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직을 직업으로 선택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그 이유가 어떠하든 교직이라는 물에 빠졌으면 물에 빠져 있는 아이들을 구하는 것이 교사로서의 책무이다. 교권이 예전과 다르다고 해서 실망하거나 낙담해서는 안된다. 교사로서의 권리와 의무의 적절한 균형을 맞춰 스스로 자격을 갖춰야 한다. 교사 자격증을 갖고 있다고 해서 저절로 평생 자격이 유효한 것은 아니다. 힘이 들고 고통스러워도 새로운 부리와 날개로 무장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2005년 3월에 학교에 전화가 왔다. 4학년 학생의 아버지라고 한다. 전화기를 통해 들리는 목소리는 화가 머리끝까지 난 목소리였다. "학교죠? 교장 바꿔요." "제가 교장인데요." "정말 교장 맞아요?" 하면서 '아니? 교장이 남자였는데, 여자가 교장이라니?' 의아해 한다. 그래서 '3월1일자로 새로 부임했다'고 설명을 했지만 의아해 하기에 교감선생님께 전화를 바꾸어 확인을 시켰더니 좀 멀쑥해 하는 것 같았다. 교장이 바뀐 줄도 몰랐다는 사실을 미안해하는 것 같아 그럴 수 있다고 위로 하고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이가 전날 학교에서 선생님께 맞아서 등에 멍이 들었단다.
'아이들끼리 장난치다 그런 건 아닌가'하고 물으니 버럭 화를 낸다. 상황을 모르긴 해도 선생님께 맞아 멍이 들었다고 하니 일단 사과를 했다. 그리고 "왜 하루를 참으셨어요? 어제 당장 학교로 오시든지 아니면 경찰에 고발 하시지요"라고 말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아니 정말 교장 맞아요? 교장이면 선생님 행위를 변명하고 잘못을 감싸서 최소화 하는 게 정상 아닌가요?"라고 한다. "알아보면 교사의 진심이 무엇인지 알겠지만, 학부모님 자녀가 멍이 들었다면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대답을 들은 학부모는 조금은 후련해 하면서 집안 사정을 이야기를 했다.
부부가 이혼을 하려고 별거중이란다. 그런데 퇴근 하고 와보니 아이가 멍이 들은 것을 보게 되었고 학교에 화풀이 하려고 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교사들의 고충을 이해한다고 하며 전화를 끊으려 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다음에는 참지 마시고 당장 학교로 오셔서 담임께 물어 보세요. 아니면 교육부에 고발 하십시오"라고 하니 피식 웃으며 "교장 선생님 참 사람을 안정시키시고 위로 하는 방법이 탁월하십니다. 마음이 좀 후련해 졌습니다. 교장 선생님의 솔직하신 사과에 제가 졌습니다. 감사합니다"하고 민원 1호가 해결 됐다.
달라진 교실 왕국에서의 권위 필자가 초임발령을 받았을 때는 중학교 입시가 있을 때여서 아이가 멍이 좀 들었다고, 선생님이 좀 때렸다는 이유로 학부모의 민원이 들어오는 경우는 없었다. 오히려 학교에 와서 담임 선생님에게 '좀 때려 주세요. 때려서라도 바로 가르쳐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이 흔한 인사였다. 그 당시에는 목표가 좋은 중학교 입학이었고 대부분 한 교실의 학생 수가 100명이 넘고, 한 학교의 학급수가 130개가 넘는 막대한 몸집의 '맘모스 학교'였다. 또 한 집에 보통 자녀가 4명이어서 '셋만 낳아 잘 기르자'가 보건복지부의 인구정책 슬로건으로 요즘 '제발 아이를 좀 낳아주세요'와는 사뭇 다른 시대여서 4명 아이들에게 관심과 정성을 제대로 쏟지 못할 시대였으니 그럴 수도 있었다.
