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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짝 핀 동서양의 고전 문명, 그리고 혼란

인도는 종교적으로, 중국은 정치적으로 두 동양 문명권이 재편되는 동안, 고전 고대시대를 상징하는 그리스의 사상과 문화는 거의 모든 분야의 원조로서 많은 유산을 서양세계에 남겼다. 그리고 그들의 사상과 문화는 고스란히 그들을 정복했던 로마로 옮겨져서 그리스-로마가 한데 묶여지는 그레코-로망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주요 키워드가 되었다.

박경민 | 역사 칼럼니스트 cafe.daum.net/parque


최초의 종교개혁과 불교
기원전 15세기 무렵 인도에 침입한 중앙 아시아의 아리안 족은 기원전 5세기경에 브라만교를 완성시켰다. 원시 브라만교가 자연숭배적 다신교에서 점차 인간문제로 종교적 관점이 옮겨짐에 따라서 신들의 성격도 달라지게 되었으며 형식적인 종교의식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개혁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왜냐하면 카스트 제도의 최상위 그룹에 있었던 브라만 계급이 지식을 거의 독점하고 자신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 일부러 종교의식을 복잡하게 함으로써 종교를 민중으로부터 멀게 하는 형식주의로 빠져들었기 때문이었다.

점차 브라만교의 종교적 권위가 무너지면서 인도에서는 종교개편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바로 불교와 자이나교의 등장과 브라만교에서 힌두교로 변화되는 3대 종파운동으로 나타났다. 석가가 활동했던 시기가 기원전 5세기 전후니까 중국에서는 공자, 그리스에서는 소크라테스가 활약하여 세계는 이미 철학의 융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석가가 태어난 인도는 당시 문명 선진국(인더스문명)이었으므로 고대인도 철학사상이 당시의 브라만교에서 무르익고 있었던 것이다.

석가는 깨달음을 얻고 설법에 나서 출가한 수도승을 모아 불교를 창시하였다. 그의 가르침은 카스트 제도의 부정에서 출발하였다. 따라서 불교도들은 베다의 가르침이나 종교적 계급을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불교의 승려는 브라만교와는 달리 모든 계급에서 나왔다(그러나 실제로는 상위 세 계급의 승려가 인정되고 있다). 그 대신 승려들은 각지를 돌아다니며 걸식생활을 해야 했는데, 특히 다른 사람이 버린 폐품을 이용하려고 노력했고 식물에서 의학적 효력을 발견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였다.

최상위의 승려는 보통 귀족과 학문을 대하는 사람으로서 그들은 중요한 사원에서 부양되며 이러한 사원의 대부분은 군주들로부터 충분한 기부금을 받았다. 석가시대 이후 몇 세기 동안은 불교도 브라만교 취급을 받았던 것 같다. 마치 그리스도교도 초기 얼마 동안은 유대교의 일파로 취급되었듯이 말이다. 기원전 3세기 무렵부터 불교는 국가의 보호를 받으면서 인도에서 융성했으나 교단이 커지자 잇달아 분열이 일어났다. 기원 전후에는 '소승(小乘)'과 '대승(大乘)'이라는 양대 세력으로 나뉘어지는 커다란 고비를 맞이하였다.

석가시대의 불교를 '원시불교(근본 불교시대)'라고 하는데 석가의 입적 후 100년이 지나자 교단이 보수파(상좌부)와 개혁파(대중부)로 분열하였다. 그 후 기원전 3세기에 상좌부가 다시 11개, 대중부(大衆部)는 9개의 파로 나뉘어 도합 20부파의 불교가 성립되었다. 한편, 니간타 나타푸타에 의해서 창시된 자이나교 역시 브라만교의 개혁에서 출발하였다. 자이나교 역시 힌두교(브라만교의 탈바꿈)와 불교와 마찬가지로 '업(業)'에 따른 윤회사상을 가지고 있는데 업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 고행과 엄격한 계율준수를 강조하고 있다.

