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학년이 시작됩니다. 교사는 일 년에 두 번씩 새해를 맞이합니다. 첫 번째는 신년(혹은 구정)의 시작인 1월 1일이요, 두 번째는 새 학년, 새 학기가 시작되는 3월초입니다. 1월 1일이 산술적인 의미의 새해라면 교사에게 실질적인 새해는 바로 3월초라 하겠습니다. 선생님들! 3월 새해에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번 호에서 소개할 친구는 수천 년을 한자리만 지키고 살아온 다소 우둔한 녀석입니다. 이 친구는 작심삼일(作心三日), 인간처럼 간사한 마음도 없이 그저 큰 몸집에 이런저런 상처를 안고도 개의치 않습니다. 믿음직한 모습으로 한 자리를 지키면서 한민족의 역사를 지켜온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 그는 바로 암각화입니다.
암각화란 말 그대로 바위 표면에 그림을 새긴 것을 말합니다. 예부터 특이한 형상을 하거나 잘 생긴 소위 ‘몸짱’ 바위는 신앙의 대상이었습니다. 특히 생명수랄 수 있는 강가에 위치한 바위는 신에 대한 제(祭)의 공간이자, 종족 번영을 위한 다산(多産)과 풍요(豊饒)의 기원장으로 신성한 공간이었습니다. 대개 암각화 전면에 의식을 치르기 위한 공간이 확보되어 있음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암각화는 내용으로 보아 사실적인 암각화, 추상적인 암각화, 신상 암각화 등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사실적인 암각화는 각종 동물과 인물상을 실감나게 묘사한 반구대암각화가 대표적입니다. 추상적인 암각화는 동심원이나 사다리꼴 등의 독특한 문양으로 꾸며진 천전리암각화가 대표적입니다. 신상 암각화는 고령 양전동암각화가 대표적이고 대부분의 암각화가 이 부류에 포함됩니다.
이번 호에서는 국내 암각화 중 국보로 지정된 울산의 암각화 두 곳을 찾아 떠나고 다음 호에서는 우리나라 암각화의 대세라 할 수 있는 신상 암각화를 찾아가고자 합니다.
기하학 문양과 낙서
제가 살고 있는 울산은 흔히들 공업도시로만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큰 오산입니다. 울산은 선사시대부터 찬란한 문화를 가진 역사도시입니다. 신설학교를 지으려고 땅만 파면 선사시대 유물과 유적이 대규모로 발굴되는 바람에 개교에 상당한 차질을 빚을 정도입니다. 이런 울산에 국보가 두 점 있는데 모두 선사시대 암각화입니다.
천전리각석은 국보 제147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학계에 보고된 국내 최초의 암각화입니다. 반구대암각화와 같은 지류인 대곡천 상류에 위치해 있으며 장마철 물이 불어 개울을 건너지 못하는 경우 외에는 언제든지 찾아갈 수 있습니다. 주변 넓은 바위 곳곳에 약 1억 년 전 공룡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고 인근에 원효가 주석했다는 반고사터도 있습니다.
높이 2.7미터에 폭이 9.5미터로 듬직한 외모에 표면은 점토질이라 미끈한 피부를 자랑합니다. 암각화가 새겨진 바위를 옆에서 보면 절을 하듯 기울어져 있습니다. 이 암각화가 수천 년을 견디어 온 비밀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렇게 앞으로 기울어진 형세이기에 빛이 잘 들지 않고 비를 피할 수 있어 풍화의 피해를 덜 입었던 겁니다. 하지만 아랫부분을 중심으로 바위면이 깎이거나 박락(剝落)하는 현상이 심각해 안타깝습니다. 윗부분은 나무뿌리가 암각화를 위협하고 있고 일부 몰지각한 이들은 암각화 표면에 흔적을 남기기도 해 이런 상태로 관리가 될 지 의문스럽습니다.
이 암각화는 가로로 2등분하였을 때 상단에는 동심원이나 마름모, 우렁무늬, 물결무늬 등 기하학적인 문양이 주를 이루고 일부 동물이나 인물상도 보여 전형적인 암각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단에는 책을 펼친 듯한 모양의 명문을 중심으로 곳곳에 낙서를 해둔 듯 글자들이 많이 보입니다. 그래서 하단 명문 부분을 일컬어 ‘서석(書石)’이라 일컫고 있습니다. 따라서 정식 문화재명인 ‘천전리각석’에는 상단의 암각화부분과 하단의 서석부분을 모두 포함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겠습니다.
