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체의 설계도인 ‘인간 게놈 지도’가 마침내 완성됐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에 참여한 6개국 과학자들은 2003년 4월 14일, 역사적인 인간 게놈 지도의 완성 사실을 발표했다. 인류의 달 착륙에 비견되는 역사적 대사건이었다. 인류는 ‘DNA 이중나선구조’를 밝혀낸 지 꼭 50년 만에 DNA(deoxyribonucleic acid) 30억 개를 모두 읽어낸 것이다.
인간 게놈 지도 완성시 맞춤식 치료 가능 6개국 18개 기관의 과학자들이 인간 게놈 프로젝트에 착수한 것은 1990년. 그동안 미국에서는 국립인간게놈연구소(NHGRI)와 에너지부가 27억 달러를 대학과 연구소에 지원해 전체 게놈의 절반을 해독했다. 약 1/3은 영국의 생거 연구소가, 나머지는 일본, 독일, 프랑스, 중국이 해독했다. 아쉽게도 한국은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못했다.
인간 게놈 지도의 완성으로 기대되는 의학적 혜택은 엄청나다. 우선 어떤 유전자에 결함이 있을 경우 그 질병이 생기는지 알게 될 것으로 보인다. 또 유전자를 교체하거나 조작하는 유전자 치료도 가능하게 될 전망이다. 또한 방대한 염기서열 정보는 의약품의 개발 속도를 한층 가속화시킬 것이다. 환자의 체질과 질병 특성에 맞는 맞춤식 치료는 물론 질병의 예방도 가능해질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의학적 혜택은 아직은 미래의 꿈일 뿐이다. 지금까지 게놈 프로젝트가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전 세계 과학자들에게 인터넷을 통해 인간의 게놈에 대한 정보를 공개함으로써 당뇨병, 백혈병, 암과 같은 질병과 관련된 유전자를 찾는 연구를 가속화시켰다는 점이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인간 게놈 지도를 완성하는 데 사용한 게놈은 건강한 성인의 것이다. 따라서 인간 게놈 지도를 만들면서 해독한 건강한 사람의 유전자와 특정한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의 유전자를 비교해 보면 어떤 유전자의 결함 때문에 질병에 걸리는지 알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국내 과학자들도 여러 개의 질병 관련 유전자를 찾아냈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를 시작할 당시만 해도 과학자들이 알았던 질병 관련 유전자는 100개에 불과했으나 게놈 프로젝트에 힘입어 지금은 1400개로 늘어났다. 인간의 유전자는 모두 3만 개 정도이다. 따라서 3만 개의 유전자 가운데 5% 정도인 1400개의 유전자는 어느 부위에 돌연변이가 생기면 어떤 질병에 걸리는지 알게 된 것이다.
유전자 3만 개 중 5%의 기능만 밝혀져 하지만 3만 개나 되는 인간의 유전자 가운데 95%는 아직도 기능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다. 그래서 인간 게놈 지도의 완성은 흔히 로제타 스톤의 발견에 비유된다. 이 돌은 1799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군이 나일강 어귀의 로제타에서 발견한 비석으로, 발견 당시에는 무슨 뜻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인간 게놈 지도의 완성도 돌판만 발견했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문장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인간의 설계도인 게놈은 30억 개의 DNA 분자, 즉 30억 개의 글자로 기록돼 있다. 글자는 A, T, C, G 네 글자. 이들 글자 수백 수천 개가 모이면 의미가 있는 하나의 유전자가 된다. 그리고 유전자가 인체의 벽돌인 단백질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좀더 많은 유전자의 기능이 밝혀지는 2010년 이후 우리는 게놈 프로젝트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혈액 한 방울로 수천 가지 질병을 진단할 수 있는 DNA칩이 등장하고 개인마다 자신의 DNA를 CD 한 장에 넣어 갖고 다니게 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병원에서 DNA 검사가 가능한 질병은 다운 증후군, 낭포성 섬유종 등 일부 유전병과 유방암, 에이즈에 국한돼 있지만 앞으로는 수천 개의 병을 동시에 진단할 수 있게 된다.
