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나는 저 새를 보시오. 왼쪽 날개가 있고, 그것이 오른쪽 날개만큼 크기 때문에 저렇게 멋있게 날 수 있는 것이오. 인간보다 못한 금수의 하나인 새들조차 왼쪽 날개와 오른쪽 날개를 아울러 가지고 시원스럽게 하늘을 날고 있지 않은가? 그것이 우주와 생물의 생존의 원리가 아닐까?”
이영희 교수의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의 한 구절이다. 한국 사회는 그동안 민주주의가 신장됐지만 북한 문제, 대미 관계, 재벌 문제, 노사 문제 등을 놓고 좌우의 대립이 오히려 격화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사회는 인간의 본성이 빚어낸 조각품 대체로 후진국에서는 좌, 우의 극단주의자가 득세해 사회를 갈등의 낭떠러지로 몰고 간다. 한국 전쟁은 그 대표적 사례다. 하지만 선진국이 될수록 극단론자들은 설자리를 잃고 온건한 좌파와 온건한 우파가 대중의 지지를 받는다. 대화가 가능한 온건한 좌와 우가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할 때 사회적 갈등을 제도적으로 해소할 수 있고, 발전된 사회 제도가 도입된다.
이제 우리나라도 과거 냉전 시대에 극단론자들이 만들어 낸 낡은 이데올로기를 원점에서부터 다시 생각해 볼 단계에 이르렀다. 사회를 계급 갈등의 관점에서만 보는 데서 벗어나 경쟁과 협동의 관점에서 사회와 정치·경제 문제를 바라보자는 것이다. 우파는 공정한 경쟁을, 좌파는 진정한 협동을 만들어 내는 데 노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경쟁과 협동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에 가장 가까운 행동 원리이기 때문이다.
흔히 사회학자들은 사회를 인간의 본성과는 동떨어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는 크게 잘못된 시각이다. 사회는 인간이 합리적으로 만든 발명품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본성이 빚어낸 조각품이라고 하는 말이 더 진실에 가깝다.
레닌, 스탈린, 마오쩌둥, 폴 포트, 김일성 같은 공산주의자들은 사회 환경이 바뀌면 인간의 본성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혁명을 하고 세뇌 교육을 해도 자신의 이익보다 사회의 이익을 더 중시하는 인민을 창조해 내지 못했다. 이것이 공산주의 몰락의 근본적 원인이었다.
구소련 사람들은 공동 소유인 집단농장에서는 대충 일을 했지만, 자기 집 앞마당에 심은 야채와 과일은 애지중지 가꾸었다. 그러니 사회가 유지될 리 만무하다. 지구 위의 마지막 공산주의 국가인 북한도 토지의 사적인 사용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선회했다. 인간의 이기적 본성을 지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공산주의자의 결정적 착오였음을 인정한 것이다.
그동안 진화론은 협동보다는 경쟁을 강조해 왔다. 진화론하면 누구나 ‘적자생존’, 즉 경쟁과 도태를 연상시킨다. 19세기 중반 다윈의 진화론이 나왔을 때 당시 산업 자본가들은 자유 경쟁과 도태를 진화의 원리로 설명한 다윈을 구세주처럼 생각하고 환호했다.
그러나 적자생존이라는 용어는 1850년대에 스펜서가 처음으로 사용한 말이지 다윈이 만든 말이 아니다. 다윈은 적자생존과 자연선택 못지않게 동물 사회의 협동과 공생 같은 상호 의존적인 관계의 발전도 진화의 중요한 원천이라고 생각했다.
동물과 인간은 먹이와 번식 상대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지만 늘 경쟁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과 동물의 세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히려 동맹 관계를 맺고 서로 돕고 사는 시간이 더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로 종류가 다른 박테리아들은 상대편 박테리아가 버린 노폐물을 먹으면서 청소부로 함께 산다. 작은 물고기들은 한꺼번에 떼를 이루어 다녀 더 크고 위협적으로 보이게 함으로써 포식자에게 덜 잡아먹힌다. 벌이 꽃가루를 옮기는 식물과 곤충의 공생 관계, 뿌리혹박테리아가 식물의 뿌리에 살면서 영양분을 빨아들이기 쉽게 해주는 공생 관계도 협동이 행동의 기본 원리다.
동식물 세계에도 협동과 공생 존재 동물 사회 집단 내부의 협동 행동도 호혜적 이타주의에 기반하고 있다. 가축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흡혈박쥐도 굶주린 동료에게 피를 나누어 준다. 제인 구달은 탄자니아에서 고아가 된 아기 침팬지를 떠맡아 기르는 침팬지 집단을 자주 목격했다. 내가 죽어 우리 아이가 고아가 됐을 때 다른 챔팬지들이 나의 아이를 키워 줄 것이라는 기대가 침팬지 사회에도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1964년 뉴욕에서 세계무역박람회가 열렸을 때 개미가 전시된 적이 있다. 당시 이 코너에는 “2000만 년 동안 개미 집단이 진화를 못한 것은 사회주의자였기 때문이다.”라는 자유무역주의자의 글귀가 붙어 있었다. 그러나 이는 고도로 분업화된 개미 사회의 협동 체계에 대한 지식 없이 개미를 맹목적으로 일만 하는 존재로 착각한 데서 나온 발상이다.
