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는 로마다운 정신을 잃어버린 채, '오현제 시대'를 끝으로 쇠락의 길로 빠져든다. 한편 로마제국의 탄압 속에서 메시아를 기대하던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나타난다. 그러나 예수는 유대인만의 종교에서 벗어난 보편적인 그리스도교를 창시하고, 이에 실망한 사람들에 의해 처형된다. 예수의 죽음 이후 그리스도교는 로마제국의 황제숭배사상에 맞서 300여 년간 박해를 받지만, 보편적인 종교로 인정받아 결국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로마의 국교가 된다.
아우구스투스의 사후, 로마는 서서히 몰락을 향하여 돌진하고 있었다. 제국은 이미 로마다움을 상실한지 오래였으며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티투스가 제위에 오른 그 해에 폼페이를 매몰시킨 베수비우스 화산이 폭발하는가 하면, 이듬해에는 역병이 돌고 로마에 대화재가 발생하였다.
로마다운 정신 잃고 분열의 길로 나라가 망하려면 여러 징조가 나타난다. 민심의 이반이 첫째요, 둘째는 내우외환(內憂外患)이다. 특히 티투스는 자연재해 발생으로 이재민 구호에 정신이 없어 황제 노릇을 어떻게 했는지 정신을 차리지 못할 지경이었으나 현재 로마 시에 있는 원형경기장 콜로세움을 완성시켰다. 그의 동생인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Titus Flavius : AD 81~96)는 엄격한 입법과 행정으로 국가의 기강을 바로 잡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황제의 신성(神性)을 강조하여 황제숭배를 거부하는 그리스도교를 무자비하게 탄압하여 측근의 배반으로 암살을 당함으로써 다음 황제인 네르바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까지의 오현제(五賢帝)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오현제 가운데 마지막 황제이며 《명상록》으로 유명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AD 161~180)치세 말기부터 제국에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한나라의 무제가 흉노족를 치자, 민족 이동의 '도미노 현상'이 벌어져서 그 가운데 흉노족에게 밀린 게르만족이 로마제국 영토 내로 들어오기 시작하더니 변방 수비군에 차츰 게르만 용병이 채워지게 되었다. 게다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죽고 암살당한 그의 아들 콤모두스를 거쳐 로마제국은 한동안 심각한 무정부 상태가 지속되어 군인들에게 의해서 황제의 선출과 폐위가 거듭되는 '병영황제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약 50년 사이에 26명이나 되는 황제가 폐위되어 중앙권력의 약화가 가속화되었다. 병영황제시대의 혼란은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Gaius Aurelius Varelius : AD 284~305)의 즉위로 일단락되었으나 이미 제국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지 오래였다. 그는 과감한 정책을 통해서 정치와 경제, 국경경비에 주력하는 한편, 원로원의 기능을 대폭 축소시켜서 로마 시 의회 정도로 만들어 버리고 태양신을 자칭하는 등 황제권을 강화하였다.
로마제국의 붕괴를 초래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1세가 전제 군주제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신분제를 강화한다는 것이 직업선택의 자유를 제한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전통적으로 로마의 힘이 되었던 시민의 자유가 상실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로마다운' 정신을 잃었다는 뜻이다. 더욱이 황제가 제국의 수도를 자신의 이름을 딴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함으로써 나중에 제국의 동·서 분열로 이어지게 되었다. 한편 거대해진 로마제국은 공룡들이 많은 먹이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제국 관리를 위한 유지비가 많이 들어가게 되었고 도시에 중과세를 부과할 수밖에 없었다. 물건을 많이 팔면 팔수록 세금을 많이 거두어 가는데 누가 열심히 장사를 하겠는가! 자연히 상업의 쇠퇴를 가져왔으며 로마 제정시대가 열리고 정복사업이 중단되자, 일할 노예공급이 딸리게 되어 노예노동이 주가 되는 산업은 자연적으로 쇠퇴하였다.
