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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과 혼란의 인도사

영국으로부터 인도가 독립할 때,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파키스탄이 인도의 힌두교에 반발하여 분리, 독립하였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지금도 종교문제와 거기서 파생되는 영토문제 등 해결해야 할 사안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21세기 인도는 핵보유국인데다가 제3세계의 맹주이며, 특히 부시 행정부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더욱 친미·친서방 정책으로 외교적 운신의 폭을 넓힘으로써 중국과 더불어 아시아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박경민 | 역사 칼럼니스트(cafe.daum.net/parque)


최초의 통일제국 마우리아 왕조
최초의 통일 왕조였던 마우리아 왕조를 비롯하여 역대 통일 왕조들은 유럽이나 중국에 비해서 군주권이 약했다. 따라서 인도는 분열 그 자체가 자연스러웠다. 정치적 여건 이외에 인도대륙의 지리적 특성, 즉 인도 남부에는 거대한 데칸고원이 자리를 잡고 있어 해안을 중심으로 많은 소국가들이 발달하였다. 인도는 북 인도와 남 인도, 그리고 데칸고원 일대의 소국가들이 흥망을 거듭하였다. 기원전 324년 찬드라굽타(Chandragupta : BC 317 ?~BC 297 ?)가 마가다 지방을 근거지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3세의 인도원정과 철수과정에서 생긴 서북 인도 일대를 정복하여 인더스 강 유역에 남아 있었던 그리스 군을 몰아내고 최초로 통일하였다.

개국자인 찬드라굽타는 서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 동쪽으로는 벵갈 만에 이르는 북 인도와 남 인도 일부로 세력을 확대하여 인도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는데, 비록 인도 남쪽 끝까지 정복하지 못했으나 2차 대전 후 파키스탄이 분리되어 나간 현재의 인도보다 더 큰 제국이었다. 찬드라굽타의 손자인 아쇼카(Ashoka:BC 268~BC 232)는 정복사업에 더욱 열을 올려 마우리아 제국의 판도를 더욱 넓혀 동인도 해안지방인 칼링가를 정복하고 인도 대륙의 대부분을 점령함으로써 인도에서 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최대의 제국을 완성시켰다. 아쇼카 왕은 불교의 옹호자로서 잘 알려져 있다. 기원전 261년 치열했던 칼링가 전투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전사한 모습으로 보고 불교에 귀의하였다고 한다.

마우리아 왕조의 전성기는 개조 찬드라굽타에서 아쇼카 왕까지로 보고 있는데, 특히 아쇼카 왕은 불교의 옹호자답게 진정한 정복이란 무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법(dharma : 佛法)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불교를 위해서 많은 사업을 추진함으로써 무자비한 '정복왕'의 이미지가 아니라, '자비로운 불자 군주'로 불교의 세계화에 큰 공헌을 하였다. 덕분에 당시 북 인도에서만 융성했던 불교가 지역 종교였던 한계를 극복하고 전국 종교로 도약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경을 넘어 널리 해외에까지 전파되어 지금은 이슬람 국가인 아프가니스탄에 불상을 비롯한 불교문화 유적지가 많이 있었으나, 아깝게도 탈레반 정권이 탱크를 동원하여 모두 파괴하고 말았다.

비록 마우리아 제국의 영토는 넓었지만 제국 전체가 황제의 지배에 있지는 않았다. 옛 마가다 왕국만 직할지로 두고 나머지 영토는 크게 넷으로 나누어 총독이 관할하였다. 애초부터 중앙집권이 취약했던 마우리아 왕조는 오래갈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기원전 232년 아쇼카 왕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쇠퇴의 길로 접어들어 마우리아 제국은 여러 개의 나라로 갈라져 멸망하고 말았다. 이는 법에 의한 통치가 계속되면서 옛 정복자로서의 패기를 상실함에 따라 군사력의 저하를 가져왔고, 더욱이 후계자들은 군주로서의 재목이 아니었다. 결국 마우리아군의 장군이었던 푸샤미트라가 왕을 시해하고 숭가(Sunga) 왕조를 세움으로써 인도인에 의한 최초의 통일왕조는 멸망하고 말았다.