이처럼 자연계에 존재하는 많은 협동 사례에도 불구하고 좌파는 다윈주의와 진화론을 우파의 나팔수처럼 혐오해 왔다. 미국의 좌파는 사회생물학을 창시한 하버드 대학의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 교수에 대해 생물 세계의 자연도태 원리를 인간 사회에 적용한 자본주의의 앞잡이라고 공격했고 윌슨 교수에게 계란을 던져 강의를 방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회생물학자들이 경쟁만을 강조한 것은 결코 아니다. 윌슨도 자신의 인생 후반기에는 협동과 희생이 동물 사회에서 어떻게 진화해 왔는지에 대한 연구에 몰두했다. 또한 사회생물학의 토대 위에 새로운 학문으로 등장한 진화심리학은 영장류 등 고등한 생명체일수록 호혜적 이타주의가 진화하고 복잡한 사회를 만들어 산다는 것을 밝혀냈다.
1980년대에 등장한 ‘사회적 지능 가설’은 복잡한 사회생활에 필요한 계산 능력 때문에 영장류와 인간의 두뇌가 진화했다고 본다. 실제로 영장류는 집단생활을 하면서 호혜적 이타 행동에 기반한 동맹 관계를 자주 형성한다. 호혜적 이타 행동이 가능하려면 내가 베풀었을 때 자신도 보답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각 개체들과의 상호 관계를 기억하고, 상대의 마음을 읽으며, 교환 가치를 계산하고, 상대와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언어가 발달해야 한다.
인간은 두뇌가 커지면서 언어가 생겨났고 정교한 분업, 협업, 동맹처럼 호혜적 이타주의에 기반을 둔 사회적 지능이 발달했다. 인간의 협동은 초기에는 사냥한 고기를 나눠 먹고, 상대방의 털을 골라 벼룩을 잡아 주는 것 같은 행동을 통해 진화했다. 큰 짐승을 잡아 혼자 먹겠다고 해보았자 다 먹지도 못할 뿐더러 나중에 다른 사람이 먹거리를 들고 왔을 때 얻어먹지도 못한다. 일단 베풀고 나중에 그 사람에게 도움을 받는 게 서로 이익이다.
생물학자인 윌리엄 해밀턴과 미시간 대학의 정치학자인 로버트 액설로드는 베푸는 자와 배반자를 프로그램으로 만들어 컴퓨터 토너먼트 게임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실험에서도 베푸는 것이 배반보다 장기적으로 볼 때 이익이라는 게 증명됐다.
그렇다면 인간 사회에서는 잘 베풀면 돌아오는 것도 많은 것일까? 물론 배신자도 있다. 베풀어도 상대가 배신을 하면 어떻게 할까? 이를 ‘무임 승차자 문제’라고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동물은 결속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집단을 이루어서 살 수 없다.
복잡한 서열과 동맹 관계를 가진 사회 집단을 이루는 영장류는 무임 승차자 문제를 처벌과 보상을 통해 해결했다. 침팬지 사회에서도 자기 것만 챙기는 이기적인 존재는 린치를 당하는 등 처벌을 받는다.
인간은 상대의 얼굴을 잘 기억하고, 상대의 마음을 잘 읽고, 내가 이렇게 했을 때 상대가 나에게 이렇게 해주었다는 경험을 잘 기억한다. 우리의 뇌가 무려 34년 동안 얼굴을 기억하는 것도 네가 나를 도우면 나도 너를 돕겠다는 상호주의에 기반을 둔 일종의 ‘은인 기억 메커니즘’이다. 사람의 뇌는 건물이나 풍경을 기억하는 데는 둔하지만 얼굴을 기억하고 구분하는 능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발전돼 있다.
인간이 고도로 분업화된 복잡한 사회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베푼 것보다 상대가 계속해서 적게 베풀 경우 협력을 거부함으로써 무임 승차자를 응징하는 심리적 메커니즘을 진화시켜 왔기 때문에 가능했다. 무임 승차자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인간이 600만 년 전 침팬지처럼 50명 정도의 집단을 이루어 살 때에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15만 년 전 출현한 호모 사피엔스는 약 150명 정도의 집단을 지어 살았고 집단이 커지면서 집단생활에서 발생하는 문제도 더욱 복잡해졌다. 이 과정에서 정교한 사회적 지능이 발달해 요즘에는 수억 명이 집단을 이뤄 사는 국가가 탄생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상대의 마음과 행동을 읽은 심리학적 기술, 상대가 하는 얘기가 거짓말인지 판단하는 기술을 진화시켰다. 심리학자들은 인간이 연역적 추론 능력을 갖게 된 것도 상대의 속임수 찾아내기를 통해 발달했다고 보고 있다. 상대의 얘기와 행동이 거짓인지 진실인지 가설을 세우고, 상대의 행동과 과거의 경험을 분석해 가설이 틀린지 맞는지 확인하는 일을 되풀이하면서 연역적 사고 능력이 생겼다는 것이다.