브라만교에서 힌두교로
브라만교와 힌두교를 구별하는 것은 어찌 보면 무의미할 수도 있다. 브라만교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불교가 융성하였을 때에는 브라만교가 쇠퇴하였고, 불교가 쇠퇴하자 힌두교가 종교적 패권을 장악한 사실을 본다면, 옛날의 브라만교가 부흥하여 힌두교라는 새로운 간판을 달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지 모른다. 인도를 불교의 발상지라고는 하지만, 인도에서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종교는 힌두교이다. 인도국민의 80% 이상이 믿고 있는 민족종교이다. 브라만교를 기초로 하여 인도의 민간신앙과 전승이 혼합되어 힌두교로 발전하였다.

인도사람들은 다신(多神)을 숭배하는 종교적인 민족이며 종교를 배제하고 인도를 논할 수 없다. 브라만교 시대에 완성한 '베다'와 '우파니샤드'가 힌두교의 경전이며 대중들의 신앙과 주술 등을 받아들여 다양한 교의와 의식으로 발전하게 되어 브라만과 시바·비슈누·크리슈나를 중심으로 하는 다신교를 형성하였다.

카스트 제도를 부정하고 평등사회를 구현한 불교와 자이나교도 이러한 힌두교의 기본적인 골격을 바꿀 수 없었다. 힌두교를 전체적으로 본다면 우파니샤드[奧義書]와 같은 고도의 철학적 요소에서부터 요가수행법과 민간차원의 주물숭배, 조상숭배, 우상숭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힌두교는 교리상 유연성이 있기 때문에 타종교의 사상을 배격하지 않고 수용함으로써 힌두교의 신관(神觀)에는 복합적 요소가 내재되어 있다.

정치적 혼란에 빠진 중국
주나라 왕실의 쇠퇴하자 중국은 기원전 8세기부터 3세기 동안 '춘추오패'와 '전국칠웅'이 중국대륙의 패권을 다투는 군웅할거시대를 맞이하여 전란을 겪게 되었다. 바로 이 혼란의 시기에 중국은 ‘제자백가(諸子百家)’라고 하는 사상의 융성기를 맞이하였는데, 이때 그리스에서도 고전철학의 중흥기를 보내고 있었다.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새로이 중원의 주인이 된 주나라는 통치상의 이유로 봉건제도를 도입하여 주 왕실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정치질서를 만들었다. 이러한 주나라의 봉건제도는 천하를 다스리는 천자(天子)로서의 주나라 임금과 천자의 나라를 상국의 예로써 섬겨야 하는 제후로 이루어지는 종법질서를 확립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중화사상(中華思想)이다. 다시 말해서 주나라 왕실을 받들고 오랑캐를 물리친다고 하는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중국의 전통적 사상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약 250여 년이 지나자 제후국들의 세력이 강해진 반면, 주나라 왕실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주나라 중기가 지나자 변방 민족들이 중원을 넘보면서 쳐들어오기 시작하더니 기원전 770년, 주나라 제12대 유왕(幽王)이 전사하고 호경이 함락되었다. 유왕이 전사하자 제후들은 망하기 일보 직전인 주나라의 새 군주로 평왕을 세우고 낙읍(洛邑, 洛陽)으로 천도하였다. 바로 이 낙읍 천도를 기준으로 이전을 '서주(西周)'라 하고 이후를 '동주(東周)'라고 한다.

아무리 새 왕에게 제후들이 충성을 맹세했다고 하지만 주 왕실의 권위는 이미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왕권은 더 이상 떨어질 수 없는 바닥으로 치닫게 되었고 그에 비례하여 춘추·전국시대로의 진입속도가 빨라졌다. 이로써 주나라의 왕은 허수아비에 불과하고 실력이 있는 각지의 제후들이 천하의 패권을 다투는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역사에서 말하는 춘추·전국시대는 '주나라의 동천'에서 시작하여 진나라의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하기까지 약 550년 간을 일컫는 말이다.

서양사상의 원조, 그리스 철학
흔히 그리스 철학을 '과학하는 마음'이라 표현한다. 그러나 맨 처음 고대 그리스인들은 모든 사물의 이치를 신화로 풀려고 했지만 서서히 제동이 걸리기 시작하였다. 과학에 바탕을 둔 자연철학이 기원전 6세기 무렵부터 이오니아 지방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자연철학은 우주와 인간의 탄생이란 대명제를 헤브라이즘처럼 천지창조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론적으로 풀어나간다. 그래서 그리스 철학을 '과학하는 마음'이라 표현하며 그리스 철학은 자연 철학기 → 소피스트 학파의 시기 → 고전 철학기라는 세 단계로 발전하였다.

