서 형성하는 시세를 따라 결정된다. 그래서 경제 기사가 전하는 외환시세에는 이들 주요 시장에서 교환되는 주요 통화(달러, 엔, 파운드, 마르크 등)간 환율 정보가 빠지지 않는다. 환율이 각국 통화의 수급에 따라 자유로이 정해질 수 있는 것은 세계 각국이 그런 환율 결정 방식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즉, 오늘날 대부분의 나라는 자국 통화와 외환의 환율이 통화·외환 수급에 따라 자유로이 정해지게 하는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이런 방식의 환율결정제도를 ‘변동환율제도(floating exchange rate system)’라고 한다. 변동환율제는 지난 1973년이래 세계 각국에 대세가 됐다. 우리 나라도 마찬가지다.
다만 중국 등은 ‘고정환율제(fixed exchange rate system)’를 운영한다. 고정환율제란 자국 통화와 외화 간 환율을 ‘1달러에 얼마’ 식으로 고정시키는 제도다. 중국은 자국 통화인 ‘위안’의 환율을 미 달러 당 8.28 위안으로 고정해 두고 상하 0.3% 안에서만 외환 수급 사정에 따라 변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PAGE BREAK]외환 시세도 나라 힘이 세야 오른다
외환시세·환율을 결정하는 기본 요인은 각국 통화에 대한 수요·공급이다. 수요가 높은 나라는 돈 가치가 높아진다. 외환 수요가 높은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 다른 나라에서 필요로 하는 상품을 많이 갖고 있는 나라다. 국산 승용차가 인기를 끌어 해외 수입판매업자가 수입한다고 하자. 국내 수출업자는 외국 수입업자에게서 자동차 판매대금을 외화로 받아 은행에서 원화로 바꾼다. 때로는 외국 업자에게 아예 원화로 대금을 지불해 달라고 요구하기도 한다.
외국 수입업자나 국내 수출업자가 외화를 원화로 바꾸면 그만큼 외환시장에서는 원화 수요가 많아진다. 원화 수요가 많아질수록 원화는 대외가치가 높아진다. 결국 어느 나라의 돈 가치란 그 나라의 국력만큼 높아진다. 국력은 경제, 군사, 정치, 사회문화 각 방면의 역량이 국가적으로 결집되어 나타난다. ‘자동차나 가전제품은 일제가 좋다’고 세계에 정평이 나면 그만큼 세계의 엔화 수요도 커지고 일본의 국력도 강해진다. 미 달러가 국제거래의 중심통화가 되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미국의 국력이 강해서다.
환율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환율은 경제에 큰 영향을 준다. 우리 나라처럼 대외무역에 경제 성장의 큰 부분을 기대는 소규모 개방경제에는 특히 결정적이다. 최근 원화의 달러 대비 환율은 점진적으로 떨어지는 추세다. 지난 2월 6일 달러 당 1168원 하던 환율은 3월 18일 현재 1157원 수준으로 떨어졌다. 환율이 내리면 국내 수출기업들은 불리해지는 게 보통이다. 수출기업들이 지금 환율 하락으로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알아보자.
2월 6일 달러 당 환율이 1168원일 때 수출하던 국내기업은 3월 18일엔 수출대금 1달러어치를 환전하면 1157원을 얻는다. 그만큼 원화로 환산한 수입이 줄어, 채산성이 나빠진다. 수출품 판매가를 올려 이전과 같은 수준 이상으로 판매를 해야 전과 같은 수준의 이익을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출상품 판매가를 올리면 가격경쟁 때문에 수출 자체가 어려워진다. 수출상품 판매가를 올리면 해외 수입업자는 거래처를 다른 데로 돌리기 쉽다. 일단 거래가 끊어지면 나중에 거래를 재개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결국 거래를 유지하기 위해 당분간 환율 인하로 손해가 나더라도 기존 판매가로 수출해야 한다. 그래서 환율 하락 초기에는 기업들이 한동안 울며 겨자먹기로 출혈 수출을 하곤 한다. 출혈 수출은 여건이 다시 나아지기를 기대하며 오늘의 악조건을 견디는 수출이다. 환율이 다시 오를 때까지는 최대한 생산비를 줄여 출혈 수출에 따른 손실을 감당해야 한다. 사업을 계속하는 데 필요한 자금은 빚을 내든지 남는 생산시설을 팔든지 해서 버텨야 한다.