그때 교사의 권위는 하늘에 닿아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권위가 정말 학부모들의 존경으로부터의 나온 권위는 아니었다고 본다. 지금은 어떤가? 교사들의 학력과 학부모들의 학력이 대등하고, 아이는 한집 건너 한 아이만 키우는 집에서 왕자요 공주인 아이들이고, 사회적으로는 교원평가가 도마에 올라온 이 시점에서 교실이란 왕국에서의 권위도 옛날하고 달라졌다. 민원 1호의 마무리는 종례시간에 웃음 섞인 농담으로 마음이 무겁지는 않았지만 '교권, 교직'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반추해보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생각하게 하는 계기로 삼기로 하고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유람선을 타고 여행을 하는데 그 배 안에는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타고 있었다. 교사, 교수, 경찰, 기자, 군인, 목사…. 그런데 바람이 불어 배가 기우뚱 하면서 갑판 끝에서 경치를 구경하던 예쁜 아가씨가 물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자 사방에서 '어쩌나?' 하면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고 머리가 허연 노신사가 용감하게 물에 뛰어들어 그 아가씨를 구했다. 그러자 배안에 모든 사람들은 노신사의 행동에 박수를 보내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상황을 놓칠세라 기자가 와서 너무 용감한 행동에 대해 신문에 소개하겠다며 자세히 물으니 "솔직하게 애기하면, 본인이 뛰어들려한 것이 아니라 누군지는 모르지만 뒤에서 밀어서 할 수 없이 뛰어 들고 보니 기왕이면 아가씨라도 구해야겠다라는 생각에서 그랬다"고 솔직하게 이야기를 해 배안의 사람들이 솔직함에 더욱더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고 한다.
이런 예를 들고서는 "우리가 교직을 선택한 이유는 주위의 권유나 가장 안정된 직업이라서, 아니면 나는 아이들이 좋아서, 아니면 어려서 담임의 영향으로 꿈이 교사라서 등 다양할 것입니다. 이렇게 자의든 타의든 교직이라는 물에 빠졌으면 물에 빠져 있는 우리 아이들을 구해서 뱃전에 올려놓아야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 아닌가요? 우리는 물에 빠져있으니 아이들을 물에서 구합시다" 라는 이야기로 민원 1호를 마무리를 지었다. 필자가 처음 이야기를 시작할 때에는 선생님들이 무슨 이야기인가? 하고 웃기도 하다가 이야기를 맺으니 공감이 가는지 모두 박수를 치고는 '교권, 교직'에 대해 반추하는 모습들이었다.
권리와 의무의 균형을 맞춰야 요즘 학교 풍토가 교사들이 '편익주의'에 흐르는 것 같아 안타깝다. '뭐든지 힘들면 하지 말자', '득이 없으면 하지 말자'가 교사들의 권리를 찾는 것인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봤으면 한다.
그것이 결코 옳은 일인가? 양심에 걸릴 것이 없는가? 생각의 여지가 있다. 만일 내 안전을 위해 물에 빠져 허우적대도 우리 아이를 구하지 않고 나만 빠져 나왔다면 배 안의 사람들의 시선이 어떨까?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고, 교직을 그만두는 날 후회가 없을까? 지금 교원 평가를 해야 한다, 거부한다 등 혼란스러운데 평가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누구도 없다고 본다. 교직은 천직이라고 생각하는 교원은 이제 386세대 이외는 없을 것이다. 직업의 일종으로서의 교직을 선택하여 후회 없는 직장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권리와 의무의 균형을 잘 맞추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사회나 학부모나 아이들에게 나 스스로에게도 정말로 당당하게 두 다리의 힘으로 서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기 위한 방법으로 솔개의 일생을 예로 들어 보기로 한다. 솔개는 보통 80년을 사는데 40년간은 날카로운 부리와 발톱과 유연한 날개로 날아다니며 먹이 사냥을 하고 사는데 40년을 살고 나면 부리도 무디어지고, 발톱도 사냥하기에 부적절 하게 변하고, 날개는 기름에 절어 무거워 날 수가 없어 사냥하기에는 적당하지 못한 상태로 변한다. 그렇게 되면 솔개는 높은 산에 올라가 우선 바위에 부리를 쪼아 무뎌진 부리를 깨뜨려 뽑아버려 새로이 날카로운 부리가 나오도록 피를 흘리는 아픔을 견뎌야 하고, 그런 다음에는 날카로워진 부리로 발톱을 뽑아 새로이 날카로운 발톱을 만드는 고통을 참아내고, 날카롭게 변한 부리와 발톱으로 기름에 찌들어 무거워진 깃털을 뽑아버려 가볍고 보드라운 깃털이 나오도록 인내와 기다림으로 다시 태어나 다시 40년을 왕성한 사냥을 할 수 있는 몸으로 만든다고 한다.
우리 교원들도 지금 이처럼 혼탁한 시점에서 고통을 인내하고 기다리어 교원평가든, 사회의 질타든, 고통을 견뎌내어 새로운 부리와 발톱과 날개로 무장해야 되지 않을까? 그 길만이 신나는 교직문화가 형성되어 교사로 아니면 직업인으로의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교단에 서는 길이 될 것이다. 교권은 내가 요구한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나의 행동에 반추하여 사회로부터, 제자로부터, 학부모로부터 주어지는 것임을 우리 교원 모두가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