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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태평양의 십자로 피지

대자연의 속삭임이 들리는 피지.


낭만과 추억의 파라다이스에서


편안한 휴식을 취해보자.


박하선 | 사진작가, 여행칼럼니스트


꿈이 현실로 다가오는 낙원
아주 오래 전 일이다. 학교에서 단체로 영화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 영화의 제목이 지금 기억으로 '멀고 먼 푸른 바다(The Ocean)'이였던 것 같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아주 단순했다. 남태평양의 한 젊은 원주민이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방법으로 바다에서 살아가는 것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전개하고 있었는데, 사실 내용 면에 있어서는 별 것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영화가 지금도 내게 인상 깊게 남아 있는 것은 그 내용이 아니라 장면 장면마다에 남태평양의 꿈같은 바다가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영화를 본 후부터 줄곧 내 마음속에는 남태평양의 그 투명한 물빛과 아름다운 해변이 동경의 대상으로 자리 잡아 오게 되었다. 우리는 실로 자기 마음속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꿈이 항상 현실의 세계와는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나 또한 학창시절에 품기 시작한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잡아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먼 남쪽 바다로 날아간다.

남태평양에는 낙원처럼 느껴지는 많은 섬들이 있다. 그 중의 하나로 우리에게 이름만은 결코 낯설게 느껴지지 않은 곳이 있다. 누구든지 만나면 먼저 'Bula!(안녕)'를 외치고 상대편 또한 'Bula, Bula!'로 화답하는 남태평양의 조그마한 섬나라 '피지'가 바로 그곳이다. 그곳에는 투명한 햇살 아래 꿈같은 바다와 젊음의 낭만, 그리고 때 묻지 않은 대자연의 속삭임이 있었다. 어릴 적 동심의 세계에 꿈을 심어 주면서 말로만 들어오고 영상으로만 접해 온 그 환상의 남쪽 먼 바다. 그 보석처럼 투명한 바다를 바라보면서 오랜 꿈이 현실로 다가옴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태양과 바다의 아름다운 만남
이곳 피지는 주섬인 '비티레부'를 비롯하여 320여 개의 크고 작은 화산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면적은 우리나라의 경상남북도를 합한 정도 밖에 안 되지만 그래도 이곳 남태평양의 여러 섬나라 중에서는 제법 큰 나라다. 그래서 '남태평양의 십자로'라고 불린다. 옛날 이곳이 서양에 처음 알려질 때만 해도 식인종들이 사는 곳이라고 했지만 이젠 다시 천국에 비유하고 있다. 인구는 75만 명쯤 되는데, 원주민이 48%, 인도인이 46%, 그리고 나머지는 유럽인과 중국인이다.

인도인이 이렇게 많은 것은 영국 통치 시절에 이곳 사탕수수 재배를 위해 인도인들을 대거 이곳으로 이주시켰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인도인들은 원주민들보다 뛰어난 상술을 발휘하여 오늘날 이곳 주요 상권을 거머쥐게 되었고, 그것이 오늘날 원주민들과의 마찰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피지가 환상적으로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주변에 아기자기한 많은 섬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지의 아름다움을 만나기 위해서는 유람선을 타고 섬들을 찾아 떠나야 한다.

그 섬들은 화산 활동으로 인해 생겨났거나 아니면 오랫동안 파도에 밀려온 모래가 쌓여 이루어진 섬들이다. 그러니까 그 많은 섬들 중에는 단 두 그루의 야자수와 백사장만으로 1분 안에 전체를 돌아볼 수 있는 것에서부터 영화배우 '브룩 실즈'가 출연한 영화로 유명해진 '야샤와 제도'에 이르기까지 규모와 종류가 다양하다. 또 이러한 섬들 중에는 무인도도 있지만 대부분의 섬에는 피지 전통 양식의 '부레(숙소)'를 비롯하여 여러 리조트 시설이 되어 있기 때문에 아주 쾌적한 상태에서 남국의 바다를 즐길 수 있다.

이러한 섬들을 찾아 떠나는 유람선의 여행 또한 이곳 피지를 찾는 이들에게 결코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 준다. 찌든 문명의 굴레에서 벗어나고파 훌훌 털고 잠시 떠나온 사람들, 보다 맑은 자연의 품에 안겨 남국의 낭만을 즐기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 그리고 필자처럼 역맛살이 낀 사람들…. 그 모두가 넓고 푸른 바다 위를 유유히 흘러가는 유람선의 갑판 위에 아무렇게나 뒹굴면서 이곳에서만은 모든 것을 잊고 자연과 더불어 있고자 한다.

그러다 보니 모두가 하나가 되고 피지안들이 연주하는 악기의 소리에 맞춰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다. 악기를 연주하던 한 피지안이 어디에서 왔느냐고 내게 묻는다. '코리아'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국 가요 '사랑해'가 연주되면서 노래가 나온다. 이렇게 해서 모두가 분위기에 취한다. 그러는 가운데 남국의 뜨거운 태양은 우리를 검게 그을리게 하고, 환상의 섬은 꿈처럼 다가왔다.

