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해선 | 경제교육연구소 소장(www.haeseon.net)
저금리와 유동성 함정
이자율 곧 금리가 낮아지면 기업은 싼 이자로 자금을 빌릴 수 있다. 그만큼 전보다 자금을 많이 빌려 사업을 확대할 수 있다. 그러면 전체적으로 생산이 늘어난다. 금리가 낮은 자금이 시중에 풍부하면 가계 소비도 부추겨진다. 늘어나는 소비는 생산 증가와 맞물려 경기를 확대시킨다. 이 과정을 요약하면 이렇다
금리 저하와 통화량 증가 →기업 투자, 가계 소비 확대 →경기 확대
그런데 저금리가 경기를 확대시킨다고 하는 이 일련의 과정이 현실에서 반드시 공식대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금리가 낮아 자금을 얻기 쉬운 상황에서도 기업들이 투자에 의욕을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경제가 ‘유동성 함정(liquidity trap)’에 빠졌을 때 그런 일이 생긴다. 유동성 함정이란 금리가 충분히 낮은데도 경기가 좋아지지 않아 마치 함정에 빠진 것처럼 보이는 경제 상태다. 현금을 구하기도 쉽고 예금해봤자 이자도 못 버는데 투자와 생산, 소비가 요지부동 늘어나지 않는 경우다.
유동성 함정은 금리가 매우 낮을 때 생긴다. 경기도 좋아졌다가는 나빠지고 나빠졌다가는 다시 좋아지듯이 금리도 경기와 함께 올랐다 내렸다 한다. 보통 금리가 낮으면 투자가 늘어나기에 유리하다. 그런데 금리가 이미 충분히 낮다면 금리는 더 이상 투자 결정을 좌우하는 변수가 못 된다. 심지어 금리가 바닥에 와 있으니 앞으론 오르리라는 기대까지 생긴다. 만약 경기 전망이 나쁜 와중이라면 현금을 투자하거나 소비해 없애기보다는 계속 갖고 있으려는 성향이 강해진다.
이럴 때는 중앙은행이 공정금리, 콜 금리를 내리고 통화 공급을 늘려도 소용없다. 통화 공급을 늘려도 금융시장에서는 현금을 보유하려는 수요에 흡수되고 만다. 가까운 미래에 경기가 나아질 전망이 있다면 현금을 보유하려는 성향은 강하게 유지되지 못할 것이다. 경기가 좋아진다면 투자를 해야 경기가 나아지는 덕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까운 시일 내에 경기 전망을 낙관하지 못할 때는 기업들은 계속 투자를 미룬다. 금리가 낮아서 자금을 쉽게 빌릴 수 있더라도 마찬가지다. 가계는 가계대로 벌이가 한동안 나아지지 않을 테니 소비를 늘리지 않고 저축한다.
결국 중앙은행이 금리를 내려 경기를 부양하려 해도 투자와 소비가 늘어나는 효과는 나타나지 않는다. 금리를 내리면 경기가 좋아져야 정상인데 아무리 금리를 내려도 소비와 투자가 살아나지 않아 경기는 마치 함정에 빠진 듯한 상태가 된다. 경제가 유동성 함정에 빠지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전형적인 것은 경제 주체들이 미래 경기가 지금보다 좋지 않으리라고 예상하는 경우다. 장차 경기가 상당 기간 더 나빠진다고 생각하면 소비자나 생산자나 소비와 생산에 적극 돈을 쓰지 않는다. 그러면 경기는 실제로 더 나빠진다.
경제적인 이유가 아닌 다른 이유로 기업이 투자를 꺼릴 수도 있다. 기업에게는 일정 기간 사업이 순조롭게 지속될 수 있으리라는 전망이 서야 투자가 가능하다. 그런데 가령 국내 정치 상황이 불안해 사업상 불리한 급격한 개혁조치 같은 것이 떨어질지도 모른다고 하자. 불안해하는 기업들은 돈이 많아도 투자를 꺼릴 게 당연하다.
유동성 함정에 빠진 우리 경제
우리나라 경제도 지금 유동성 함정에 빠진 상태로 생각된다. 최근 한국은행이 금리를 계속 내렸고 또 계속 저금리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나 기업의 투자는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 2004년 상반기까지 10%를 웃돌던 예금은행의 대출 증가율이 2004년 하반기 이후 5% 안팎으로 줄었고, 2003년 3/4분기에 11.7%의 증가세를 보였던 기업 시설자금 대출은 올해 1/4분기에 1%대로 떨어졌다.