제국의 탄압 속에서 탄생한 예수 로마의 정신적 유산인 그리스도교는 로마의 멸망 이후에도 유럽의 전통을 계승 유지하게 되었다. 원래 오리엔트에서 시작된 그리스도교는 현실주의적 가치관과 사고방식, 도덕적 질서를 거부한 나머지 로마제국의 정치구조와 충돌하였으나 결국 종교성, 다시 말해서 순수성과 세계성은 로마사회에서 강인한 생명력을 얻게 되었다. 물론 예수가 창시한 그리스도교는 그 뿌리를 유대교에 두고 있다. 때문에 두 종교는 많은 점에서 같지만 또 여러 면에서 다르다.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의 경전인 구약성서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기록인 신약성서를 경전으로 삼고 있으며 유대교의 배타적 구원관과는 달리, 구원의 전면개방과 국제화와 세계화를 표방하였다.
예수 탄생 이전의 약 250년 동안 유대민족은 거의 기적적으로 페르시아의 지배 하에서 벗어나 70여 년 동안 유다 마카베오와 그 후계자들이 독립정부를 유지하면서 그리스계 왕인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의 탄압에 항거하여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유대인의 결속을 다지고 있었다. 그 후 로마가 헬레니즘 국가를 정복하고 계속 세력을 확장하자 유대인들은 필사적인 저항으로 맞섰지만 결국 폼페이우스의 로마군단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특히 아우구스투스는 무자비한 진압을 통해서 3만여 명에 이르는 유대인들을 노예로 만들고 시리아 총독의 위임통치를 받는 2급 속주로 전락시켜 버렸는데, 이러한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민중들 사이에서는 영웅탄생(메시아)에 대한 열망이 고조되고 있었다.
신약성서에 따르면 예수는 베들레헴이라는 마을의 마구간에서 태어났으며 팔레스타인 갈릴레아 지방 나자렛에서 30여 년을 지내다가 요르단 강에서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고 본격적으로 복음전파 활동에 나섰다. 서기 30년경 예수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였다. 이스라엘 민중들은 예수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재건하려는 꿈에 부풀어 호산나를 외치며 열광적인 환영을 하였다. 하지만 예수는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늘나라 건설에 주된 목적이 있다면서 물리적 혁명을 거부하였다,
마테오 복음에 따르면, 예수는 구약의 모든 약속을 실현하는 메시아(장차 올 왕으로서의 구세주)였지만 당대 사람들은 자신들을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해방자'로서 국수주의적 왕만을 기대하고 예수에게 실망한 나머지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외쳐댔다. 결국 예수는 신성모독 및 군중선동 등의 죄목으로 십자가형에 처해졌는데, 십자가에는 'INRI'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INRI란 라틴어로 'Iesus Nazarenus, Rex Iudaeorum' 즉 유대인의 왕, 나자렛의 예수를 나타낸 말이다. 결론적으로 예수의 등장은 로마와 그리스 지역에서 숭배되고 있었던 종교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었다(결국 모두 그리스도교라는 종교의 테두리 안에 흡수되고 말았지만).
구원의 개방화로 널리 퍼진 종교 최초의 선교는 유대인들이 모여 살고 있었던 팔레스타인과 그 주변지역에 국한되어 전개되었으나 나중에 사도 바울로의 안티오키아 선교가 성공함으로써 그리스도교는 보편성을 가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크리스천 공동체를 기존의 유대교 가운데 하나의 분파와 동일시되었으나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예루살렘 교회는 중요한 위치와 역할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과격한 유대 민족주의 발생에 따른 지역적 이동과 사도 바울로에 의한 비유대인 교회의 성장으로 그리스도교와 유대교는 완전히 결별하고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되었다.
