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숲을 흔드는 초겨울 바람이 빈 교정을 지키는 저녁 나그네를 몽상으로 몰고 가는 늦은 저녁. 날마다 찾아오던 달님이 오늘은 결석이다. 보름달 대신 겨울비에 실려 보낸 겨울바람이 마지막 남은 교정의 단풍잎들을 몰고 가버릴 모양이다.
교과, 특기·적성, 무용 지도로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잠시 눈을 들어 나만의 세계로 돌아오는 시간은 늘 해넘이로 어두워진 시각이 되곤 한다. 장소는 달라도 늘 고만고만한 아이들을 보며 살아온 세월이 어느새 25년째. 그래서인지 가끔은 나이를 잊을 때가 있다. 나는 거기 그대로 있는 것 같은데 어느새 훌쩍 성장하여 처녀 총각으로, 직장인으로, 군인 아저씨로, 어엿한 어른의 모습으로 찾아오는 제자들을 보는 일은 즐거움이기도 하지만 잊고 살아온 내 시간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곤 한다.
제자들의 간청으로 몇 번 결혼식 주례를 섰는데, 그 중 다섯 번째였던 점현이가 딸아이의 돌잔치에 초대하고 싶다며 전화를 했다. 1980년 10월 25일, 고흥 가화에서 4학년 48명의 담임으로 교직에 몸을 담았을 때 가르친 제자가 이젠 어엿한 가장으로, 남편이자 아버지가 된 것이다. 이젠 원하진 않지만 기쁘게 ‘할머니’ 소리를 듣게 생겼다. 산길을 돌아 2시간 걸리는 가정 방문 길에 녀석이 다리가 아프다기에 내 등에 업어주기도 했는데, 어느새 열한 살짜리 소년이 서른 살이 넘은 아빠가 되었으니, 내가 할머니 소리를 듣는 것은 좀 억울할지라도 행복한 일이 아닌가? 지난 스승의 날에는 부부가 함께 저녁 식사자리를 주선하여 비싼 화장품까지 안기면서 늙지 말라더니, 이번에는 예쁜 딸아이를 안겨주며 할머니 연습을 하란다.
1980년에도 교사의 수가 모자라서 우리 반 아이들은 석 달 가까이 옆 반과 합반을 하여 96명이 한 교실에서 부대끼며 살고 있었다. 고향에서 3시간 반이나 걸리는 그곳을 찾아가며 스물다섯 살의 처녀 선생은 굽이굽이 비포장 바닷가를 돌아가는 시골 버스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자취방의 문을 열면 비릿한 바다 냄새가 나고 파도 소리가 담벼락을 치던 곳. 바다에서 일하고 온 학부모님이 커다란 게를 보내면 무서워서 만지지도 못하고 민물에 담가놓아 죽은 다음에 삶아 먹던 일, 살아있는 낙지를 보내주면 그것은 더 징그러워 손도 못 대고 그대로 학교로 가져가 남선생님들이 그 자리서 홀랑 잡수시던 모습에 기겁을 했던 일….
내가 살던 가화면 대통 부락에 살던 우리 반 점현이와 옆 반 아이 두 명은 내 방에 놀러오는 단골손님이었다. 아침 등굣길에도 같이 가고 귀가할 때도 같이 다니던 삼총사 소년들은 밤에도 내 방에 와서 공부를 했다. 추운 겨울 밤길이 위험할 때는 아예 비좁은 내 방에서 이야기하다 잠들곤 했던 철없던 그날의 모습들이 그림처럼 떠오른다.
삼총사 중에 두 아이의 결혼 주례까지 서 주었으니 ‘가르치는 자리’가 얼마나 아름다운 만남을 선물했는지 모른다. 1년 반만에 결혼과 함께 읍내 학교로 떠나던 날, 아이들의 눈물 속에 이임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함께 울어버린 나를 찾아, 아이들은 일요일이면 양동이에 한 아름씩 바지락을 잡아 1시간도 더 걸리는 먼 길을 단체로 몰려오곤 했었다.
그림을 잘 그리던 형진이는 방학 때 보낸 편지에 연필로 내 모습을 그려서 보냈는데 얼마나 잘 그렸는지 놀라웠고, 여자 아이들은 결혼사진이 담겨 있는 앨범을 보내줘 지금도 그리울 때마다 들춰보곤 한다. 어쩌면 아이들과 항상 함께 살고 있는 셈이다.
이젠 인생의 선배, 결혼의 선배, 먼저 부모 된 선배로서 내가 겪은 시행착오를 거치지 않기를 바라는 진솔한 덕담을 준비해야 하겠다. 그리하여 우리 점현이 부부가 결혼의 언덕을, 어버이의 고개를 숨차지 않게 넘을 수 있기를 비는 간절한 기도를 해 주고 싶다.
인생을 보석보다는 생수처럼 살 수 있기를, 조급하기보다는 천천히 살기를, 높게 살기보다는 넓게 살 수 있기를 염원한다. 그리하여 따스한 사람으로, 오래가는 기쁨을 음미하며 향기롭게 살 수 있기를 빌어주고 싶다. ‘점현아! 참 고맙고 감사하구나. 내게 이렇게 오래가는 기쁨을 선사해 주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