개인 게놈 지도 1000달러면 해독 가능할 듯 얼마 전 미국 보스턴에서는 ‘1000달러 게놈 시대를 향하여’라는 주제로 세계생명공학자대회가 열렸다. 1000달러만 내면 병원에서 혈액검사 하듯 게놈을 해독해 CD 한 장에 담아주겠다는 것이다. 이 회의에 참가한 대부분의 과학자는 10년 안에 1000달러 시대가 올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지금은 돈이 얼마나 들까? 이 대회를 조직한 세계 생명공학계의 풍운아 크레이그 벤터 박사는 71만2000달러를 주면 지금이라도 몇 달 내에 한 사람의 전체 염기서열을 해독해 주겠다며 주문을 받고 있다. 1990년대 초반 과학자들은 수작업으로 하루에 5000개의 염기서열을 해독했다. 지금은 하루 100만 개를 해독할 정도로 속도가 빨라졌다. 앞으로 10년 이내에 30억 개의 염기서열을 하루만에 해독하는 것이 가능해질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유전자 분석을 통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유전자를 담은 30억 개의 DNA 염기서열 가운데에는 단 한 개가 당신의 운명을 좌우할 수도 있다. 또한 우리가 막연히 생각해 왔던 사상체질도 DNA에 새겨져 있다. 얼마 전 서울 시내의 한 유전자 클리닉이 한 치매 환자의 DNA를 분석했다. 분석 대상은 치매와 관련성이 깊은 19번 염색체 위의 ApoE 유전자. 결과는 단 하루만에 나왔다. 이 환자의 유전자는 보통 사람과 염기 하나가 달랐다. 이 유전자의 484번째 염기가 보통 사람은 C이지만 이 환자는 T였다.
ApoE 유전자의 글자 하나가 T로 바뀐 사람은 한국인 가운데 9% 정도이다. 이들은 치매에 걸릴 확률이 정상인보다 5배 높고, 치매에 걸리지 않더라도 기억력이 떨어진다. 선천적으로 이런 염기서열을 갖고 태어났다면 누구나 치매 환자가 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치매는 환경과 유전자의 상호 작용에 의해 발병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이가 들어서 운동을 많이 하면 T로 바뀐 사람이라 하더라도 치매를 어느 정도 예방할 수 있다.
이런 사람처럼 DNA 한두 개가 바뀐 것을 ‘단일염기변이(SNP, single nucleotide polymorphisms)’라고 한다. 아무리 인종이 달라도 사람은 DNA가 99.9% 같다. 30억 개의 염기 가운데 0.1%, 즉 300만 개의 염기만이 사람마다 다르다. 바로 이것이 눈과 피부색, 인종, 생김새, 체질, 질병의 감수성 차이를 만들어 낸다. 이 치매 환자도 단 하나의 염기가 바뀌어 치매에 잘 걸리는 체질을 갖고 태어난 것이다.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고 잘 듣는 약이 다른 것은 모두 SNP의 차이 때문이다.
모든 인종의 DNA 차이는 단 0.1% 우리 몸의 설계도인 DNA는 3개의 염기가 한 개의 아미노산을 만들고 수십∼수백 개의 아미노산이 긴 띠 모양으로 결합해 단백질을 만든다. 염기에 변이가 있을 때 단백질을 만드는 과정에 오류가 생기게 된다. 따라서 단백질의 기능이 달라지게 돼 치명적인 질병을 일으킬 수도 있다. 예를 들어 β글로빈 유전자에서 하나의 염기변이가 일어난 경우 ‘β글로빈-S’라는 돌연변이 단백질이 만들어져 빈혈을 유발한다. 혈우병 역시 단 하나의 염기변이로 일어난다.
이처럼 단일염기변이의 중요성이 알려지면서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끝난 뒤 이 0.1%의 염기 차이가 다양한 인종 집단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밝혀내기 위한 ‘SNP 지도’ 제작이 미국국립보건원을 중심으로 본격화되고 있다. 이미 중국과 일본이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고, 한국도 과학기술부가 참여를 검토중이다.
인간 게놈 지도와 SNP 지도는 인류의 미래를 획기적으로 바꿔 놓게 될 것이다. 한국인의 단일염기변이를 데이터 베이스로 구축할 경우 사람마다 질병 감수성의 차이를 밝혀 개인별로 ‘맞춤약’을 처방할 수 있게 되고, 한민족의 체질과 민족 이동 경로를 이해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된다.
한국인의 단일염기변이를 DB로 구축하면 국내에서도 연간 수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는 약물 부작용 사망자를 상당히 줄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에서는 의약품 부작용으로 매년 최소한 10만 명이 죽고 200만 명이 입원한다는 보고가 나와 있는 실정이다.
한국얀센이 2000년부터 판매한 위궤양 치료제 라베프라졸은 맞춤약의 초보적 사례다. 간의 약물대사와 관련이 있는 10번 염색체의 ‘CYP2C19 유전자’에서 두 개의 염기가 바뀐 사람은 위궤양 치료제를 간에서 금세 분해해 버리기 때문에 약효가 유지되기 어렵다. 이런 사람은 동양인 가운데 특히 많아 한국인은 60%나 된다. 라베프라졸은 이런 환자에게 효과적이다.