유대인의 공동체가 예루살렘 교회라면 당시 비유대인의 공동체는 안티오키아 교회였다. 특히 안티오키아는 예루살렘에 비해서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도시였고,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였으며 비유대인의 중요한 공동체로서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안티오키아 교회는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로마제국의 황제 클라디우스(Cladius, Nero Germanicus Tiberius : AD 41~54)시대에 처음으로 그리스도의 추종자란 의미로 '그리스도인(Christians)'이라 일컬어지게 됨으로써 그리스도교가 이제는 더 이상 유대교의 한 종파가 아니라, 거대한 하나의 독립된 종교 단체가 되었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조상대대의 종교를 포기하느냐 마느냐하는 아주 중요한 문제였던 것이다. 당시 대표적 사도이며 예수의 수제자 베드로와 그리스도를 이념적으로 정립한 바울로는 각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비유대인들을 소중하게 여긴 바울로의 생각은 유대교의 율법주의 멍에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중요했고, 베드로는 유대인 신도들이 국수적 유대 민족주의의 압력에 굴복하여 유대교로 되돌아갈 위험성을 우려했다. 예수에 의해서 창시된 신흥종교였던 그리스도교는 가난하고 소외받는 계층의 마음을 파고들었으며 복음화로 사회변혁을 이루려고 하였으나 이에 당황한 유대교의 탄압이 이어졌다.
로마제국은 수수방관하고 있었다. 아니, 유대교 자체의 유혈 종파싸움으로 간주하고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최초의 순교자 스테파노의 처형에 동참했던 사울(나중에 개종한 사도 바울로)의 개종으로 그리스도교는 극적인 전환기를 맞이하고, 사울의 세 번에 걸친 ‘전교여행’으로 로마와 그리스 세계로 마치 민들레 홀씨처럼 퍼져나갔다. 그리스에서는 기존 제우스-디오니소스의 신앙체계인 오르페우스교를 포기토록 하였으며 로마로 확산되어 황제숭배 사상에 정면으로 충돌하여 무려 300여 년간 박해를 받았다.
절대왕권과 충돌한 그리스도교 처음에 로마제국은 그리스도교를 박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유대교가 박해하고 처형하는 것을 보고 '같은 민족끼리 잘 들 하는 짓이다'하면서 의아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왜냐하면 로마의 종교정책은 관대하였다. 황제에 대한 숭배와 국가종교를 존중하는 이상, 제국내의 모든 종교를 다 허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로마에서 황제숭배사상과 충돌하자, 즉각 박해를 시작하였다. 체제전복 세력으로 본 것인데, 역대 황제들은 국경선도 없는 범세계적이고 초국가적인 성격의 종교가 국가를 전복시킬 것이라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2~3세기의 유능한 황제들(네르바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까지의 오현제 시대)이 로마의 종교를 토대로 하여 국가를 내적으로 견고케 하고자 시도하였을 때 그리스도교가 장애물이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구체적인 박해과정은 이야기하지 않겠다. 다만 네로 시대의 박해는 개인적인 광기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 그리고 국가적 차원에서의 박해는 도미티아누스 황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그는 유독 황제의 신성(神性)을 강조하면서 황제숭배를 거부하는 신도들을 줄줄이 묶어 처형장으로 끌고 갔다. 서기 100년부터 250년 사이에 일어난 박해는 그리스도교가 기존의 유대교와 완전히 구별되면서 위험한 종교로서 박해를 받았다.
체제전복 집단이 수호집단으로 가장 가혹한 박해를 하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은퇴한 이후, 제국을 장악한 콘스탄티누스가 312년 말경에 그리스도교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취했으며 313년 봄에 '밀라노 칙령'을 반포하여 신앙의 자유를 주었으며 서기 325년 이후 콘스탄티누스가 전 로마제국을 통치하게 되자, 그리스도교 역시 제국 안에서 보편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더욱이 서기 392년 테오도시우스 1세는 국교화를 선포하고 모든 이교적인 행사를 금지시킴으로써 체제전복 집단이 제국의 체제수호체제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제국의 보호 속에 그리스도교는 날이 갈수록 강인한 생명력을 가지게 되어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에도 새로 서양세계의 주인이 된 게르만족을 개종시켜 라틴-게르만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중세문명을 일구어내었으며 유럽인의 정신적 지주로, 서구문명의 원천으로 자리매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전 세계로 전파되어 33%라는 최대의 종교 인구를 가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