추상파들이 남긴 천전리암각화
천전리각석을 새긴 기법은 다양한데 동물과 사람 등에서 보이는 면각기법은 신석기 말기, 각종 기하학적 문양 등 선각기법은 청동기, 하단 명문부분의 기마상 등은 철기, 300여 자의 명문은 신라시대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인근 주민들의 말로는 문화재로 지정되기 이전만 해도 그 가치를 모르고 낙서를 하기도 했다고 하니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기록이 한 곳에 남아 있다고 하겠습니다.
상단의 기하학 무늬에 대한 해석은 분분합니다. 워낙 추상적인 내용이라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읽으려면 더 깊은 연구를 필요로 하지요. 다만 동심원은 고령 양전동암각화와 함안 도항리암각화에서도 보이고 있어 농경사회적 태양숭배사상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나뭇잎처럼 생긴 문양은 생산을 상징하는 여성의 성기를 묘사했다고 보는 시각도 일반적입니다. 당시 이런 수수께끼같은 기하학적 문양을 바위에 나타낼 수 있었던 선사인들의 지혜가 돋보입니다. 이 문양을 남긴 이들도 추상파라 할 수 있겠죠?
하단의 명문은 추상적인 암각화보다는 더 많은 연구 성과를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곳을 찾은 모 교수의 말처럼 이 서석에만 박사급 논문이 수두룩할 정도로 연구가치가 큽니다. 하단 가운데쯤에 자리한 책 모양의 명문을 주목합니다. 한쪽 면은 갈문왕이 법흥왕 12년(525)에 이곳을 방문하여 놀다 간 것을 기념하기 위해 각명한 것이고 다른 면은 8년 후 다시 이곳을 찾아 그때를 회상하는 내용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 밖의 명문에는 화랑들의 이름이 많이 보여 화랑들이 이곳을 수련도량으로 삼았던 것 같습니다.
천전리암각화에 나타나는 독특한 문양들을 아이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지난 여름 6학년 아이들과 이곳을 찾은 후 암각화에 등장하는 원, 네모, 마름모가 가지는 의미를 조사해 보았습니다. 아이들은 문양을 암각화를 새긴 사람들의 감정을 나타낸 것으로 이야기했는데, 원은 원만함이나 기분 좋음을 의미하고 네모는 그와 반대, 마름모 또한 생각의 한정, 화가 난 모습 등 부정적인 의미로 해석하였습니다. 그러한 추상적인 도형들이 선으로 연결되어 암각화에 나타나는 것은 그러한 감정들이 서로 연관되어져 기분이 좋았다가 나빠졌다는 등의 해석을 보였습니다.
해외손님 맞는 반구대
반구대(盤龜臺)를 국보 제285호인 반구대암각화의 줄임말로 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반구대가 바로 앞에 있는데도 반구대가 어디냐고 물으면 한 10여 분 걸어가야 한다며 친절하게도 반구대암각화를 가리키는 사람들이 제법 있지요. 한실마을에 있는데 한실을 한자화한 것이 ‘대곡(大谷)’입니다. 반구대의 유래는 대곡천과 어울린 산세가 거북이가 목을 쏙 빼고 기어가는 모습과 같다고 해서 붙여졌습니다. 집청정이나 반구서원에서 반구대쪽 산세를 바라보면 옛사람들이 반구대라고 이름 붙인 까닭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언양과 경주를 잇는 35번 국도에서 4킬로미터 더 달려 반구대 계곡에 들어서면 수정같이 맑은 대곡천과 암벽, 울창한 숲이 조화되어 마치 선사시대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갖게 됩니다. 반구대가 지닌 아름다움을 수억 년 전 공룡들도 알았던지 주변 바위에는 그들이 유유자적 하다 남긴 발자국도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또한 포은 정몽주가 언양에 유배왔을 적 자주 찾았던 곳이고 정구, 이언적과 같은 명현들도 뛰어난 경치를 보러 왔었습니다. 반구대를 ‘포은대’라고도 일컬음은 포은 선생에서 유래하며 지금도 그의 영모비가 남아 있습니다.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았으며 그들은 반구대 암벽에 ‘반구’라는 각자와 학 그림, 성명, 유허비 등을 각인해 두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포은, 운학재, 회재 삼현(三賢)을 모셨던 반고서원은 현재 ‘반구서원’이란 이름으로 복원되어 있습니다.
이전에는 반구대까지 들어가는 길이 교행이 어려울 정도로 접근에 문제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타 지역 선생님들께서 방학을 맞아 큰마음 먹고 반구대암각화를 찾았다가 정작 반구대암각화는 보기는커녕 가까이 접근하지도 못하고 투덜대며 돌아오기가 쉬웠습니다. 어렵게 반구대까지 진입을 해도 정작 암각화는 물에 잠겨 버려 문화재 안내문만 읽고 오기 십상이었죠. 지금은 지난해 11월에 반구대 진입도로가 정비되어 길이 넓어지고 암각화 조형물도 설치해 놓고 주차장도 말끔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올해 중으로 인근의 천전리각석까지 원시문화산책로도 정비되어 개방될 예정입니다.