전문 처세·웅변학원과 소피스트
소피스트가 등장하였다는 것은 철학적 관심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인데, 그리스의 민주정치가 정착되어 가던 기원전 5세기 무렵에 웅변과 변론, 수사학을 가르치는 전문적인 직업교사가 등장하였다. 이는 '자연에서 인간'으로 철학의 관심이 옮겨졌음을 뜻한다.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그리스인들, 특히 아테네인들은 델로스 동맹의 맹주로서 최대의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었으며, 여러 분야에서 최고의 절정기를 맞이하여 인간 중심적 사고방식이 널리 퍼져 있었으며, 일반 시민들 사이에 배움의 욕구가 생겨나 지적 수요를 충족시킬 지식의 공급자로서 소피스트가 등장했다.

그러나 소피스트들은 청소년들에게 전반적 계몽과 교양을 통한 진리 자체보다는 임기응변적 처세술을 가르쳤다. 입만 야무진 사람들을 양성했다는 비판적인 시각에도 불구하고 훗날 로마의 정치가이며 웅변가였던 키케로(Cicero, Marcus Tullius : BC106∼45년)가 말한 것처럼 소피스트들의 공로는 부정할 수 없다. 즉 철학을 하늘로부터 땅으로 끌어내려 놓아 철학 대중화에 기여했던 것이다. 그러나 기원전 5세기말부터 소피스트의 교육은 '궤변'으로 전락하였고, 민주정치가 후퇴하자 시민 여론을 선동하는 '데마고그(demagogue)'를 낳음으로써 '중우정치'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렇게 그리스 민주정치가 추락하고 있을 때, 아테네에 대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등장하여 '너 자신을 알라'는 표제를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 내걸고 '선량에 의한 과두정치'와 '이상적인 철인정치(哲人政治)'를 주장하고 나섰으나 그는 소피스트의 농간에 빠져 독배를 마셨다. 그러나 그의 위대한 제자인 플라톤과 또 그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대로 이어지면서 그리스의 고전철학은 탐스러운 열매를 맺었다.

그리스를 계승·완성한 로마
그리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즉 폴리스간의 세력다툼 때문에 같이 망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기원전 4세기 이후부터 급속히 쇠퇴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리스 문화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3세에 의한 정복사업에 의해서 인도 북부까지 침투하였으며 헬레니즘 시대를 열었다. 이탈리아 반도에서 팽창한 로마는 지중해를 내해(內海)로 삼고 지중해 세계를 통합하였다. 그러나 유구한 그리스의 문화유산을 고스란히 계승하였고 그리스는 문화적으로 정복자 로마를 정복하고 말았다. 그래서 언제나 그리스 다음에 로마가 따라 붙었으며 서 로마제국이 멸망한 다음에도 비잔틴 제국이 그리스적 요소를 지켜 나갔을 뿐만 아니라, 대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체계화한 학문은 아라비아 등지에서도 연구될 정도였다.

역사기술도 그리스에서 비롯되었고 그것은 그 후 역사학 발달에 크게 기여하였다. 역사학의 아버지라 일컬어지고 있는 헤로도토스는 이미 기원전 5세기경에 일어났던 페르시아 전쟁에 관하여 그의 ≪역사≫에 기술해 놓았다. 비록 헤로도토스의 ≪역사≫가 문학적 설화의 범위에 머물러 있었지만 투키디데스(Thukydides : BC460?∼400?)는 사료에 대한 객관적인 주의와 검토를 통해서 역사적 사실을 초자연적 그것과 구별하였다. 그의 역사서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는 아테네적 정서에서 탈피하여 객관성을 가지고 기술하였으며 과거의 어떤 사실에서 교훈을 얻고자 하는 소위 '교훈적 역사'를 서술하였다.

필자가 너무 그리스에 대해서 장황하게 이야기했으나 그것은 그들의 역사적 역동성 때문이니 어쩔 수 없다. 끝으로 그리스의 문화와 예술은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 시대에 다시 깨어나 그리스도교 문화가 지배적이었던 유럽에서 다시 소생하였기 때문에 서구에서는 그리스·로마 문화를 통틀어서 '고전 고대'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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