주인 없는 지역의 끊임없는 혼란
이후 인도의 역사는 문자 그대로 '춘추·전국시대'이다. '존왕양이(尊王攘夷)'와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빼고는 혼란과 분열 그리고 흥망성쇠의 반복이라는 점에서 중국과 똑같다. 최초의 통일왕조였던 마우리아 왕조가 망하고 서기 4세기에 굽타 왕조가 들어설 때까지의 500여 년간 인도 판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수많은 나라가 생겨나고 사라졌다. 게다가 정치적 중심이 없는 인도에 '임자 없는 땅'이라며 아예 눌러 앉아버린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알렉산드로스의 동방원정 때에 인도 서북부에 정착한 그리스계 민족들이다. 그들은 호시탐탐 남하를 노렸고 숭가 왕조와 그 뒤를 이은 칸바 왕조가 전력을 다해 남하를 저지했으나 이미 인도의 서북부 지역은 인도인의 것이 아니었다.

이미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카 왕 시절에도 인도의 서북부에는 그리스계 민족인 박트리아(대월씨국)와 파르티아(안식국)가 발흥하고 있었는데, 특히 펀자브 지방을 지배한 박트리아의 영역은 박테리아처럼 불어나더니 나중에는 북인도 중앙까지 세력을 넓혔다. 한편 중국의 한 무제가 흉노족을 치자 민족이동의 도미노 현상이 벌어졌다. 서쪽으로 밀려난 흉노족이 이 지역에 자리를 잡고 살던 대월씨족을 밀어내니 대월씨족은 아프가니스탄 지역의 이란계 유목민족인 토하라(Tokhara) 족을 밀어내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토하라 족이 아니었다. 유목민족 특유의 기질을 발휘해서 인도 방면으로 남하하면서 기원전 138년에 박트리아를 멸망시키니, 멸망당한 박트리아에서 쿠샨 족의 세력이 새로 일어나 기원전 1세기에 멸망당한 옛 박트리아의 제후가 대월씨족으로부터 독립하였다. '쿠샨'이라는 말은 당시 인도인들이 대월씨족들을 그리 불렀기 때문이다.

불교를 중심으로 왕권 강화 노려
서기 25년 대월씨족의 치하에 있었던 쿠샨 족을 독립시킨 카드피세스 1세는 서기 60년경부터 서북인도를 공략하여 펀자브 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쿠샨 왕조를 세웠다. 이로써 서기 1세기 무렵에는 양대 세력이 형성되었는데 인도 서북부와 북 인도는 쿠샨 왕조가, 인도 서쪽과 이란에서 아프가니스탄은 파르티아가 지배하였다. 쿠샨 왕조의 전성기는 제 3대 왕인 카니슈카(Kanishka : AD 130 ?~162 ?)의 치세였다. 그는 북 인도에서 중앙아시아 이란으로 세력을 확대시키고 동쪽으로는 갠지스 강, 남 인도의 상당부분을 지배함으로써 마우리아 조의 아쇼카 왕 이래 대제국을 세웠으며, 그 역시 아쇼카 왕처럼 정복사업뿐만 아니라 불교를 진흥시킴으로써 '제2의 아쇼카'라는 별명을 얻었다.

카니슈카 왕은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교의 교리논쟁을 해결하기 위해서 니케아 공회의(325년)를 소집한 것처럼 카슈미르에서 불교 기본교리의 정립을 위해서 '인도판 공의회'를 개최하였다. 그 결과의 산물로서 대승불교가 생겨났으며(그전에는 소승불교밖에 없었음), 나중에 '중국 → 우리나라 → 일본'으로 북방불교(대승불교)가 전해졌다. 쿠샨 왕조는 마우리아 왕조에 비해서 확고한 국가적 틀을 갖추고 있었고, 특히 수도인 페스와르가 위치한 간다라 지방은 동·서 문명의 교류 중심지였으므로 대외적으로 국가의 존재가 널리 알려졌다. 당시 로마제국의 영토가 시리아 지방까지 확대된 데다가 헬레니즘의 영향으로 인도의 국제화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실크로드의 중간지점에 위치한 인도는 양방향적 문화교류가 가능했다. 동쪽으로부터는 중국문화를 받아들여 '왕 중의 왕' 즉 황제라는 뜻인 '마하라자 드히자라(maharaja dhijara)'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동·서 교류의 중심지였던 쿠샨 왕조는 3세기 초에 파르티아를 대신해서 일어난 사산 조(朝) 페르시아에게 멸망을 당함으로써 제국으로서의 도약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인도 전역은 또 다시 수많은 소국가로 분열되고 말았다. 쿠샨 왕조 붕괴 후 약 100여 년 간의 분열시대가 지나고 인도를 통일한 사람은 찬드라굽타 1세(AD 320~350 ?)인데, 마우리아 왕조의 건국자 찬드라굽타와는 다른 인물이다.