베푸는 사람은 건강을 유지하며 장수한다 이기적인 이익 추구, 사회적 계급, 성적 질투심이 어떤 사회에나 보편적으로 존재하듯이 인간의 본성에는 상대를 도움으로써 협동 관계를 구축하고 상호 의무를 다 하는 본성이 존재하는 게 분명하다. 물론 개인적 이익 추구도 무시할 수 없다. 이익 추구는 인간의 가장 강력한 욕구이기 때문이다. 만일 협동만 하고 개인의 이익 추구를 무시한다면 무임 승차자가 많이 생겨 사회가 유지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손익 계산을 따져 이익이 된다고 생각될 때만 남을 돕는 것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이타 행동이 단지 계산된 행동이 아닌 본능이라는 연구 결과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에모리 대학 그레고리 번스 박사는 사람이 서로 이타적 행동을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도우면 뇌가 즐거움을 느끼기 때문이란 것을 실험을 통해 2002년에 밝혀냈다.
실험자를 상대로 협력 또는 배신을 하도록 하는 상황 실험에 참가하게 한 후 이들의 뇌를 자기공명장치로 촬영했다. 그 결과 서로 협력할 때 사람의 뇌에서는 즐거움을 느끼는 부위가 최고조로 활성화됐다. 맛있는 디저트를 먹을 때나 귀여운 얼굴을 보았을 때 또는 돈을 보거나, 흥분제 따위를 복용했을 때 활성화되는 부위가 협력을 할 때에도 활성화됐다.
인류학자들은 인간이 협동심을 키워 왔던 것은 과거 인류의 조상이 사냥 몰이를 하거나 농작물을 경작할 때 서로 돕지 않으면 생존에 불리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사회학자들은 서로 돕고 협력하는 것이 사회적 필요성의 산물이라고 주장해 왔다. 법이나 약속을 어기면 처벌하는 것도 그중의 하나다. 그러나 인간은 단지 처벌이 두렵거나 보상을 받으려고 이타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즐겁고 쾌감을 일으키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또한 베푸는 사람은 행복을 느끼기 때문에 오래오래 건강하게 산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미국 미시건 대학 스테파니 브라운 교수팀은 다른 사람들을 돕는 노인이 그렇지 않은 노인들보다 장수한다는 조사 결과를 2003년에 발표했다. 연구팀은 1987년부터 디트로이트 근교에 사는 노인 423쌍의 사망률을 조사했다. 그 결과 다른 사람을 돕지 않은 노인은 친구, 친척, 이웃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많이 준 사람이나 배우자를 정성껏 돌본 노인보다 사망률이 2배가 높았다.
반면 많은 사회적 지원을 받은 노인은 지원을 받지 못한 노인과 사망률에서 큰 차이가 없었다.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은 사람 사이의 인간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으로, 건강을 유지하는 데에도 상당한 역할을 하는 게 밝혀진 것이다. 흔히 우리는 도움을 받으면 오래 살 것으로 생각하지만 오히려 도움을 주는 사람이 오래 사는 것이다. 선행을 하면 뇌가 즐거우니 오래 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경쟁과 협동이 발전의 원동력 그러나 모든 사람이 남에게 베풀기만 한다면 발전이 없다. 결국 인간의 의욕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꿈과 욕망을 채우려는 데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능사는 아니다.
요즘 많은 기업들이 사원들 간의 경쟁을 촉진하기 위해 사업본부, 인센티브 같은 제도를 도입하고 있지만 그 폐단도 많다. 다른 부서가 잘 되는 것을 막기 위해 협력을 해주지 않는 것이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부서 간 장벽을 뛰어넘는 매트릭스 체제가 도입되고 있다. 또한 숱한 정책 실패를 가져온 고질적인 부처 이기주의를 해소하기 위해 정부 내에는 위원회가 만들어져 각 부처의 정책을 조율하고 있다.
이렇듯 우리는 늘 경쟁하면서 협동 관계를 만들어 낸다. 분명한 것은 개인이 경쟁과 협력 어느 것을 택하든 사회 전체로 볼 때 손해보다 이익이 커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야 사회가 발전한다. 어떻게 하면 선의의 경쟁을 유발할 수 있을 것인지, 협력을 할 경우 이를 어떻게 보상해 줄 것인지 고민하는 건강한 보수와 건강한 진보 세력이 있을 때 한국은 살기 좋은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좌우의 날개가 아닌 경쟁과 협동의 날개로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