이미 국내외에서 여러 기업이 신약 개발과 특허 선점을 노리고 정부보다 앞서 SNP 연구에 뛰어들었다. 벤처 기업 마크로젠은 민간 차원에서 한국인, 몽골인의 SNP 지도를 제작하고 있다.
벤처기업인 에스엔피제네틱스도 한국인 6000여 명을 대상으로 천식, 간암 등 질병과 관련이 있는 단일염기변이를 분석중이다. 이 회사는 앞으로 10년 뒤에는 단숨에 수만 개의 변이를 분석할 수 있는 SNP칩이 나와, 체질에 따라 약을 고르고 질병 발생 가능성을 추정해 예방법을 의사와 상담하는 시대가 열리게 될 것이라고 자신감을 내보이고 있다.
조선 말기의 유학자 이제마가 창시한 사상의학을 비롯해 우리의 선조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체질에 따른 처방을 해왔다. SNP에 대한 연구를 통해 체질을 DNA 분자 수준에서 파악할 수 있게 되면 앞으로 거의 모든 질병에 대해 체질에 따라 처방을 달리하는 시대가 올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개인의 유전 정보가 제대로 분석만 된다면 미리 질병 가능성을 파악해 예방약을 쓰거나 생활 습관을 바꿈으로써 ‘사후 약방문’격의 치료 중심 의학에 혁명적인 변화가 올 게 분명하다. 예를 들어 아기가 태어나면 지문을 찍듯이 유전자 지도가 작성된다. 이에 따라 각종 질병의 발생 가능성과 시기를 예측할 수 있게 된다. 아이는 자라면서 병이 나타나기 전에 미리 예방약을 먹거나 생활 습관을 조절해 질병이 발생하지 않도록 할 수 있게 된다.
현대판 우생학 논쟁 가능성 크다 한편 신약을 개발하는 데 드는 비용도 크게 줄어들 전망이다. 급속히 발달한 컴퓨터 시뮬레이션 기술과 생물 정보기술이 결합돼 사이버 임상 실험을 할 수 있게 된다. 그이러면 동물 실험이나 임상 실험에 드는 시간을 대폭 단축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유전자 검사가 보편화되면서 ‘유전자 차별’이 뜨거운 논란거리로 등장할 전망이다. 또한 유전자 치료가 보편화되면서 부모가 유전자를 조작해 똑똑하고 아름다운 아이를 낳으려 할 경우 ‘현대판 우생학 논쟁’이 재연될 가능성도 있다.
불리한 유전 정보를 가진 사람은 취직, 보험 가입, 결혼 때 차별을 받거나 사회적으로 낙인이 찍힐 수도 있다. 의료보험회사들은 가입 때 개인의 유전 정보를 요구해 이를 근거로 보험료를 산정하거나 가입을 결정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기업들은 신입 사원에게 유전자 검사 결과를 입사 원서와 함께 제출하라고 요구할 수도 있다. 또한 남녀가 선을 볼 때에도 상대편의 유전 정보를 보자고 요구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 설사 1000달러에 개인의 게놈을 해독했다 하더라도 자칫 잘못 해독한 결과를 가지고 “5년 뒤 암에 걸린다”고 생사람을 잡을 수도 있다.
초창기 미국의 게놈 프로젝트 책임자였던 제임스 왓슨은 인간 게놈 지도가 완성된 날 기자 회견에서 “인간 게놈 프로젝트 예산의 3%를 유전자 해독의 윤리적 결과에 대한 연구에 쓰도록 한 결정은 내가 내린 가장 현명한 결정이었다”고 말했다. 이런 노력에 따라 미국에서는 40개 주가 취업 등에서 유전적 차별을 금지하는 법률을 통과시켰고, 연방 정부도 같은 법안을 제안해 놓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는 현재 의료보험 가입 신청자 가운데 16만4000명이 이미 유전병 등 의학적 문제로 의료보험 가입을 거절당하고 있다.
이미 국내에서도 혈우병 등 수십 종의 유전성 질환에 대한 유전자 검사가 시작돼 병원마다 개인의 유전 정보가 쌓여 가고 있다. 또 자궁 착상 전 유전자 검사나 태아 유전자 검사를 통해 아기를 선별해 낳거나 낙태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국내에는 유전자 차별을 막고 개인의 유전 정보를 보호할 아무런 법적 조처가 취해지지 않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쌓여 갈 개인의 유전 정보가 유출되거나 악용되지 않도록 ‘유전정보보호법’을 하루빨리 제정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