반면 시중 부동자금(浮動資金)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만기 6개월 이내로 금융권을 떠도는 시중 부동자금은 올해 1/4분기 말 현재 414조 5천억 원. 그나마 전년도 같은 기간 대비 4%대로 증가하던 이 자금이 2004년 하반기를 넘겨서는 5~6%로 증가 속도가 빨라졌다. 물론 이 자금은 실물경제 곧 기업이 주도하는 생산적 투자로 흘러들지 않고 있다.
기업들이 투자를 안 하는 가장 큰 이유는 금명간 경기 회복이 어려워 보여서다. 하지만 기업들 가운데는 불황 속에서도 미래의 호황을 대비한 투자를 하는 곳이 늘 있게 마련이다. 특히 자금 사정이 좋고 지금도 수출이 잘 되어 실적이 괜찮은 대기업은 상대적으로 투자의욕이 높다. 그러나 국내 기업들의 투자의욕은 단기적으로 여러 경우에서 정부 규제에 부딪쳐 있다. 주로 수도권 집중 억제와 국토의 균형개발, 환경 문제 등이 이유다. 그렇다면 생산적 부문으로 흘러갈 이유를 찾지 못하는 자금이 갈 곳은 재테크 쪽이다.
주식·부동산으로 몰리는 투자
금리는 재테크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금리가 높거나 장차 높아지리라고 예상될 때는 금융기관에서 판매하는 예금상품이 인기를 끈다. 반대로 금리가 낮거나 떨어지는 추세일 때는 예금해봤자 별로 이자를 못 받기 때문에 다른 투자 수단을 찾는다. 대안은 주로 주식이나 부동산이다.
저금리 때는 기업도 여유자금 재테크에 나선다. 금리가 낮을 때는 돈을 빌려서라도 투자를 늘리는 게 정상이지만 그것도 경기가 좋거나 좋아질 전망이 있을 때 얘기다. 장차 경기가 나쁘다면 투자해봤자 손해 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가계와 기업의 여윳돈이 주식, 부동산으로 몰리면 전체 경기가 좋지 않은 와중에도 주식, 부동산 시세가 뛰는 수가 있다.
주식이나 부동산이나 경기가 좋을 때 투자가 몰리는 게 정상이다. 다만 주식은 경기가 나쁠 때라도 장차 경기가 좋아진다는 전망만으로 수요가 몰려 시세가 뛰기 쉽다. 그런 만큼 경기 전망이 흐리면 즉시 시세가 침체하기도 한다. 부동산보다는 미래 경기 전망에 따라 투자 수요와 시세가 민감하게 움직인다.
2001~2003년 우리나라에서는 경기가 위축된 가운데 시중 여유자금이 주식과 부동산으로 몰려 비상한 재테크 열풍이 불었다. 2001년 초반을 전후로 우리 경제는 해외 경기 침체로 수출이 부진해 경기가 침체한 상태였다. 한국은행은 기업들이 사업자금을 쉽게 마련해 투자를 늘릴 수 있도록 금리를 낮게 유지하는 정책을 지속했다. 그러다 하반기 들어서자 미국 등 선진국 수출시장 경기가 살아나리라는 전망이 나타났다. 그러자 2001년 말부터 2002년 봄까지 주식으로 투자가 몰렸다. 곧 경기가 회복되리라는 기대심리와 저금리 상황을 업고 수요가 몰린 것이다. 당시 주식은 시세가 몇 달 사이 두 배로 뛰었다. 그러나 해외 경기 회복은 예상보다 늦어졌다. 그러자 수출과 국내 경기 회복도 늦어지리라는 예상이 우세해졌고 주가는 도로 주저앉았다. 이후 주가는 2003년 초 반짝 좋아지는 듯 했던 것을 제외하면 내내 부진을 면치 못했다.
부동산은 2002년 봄 주식 시세가 고개를 숙일 무렵부터 불이 붙었다. 2001~2002년에 정부는 1980년대 말 부동산 시세가 폭등했을 때 도입한 각종 규제를 풀어 아파트 등 부동산 투자를 부추기는 정책을 썼다. 새로 분양하는 아파트의 분양권을 당첨 즉시 전매하지 못하게 했던 규제를 푼 것이 대표적인 조치다. 이로부터 신규 분양 아파트의 프리미엄을 노린 투기가 창궐했다. 새 아파트 프리미엄을 노린 투기가 일자 기존 아파트 가격도 따라서 폭등했다. 집값이 뛰는 걸 보자 가계는 다투어 은행 등에 집을 잡혀 빚을 내서는 주택 매매에 동참했다. 은행들이 집값의 90%까지 담보로 인정해가며 위험한 대출 경쟁을 벌이고, 신용카드회사가 무모할 정도로 신용카드를 남발하면서 신용대출을 마구 늘렸다. 하지만 정부 금융감독기구는 금융 감독을 관대하게 했다.