만약 기업들이 환율 하락을 버티지 못하고 수출품 판매가를 올린다고 해보자. 경쟁이 치열한 해외시장에서 판매가를 올리고도 전과 같은 수준의 매출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아무래도 판매가 줄기 쉽다. 수출이 줄고, 그러면 수출기업은 생산을 줄여야 한다. 생산이 줄면 고용이 줄어 실업이 늘어난다. 그만큼 가계 소비가 위축되고 내수 판매와 생산 위축을 심화해 국내 경기를 나쁜 방향으로 몰고 간다. 환율 하락은 이런 경위로 경기를 가라앉힐 수 있다.
[PAGE BREAK]지금 국내 수출 기업들은 모처럼의 세계 경기 회복세를 타고 수출을 늘리고 있다. 잘만 되면 수출 확대를 통해 침체할 대로 침체한 국내 경기를 회복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우리의 희망은 환율 하락이 진행되면서 먹구름을 만나는 형국이다. 내수 부진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환율 하락이 빠르게 진행되면 수출마저 꺾여 경기가 더 침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정부 당국(재경부)은 환율이 너무 빨리 큰 폭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막는 방향으로 외환시장에 개입하는 정책을 견지하고 있다.
환율 하락, 저지할까 용인할까
최근 우리 정부의 환율 대응 정책 기조는 하락세를 저지한다는 것이지만 이 같은 정책 대응은 또 다른 문제에 봉착해 있다. 물가 안정을 위해 원화 환율 하락 추세를 용인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보통 환율과 수입물가는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 환율이 오르면 수입물가도 오르고, 환율이 내리면 수입물가도 내린다. 이렇게 환율의 등락이 수입물가를 올리고 내리는 현상을 환율의 수입물가 전가(pass-through) 현상이라고 부른다.
우리 경제는 원유·원자재의 수입 비중이 높다. 2003년 기준으로 전체 원유·원자재의 48.2%가 수입에 의존한다. 그만큼 환율의 수입물가 전가도도 높다. 환율 등락에 따라 기업들이 생산에 필요로 하는 원자재 값도 함께 오르내리고 그 결과 생산자물가도 따라서 오르내린다. 중국이 앞장서 세계 경제가 회복세를 보이는 지금 단기적으로 각종 생산물자 수급이 핍박되어 국제 유가와 원자재 가격이 급등세다. 이런 움직임이 수입물가와 생산자물가의 상승률을 높여 국내 업계의 우려를 낳고 있다.
원자재 가격 폭등세와 맞물려 우리 경제의 물가 안정 기조가 흔들리는 게 사실이라면 정부 당국이 물가 안정을 위해 환율 하락을 유도하는 정책을 펴야 마땅하다. 그런데 이런 정책은 경기의 버팀목 역할을 하는 수출을 촉진하기 위해 환율 하락을 막아야 한다는 또 다른 정책 요구와 모순된다. 어떻게 해야 좋을까? 해답의 실마리는 소비자물가지수 추이에 있다. 지금 생산자물가가 오름에도 불구하고 소비자물가는 안정세다. 소비자물가지수는 지난 1월, 전년도 같은 달 대비 3.4% 증가해 계절적 요인을 제외하면 2003년 한 해 추이와 비슷하거나 느린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부분적으로는 물가가 오르지만 경제 전반에 걸쳐 물가 안정 기조가 흔들리는 것은 아니다. 물가 안정 기조가 흔들리지 않은 상황에서 물가 상승 압력을 해소하기 위해 환율 하락을 용인하거나 유도하는 정책을 쓸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