찬드라굽타 1세는 전 왕조인 쿠샨 왕조가 쇠퇴하자 비하르 지방에서 나와 갠지스 강 중류지역을 정복하고 왕국의 기초를 세운 인물이었으며 옛 마우리아 제국의 부흥을 꾀하여 분열이전의 인도 대부분을 재통일하는데 성공하였다. 그 역시 쿠샨왕조 때부터 사용된 '마하라자 드히자라'라는 칭호를 사용함으로써 막강한 제국의 군주로서 위상을 드높이고자 하였다. 찬드라굽타 1세의 아들인 사무드라굽타의 치세에 굽타 왕조는 튼튼한 국가의 기틀을 이루게 되었는데, 그 역시 정복군주로서의 탁월한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굽타 제국의 영토를 벵골에서 인더스 강 하류에 이르는 북인도는 물론, 그때까지 직접 지배를 받지 않았던 남인도와 데칸고원 일대의 소왕국들도 굽타 제국에 대해서 충성의 맹세와 함께 조공을 바쳤다.

사무드라굽타의 아들인 찬드라굽타 2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위업을 이어받아 서인도와 마르와 사우라슈트라를 정복하고 오랜 숙적인 사카 족도 멸망시켜 굽타 왕조의 역대 군주 가운데 가장 강대한 국가를 세웠으며 계속해서 유능한 인물이 출현하여 국력이 크게 신장되었다. 한편 쿠마라굽타는 중국에서 밀려난 흉노족의 침입을 물리쳐서 다음부터는 인도를 넘보지도 못하게 하였는데, 흉노족은 남하를 포기하고 진로를 바꾸어 서쪽으로 이동하여 중앙아시아에 정착, 투르크 족의 기원이 되면서 나중에는 동유럽까지 진출하였다. 개국 초기에는 다행히 유능한 군주들이 계속 출현하여 영토도 넓혀주고 외침도 막아주고 미약한 중앙집권을 보완해주었지만, 달도 차면 기우는 법! 쿠마라굽타 이후로는 군주로서 자질이 모자라는 사람들이 나타나는 바람에 5세기 중반부터는 급격한 쇠퇴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다양한 종교 받아들인 동남아시아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는 인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특히 인도로부터 전해진 힌두교·불교·이슬람교가 서로 얽혀져 당시 민족의 흥망과 그 궤도를 같이 하고 있었다. 특히 인도로부터 남방불교가 전해져서 불교문화의 꽃을 피웠지만 나중에는 힌두교와 이슬람교도 전래되어 특히 이슬람교는 발상지인 중동지역보다 인구 면에서 최대 규모이다. 인도차이나 반도에서는 서기 1세기 무렵부터 여러 왕조가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6세기에 들어와 크메르 족이 앙코르를 수도로 하여 강력한 왕국을 건설하였다. 당시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것이 앙코르톰(Angkor Thom)이며 '위대한 도읍'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현존하는 것은 12~13세기에 건설한 것임).

특히 그들이 12세기에 축조한 석조사원이 우리의 귀에도 익은 앙코르 와트(Angkor Wat :수도의 절)이다. 원래 앙코르 와트는 힌두교의 신을 숭배하는 절이었으나, 나중에 타이인들이 불교사원으로 바꾸어 버렸다. 타이인의 전성기는 17세기의 아유타야 왕조이며 역사상 한 번도 식민통치를 받지 않은 나라이다. 베트남은 진·한 시대부터 일부 지역이 중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북방불교(대승불교)가 확산되었으며 10세기 이후에는 독립해서 대월(大越)이라 했다. 19세기 원왕조(阮王朝)가 베트남을 통일하여 국호를 월남(越南)이라 하였다. 특히 미얀마의 경우에는 기원전 3세기에 인도로부터 불교가 전래되었으나, 지나·티베트계인 버마 족이 11세기에 세운 최초의 통일국가 파간 왕조가 여러 지역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현 스리랑카로부터 전해진 소승 불교(남방불교)를 적극 수용함으로써 미얀마의 최대종교로 육성했다.

이는 버마 족의 왕조들이 불교를 자신들의 정통성을 뒷받침해주는 것으로 철저히 이용했기 때문인데 불교문화를 널리 전파시켜 불교가 융성하는 한 요인이 되었다. 버마 왕조는 그 후, 세 차례에 이르는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결과, 콘바웅 왕조를 마지막으로 1886년에 영국령 인도에 합병되어 혼란과 분열의 식민지 시대를 맞게 되었으나 불교는 버마 족의 정신적 지주가 되고 민족을 하나로 이어준 매개체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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