부동산 투기를 부추긴 정부 정책
이런 현상을 보면서 일각에서는, 정부가 부동산 투기의 부작용이 있더라도 부동산 경기를 살려 국내 경기를 띄우자는 의도를 갖고 있다는 비판을 제기하기도 했다. 해외 경기가 되살아나 수출이 늘 때까지 국내수요를 부추겨 경기를 붙들어보려는 궁여지책을 쓰고 있다는 분석이었다.
결과적으로 경기는 나쁜데 시중 자금은 흘러넘치는 상황이 빚어졌다. 자금은 넘치는데 경기가 나빠 투자할 곳은 마땅찮은 가운데 부동산 투기 규제가 풀리자 넘치는 자금이 흘러갈 곳은 부동산밖에 없었다. 은행 등이 대출에 열을 올린 결과 2001년과 2002년 가계의 부채 증가율은 전년 대비 30% 이상 급증했다. 가계대출은 2001~2002년 1년간 새로 67조원이 늘었다. 그 중 50~60%에 해당하는 40조원 정도가 2002년 봄부터 맹렬한 기세로 아파트 등 부동산시장으로 몰려 부동산 가격을 폭등시켰다. 투기가 심했던 서울 강남과 수도권 일대 인기지역에서는 집값이 불과 한 두해 사이에 두, 세배로 뛰었다. 서울, 수도권과 지방의 땅 값, 집값은 그만큼 크게 벌어졌다.
부동산의 투기 열풍과 시세 폭등은 2003년에도 가속됐고, 시간이 흐르면서 경기 부양 효과보다는 부동산 값 폭등이 서민의 생활고를 가중시키는 효과가 더 부각되었다. 국민들 사이에는 부동산 시세 폭등을 막지 못하는 정부와 여당에 대한 불만이 고조됐다.
2년간 이어진 부동산 투기 열풍은 2004년 들어 안정세로 돌아서는 듯했다. 2003년 10월 말 정부가 비교적 강력한 부동산 투기억제대책을 내놓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 시기엔 이미 투기 자금이 에너지를 분출할 대로 분출하고 단기적으로 스스로 잦아드는 단계에 이르고 있었다. 가계도 이미 이전의 투자에 소요된 빚 부담에 짓눌리고 있었다. 이 시기의 부동산 가격 폭등은 저금리 상황 아래 넘치는 자금이 생산 활동으로 흘러가지 않아도 되게 하고, 가계를 빚 부담에 눌리게 해 소비를 부진하게 함으로써 그렇지 않아도 부진한 국내 경기를 한층 내리눌렀다. 그 탓에 2004년엔 해외 경기가 살아나 수출이 잘 됐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경기는 내내 내리막길을 걸어야 했다.
결국 국민의 불신만 높아져
그보다도 우리 국민경제가 입은 더 큰 타격은, 정부가 부동산 투자를 부추겨 경기를 띄워보려 한 데 따라 가계가 정부의 경제정책을 불신하게 된 점이다. 가계는 적어도 부동산에 관해서는 정부가 표명하는 정책의지를 깊이 의심하게 됐다. 가계는 2000년대 전반기의 경제 학습을 통해, 언제 또 부동산 시세가 폭등할지 몰라 불안해하는 한편 여차하면 부동산 투기에 끼어들어야 뒤처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강박관념처럼 갖게 됐다.
시장이 정부의 정책의지를 불신하게 됨에 따라 부동산 시장은 한층 자기논리를 고집하는 체질이 강해졌다. 그만큼 정부 정책은 시장에 제대로 먹혀들기 어렵게 됐고, 시장은 전보다 더 큰 부동산 투기 의욕을 갖게 됐다.
저금리와 시중 부동자금이 흘러넘치는 상황에서는 정부가 부동산 경기 부양을 경기부양 수단으로 써먹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는 한, 가계도 부동산 시세 폭등에 따른 불안이나 투자수익 기대를 갖는 것이 당연하다. 저금리 정책에 대한 일대 수정이 필요한 시기이지만 막상 정부는 사태를 그리 심각하게 보지 않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