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 | 생태사진가
주로 가파른 암벽지대에 서식
체감온도가 영하 30도를 밑도는 강원도 고성군 건봉산 산마루. 이곳은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DMZ가 인접한 민통선의 최북단으로 해발 1000~1500m의 가파른 암벽지대이다. 산양(천연기념물 217호)은 인간이나 또 다른 포식자가 접근할 수 없는 이런 곳에 서식한다. 눈이 쌓이고 영하 15도를 밑도는 추위가 계속되면 산양들은 먹이를 찾아 DMZ의 철책선 근처로 이동하여 주로 건봉산 오소동계곡이나 고진동계곡에서 월동한다. 1960년대 초만 해도 강원도 설악산이며 오대산, 태백산 등지에 수천 마리가 넘는 산양들이 서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1964~65년에 대폭설이 내려 굶주린 산양들이 먹이를 찾아 민가로 내려왔다가, 그 어렵던 시절에 몽매한 주민들에 의해 무참하게 포획되었다. 그 후 1968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국가에서 보호하고 있지만, 강원도 고성과 양구의 DMZ와 민통선에서 얼마 안 되는 개체수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밖에 설악산과 오대산 등지에도 몇몇 마리가 생존해 있는 등, 남한에 살고 있는 총 개체 수는 200마리를 넘지 못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예민한 탓에 사진 찍기 어려워
농가의 흑염소와 비슷하게 생긴 산양은 어미의 몸길이가 110㎝ 안팎이고 키는 55~70㎝, 몸무게 35kg 가량이며 암수 모두 10~23㎝ 정도의 검은 뿔이 나 있다. 사슴과 달리 뿔이 빠지지 않고 평생 자라기 때문에, 산양의 나이를 이 뿔의 크기로 가늠하기도 한다. 맹수를 피해 기암절벽에 살도록 진화된 초식성 산양은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충격을 완화할 수 있는 굵은 다리와 바위에서 미끄러지지 않는 스펀지처럼 탄력성 있는 발바닥을 가졌다. 게다가 적갈색의 보호색을 띠고 있어서 멀리서 보면 마치 바위 같아, 눈밭이 아니면 육안으로 식별이 어렵다.
금강산 가는 길목인 이곳 건봉산에는 '건봉사'라는 유서 깊은 사찰이 있다.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의병들을 훈련시켰던 곳이고, 한국전쟁 때는 남북의 군인들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건봉사는 민통선 안 군작전지역에 포함되어 있었으나, 민통선이 좁혀지면서 지금은 누구나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다.
건봉사를 옆에 끼고 가파른 산악길을 지프차로 2시간이 넘게 올라가면 건봉산 꼭대기에 커다란 부대가 있다. 산양을 보려면 이 부대보다 더 북쪽인 오소동계곡으로 내려가야 한다. 낮이 짧은 겨울의 산간계곡인지라 오후 4시가 되니 어느새 짙은 그림자가 드리운다. 그래도 산등성이는 백설이 반사되어 아직도 대낮처럼 훤하다. 운이 좋으면 이곳에 가는 길목에서 몇 마리의 산양을 목격할 수 있다. 산등성이 보다 약간 밑쪽을 주시하면 검은 바위같이 생긴 것들이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다. 몸을 감추고 숨을 죽이면 이들이 꽤 가까이 접근하기도 하지만 카메라 셔터 소리에 놀라 후다닥 달아 날 때가 많다.
군인들의 도움 받는 야생산양
오소동계곡에 다다르자, 산양 가족 일곱 마리가 떨어지는 해님을 아쉬워하며 부지런히 주린 배를 채우고 있었다. 필자의 카메라 셔터 소리에 간간이 고개를 들어 초소 쪽을 뚫어져라 쳐다보지만 온통 눈으로 도배한 산속에서 파란 먹잇감을 횡재한 녀석들은 두려움도 잠시 잊고 열심히 먹이를 먹는다. 이곳 군인들이 굶주림에 시달리는 야생동물을 보살피기 위해 이따금씩 파란 배추를 갖다 놓아주기 때문이다. 물론 야생동물에게 인위적으로 먹이를 주는 것이 권장할 만한가는 학술적으로 좀 더 검토해 보아야겠지만, 멸종위기에 놓인 산양을 한 마리라도 더 보호하고 싶은 마음이 계곡의 얼음장을 녹이듯 훈훈하다.
산 너머 바로 북한군이 주둔하고 있는 이곳은 야생상태의 산양을 볼 수 있는 세계유일의 명소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일반인들은 이곳에 갈 수 없다. DMZ와 바로 붙어있는 곳이고 겨우내 눈이 쌓인 험로이기 때문에 특별한 허가를 받지 않는 한 출입이 통제된다. 산양을 보고 싶다면 용인 에버랜드나 과천 서울대공원을 찾으면 손쉽게 볼 수 있다.
산양 보호에 앞장서는 '산사모'
그러나 강원도 양구군 동면 월운리에 좀 특별한 곳이 있다. 1996년 '산사모(산양을 사랑하는 모임)' 회장인 정창수씨가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1만 여 평의 야산에 산양 증식장을 세우고 멸종위기의 산양을 증식시키고 있다. 이곳에는 7마리의 산양이 자연 상태와 비슷하게 살고 있다. 정씨와 150여명의 산사모 회원들은 겨울철이면 산양보호에도 촉각을 세운다. 눈이 쌓여 먹을 것을 찾지 못하는 산양들이 민가 주위로 내려와 밀렵되거나 교통사고로 죽는 사고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산사모 회원들의 노력으로 양구일원에서 산양의 소중한 가치를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외지에서 잠입하는 전문밀렵꾼들을 감시하는 일은 조금도 등한시 할 수 없다. 간혹 부상당하거나 굶주림에 쓰러진 산양이 발견되면 즉시 현장으로 달려가는 비상대기조가 항상 운영되고 있다. 산사모와 같이 지역에서 요란하지 않고 조용히 활동하고 있는 NGO들이 늘어간다면 조만간 백두대간 곳곳에 산양들이 안정된 개체수로 늘어갈 것이다.
*DMZ에 서식하는 산양의 모습! 새교육 2월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