반구대암각화가 처한 최우선인 문제점이 바로 대부분 물속에 잠겨 있다는 점입니다. 1965년 대곡천 하류에 준공된 사연댐으로 인해 연중 심한 갈수기 외에는 육안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근래에는 암각화 대형사진을 세워 두어 암각화 실물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올해만큼은 5월 27일부터 6월 24일까지 한 달여 기간 동안 암각화 실물을 관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곳 울산에서 국제행사인 제57차 국제포경위원회(IWC) 연례회의가 개최되는데 그 기간 동안만 댐의 수위를 낮추어 회의 참가자 및 관람객들이 근접 관람할 수 있도록 수자원공사와 협의되어 있습니다. 반구대암각화를 못 보고 돌아가신 분들이나 반구대암각화를 찾고자 하시는 분들은 국내 포경산업의 전진기지였던 장생포에 건립되는 고래박물관 관람과 더불어 반구대를 꼭 찾아주시기 바랍니다.
사실적 묘사의 극치, 반구대암각화
반구대암각화에는 가로 10미터, 세로 3미터 되는 미끈한 바위면을 중심으로 200여 점의 그림들이 모여 있습니다. 이 그림들은 크게 인물상, 동물상, 기타 배 같은 물상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인물상은 탈을 쓴 가면, 물짐승을 잡는 사냥꾼, 배를 타고 고기잡이 하는 어부 등이며 동물상은 사슴, 호랑이, 멧돼지, 고래 등이고, 물상은 배, 그물, 덫 등입니다. 바위에 새겨진 동물과 인물들이 살아 움직이는 듯 생생하고 역동적인 묘사가 돋보입니다. 천전리각석을 상하로 양분했다면 반구대암각화는 좌우로 양분해 볼 수 있습니다. 주로 왼쪽에는 면각기법으로 새긴 고래 중심의 바다짐승이 많이 보이고, 오른쪽에는 선각기법의 호랑이, 사슴 등의 들짐승이 주가 됩니다.
이제 그림을 자유롭게 감상해 봅시다. 작살 맞은 고래가 깜짝 놀라 하늘로 날아갑니다. 그를 따라 다들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데 고래 한 놈만 아래로 내려오는 모습입니다. 튀는 그 놈만 선각으로 그렸네요. 또 다른 녀석은 새끼 고래를 업고(배고) 활주합니다. 호랑이는 울타리에 갇혀 있고 사람들이 배를 타고 고래 사냥을 합니다. 바위 제일 윗부분에서는 남자의 성기를 바짝 든 녀석이 멀리 망을 보고 있고 시선을 밑으로 내리면 여자인 듯한 인물이 사지를 펼쳐놓고 대담한 자세를 보입니다. 다른 한쪽에선 사슴이나 멧돼지 등 뭍짐승들이 떼 지어 분주히 이동하고 있습니다. 천전리암각화에서 보이는 인물상(가면)도 보이네요. 자손의 번식, 사냥에서 성공하기를 기원하는 선사인들의 염원이 이 바위에 모두 담겨 있습니다.
이제 반구대암각화는 재창조되고 있습니다. 그 역동적인 모습들이 도자기를 중심으로 디자인 되더니 이제는 엘리베이터나 건물벽화에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디자인으로, 세계 속의 디자인으로 발돋움하기에 손색 없는 자랑거리입니다.
늘 한결같이
2005년 1월 새해가 지났건만 안타까운 일들이 올해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교육계의 수장될 자들은 최단 재임기간 신기록에 도전하는 듯합니다. 위가 이러니 현장에 있는 교사들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각은 어떻겠습니까. 그뿐입니까. 40년 만에 공개된 한일협정 문서를 들여다보니 부실 투성이입니다.
암각화는 수천 년을 한결같이 이 땅을 지켜왔습니다. 비록 무생물이지만 한결같이 우리 땅에서 벌어진 역사를 꿰뚫고 오늘도 우리들 곁을 지키고 있습니다. 정초부터 낌새가 불길합니까? 걱정 마십시오. 우리들에게 있어 새해는 3월이요, 우리들의 희망은 아이들입니다. ‘올해는 어느 선생님이 우리 반 선생님이 될까?’ 하며 우리들을 기다리는 아이들이 있지 않습니까! 새해에는 그 친구를 닮아 늘 한결같은 선생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