편안하고 순수한 자연의 소리
이렇게 남국의 낭만을 가득 싣고 이 섬 저 섬을 오가는 유람선을 타게 되면 누구나가 한 번쯤 빼놓지 않고 들리는 곳이 있다. 그곳은 바로 리조트 아일랜즈라고 불리는 '마마누다 제도' 중 최대의 규모와 시설을 자랑하는 '마나섬'이다. 난디 바로 옆의 '라우토카'에서 유람선을 타고 이렇게 꿈같은 시간을 보내다 보니 2시간쯤 흘러서 그 마나섬에 닿았다.

이곳은 비취색 맑은 물은 말할 것도 없고, 어느 곳이나 백사장이 있는 해변에다 윈드서핑에서 스쿠버 다이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해양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또 시간이 넉넉한 사람은 야자림 속의 '부레'에서 다소 비싸기는 해도 며칠이고 머물 수도 있으며, 해변가에 마련된 뷔페 식당은 끼니때마다 손님을 불러들여 그 투명한 바다를 바라보면서 남국의 음식을 드는 것도 기분 좋은 것 중의 하나가 된다.

이렇듯 모든 면에서 불편함 없이 잘 준비된 이 마나섬이지만 그 어디를 봐도 개발 면에 있어서 자연미에 거슬리는 것을 하나도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니까 백사장에 그 촌스런 각종 음료 광고의 비치파라솔 하나 없는 것을 비롯하여, 외관상의 콘크리트 건물 하나 찾아 볼 수 없고, 너저분한 상가 같은 것도 하나도 안보이며, 시끄러운 음악 또한 전혀 들리지 않는다. 오로지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그 비취색 바다와 야자수들, 각종 해양 스포츠 도구들, 요트 그리고 사람들뿐이며, 들려오는 것이라곤 밀려오는 파도 소리와 스쳐가는 바람소리뿐이다.

현대 문명과 단절된 휴식처
사방 각지에 흩어져 있는 이러한 리조트 섬들의 유혹에서 벗어나 본 섬인 비틸레부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가다 보니 수평선 끝까지 확 트인 시원스런 바다가 계속해서 펼쳐진다. 눈앞에서 얼마간은 옅은 녹색을 띤 투명한 바닷물에 여기 저기 거뭇거뭇한 것들이 흩어져 있고, 그 너머로는 바다 색이 갑자기 짙어진다. 처음에 저 거뭇거뭇한 것들이 무엇일까 했는데 알고 보니 산호였다. 그래서 이쪽의 해변을 'coral coast'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름 그대로 '산호초 해안'인 것이다. 이 지역은 밀물 때가 되어도 바닷물의 깊이가 사람 키를 넘지 않지만 산호초가 없는 곳을 경계로 수심이 갑자기 깊어진다. 그래서 저 깊은 바다에서 밀려오는 파도들이 이 산호초에 부딪혀 끊임없이 하얗게 부서지고 있는데, 그 소리가 마치 대전차 군단이 몰려오는 듯하다.

이 'coral coast'를 따라서도 요소요소에 많은 리조트 시설들이 들어서 있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원주민 부락의 한가로운 모습과 그 리조트 시설에서 편히 쉬는 사람들만으로 고요하기만 하다. 오로지 들려오는 것은 저 멀리서 부서지는 파도 소리뿐이다. 그러고 보면 이곳 피지는 리조트 중심의 관광지다. 떠들썩한 시가지도, 고색창연한 문화 유적지도 없다. 볼거리라고는 오로지 때 묻지 않은 자연만이 있는 것이다.

한 한국인이 운영하고 있는 리조트 '탐부아 샌드'라는 곳에 들렀을 때다. 이곳은 주로 유럽인들이 많이 찾는 꽤 괜찮은 리조트인데도 불구하고 방안에 전화, 텔레비전, 냉장고 등등의 현대 문명의 이기가 아무것도 없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분의 말인즉, 그것은 주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스스로 그렇게 해주기를 원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늘 시간에 쫓기면서 살아가는 그들이 이곳에서만은 자신을 속박하는 모든 문명의 이기에서 벗어나 얼마만이라도 바깥세상과는 단절하고 편히 쉬고 싶어 한다는 얘기다.

소중한 추억만을 주는 천국
넓고 푸른 바다에서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다가 풍덩 물속으로 뛰어들고, 기이한 모양의 산호초 사이를 누비면서 형형색색의 물고기들과 친구하고, 야자수 그늘 밑에서 책을 읽다가 오수를 즐기고, 황홀한 석양빛에 취하다가 '메케'라고 하는 원주민들의 춤과 노래를 듣는다.

매일 매일 이런 시간들로만 짜인다면 문명에 길들어진 우리에겐 견디기 어려운 일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시 돌아가 치열한 경쟁 속으로 뛰어들어야 하는 자신을 생각하면 그 한 시간 한 시간이 소중한 휴식 시간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다가 그 천국의 섬을 떠나오는 길에 'Vinaka! Vinaka!(고맙습니다)'의 환송을 받으며 마음속으로 언젠가 다시 올 것을 다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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