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멜이 본 조선인들의 믿음
국립민속박물관 야외전시장에는 마을 공동체 신앙물로 돌탑, 장승, 솟대를 전시해 놓았습니다. 지나가는 외국인들이 그 신앙물들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면 과연 그들은 그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데요, 잠깐 독자 여러분과 함께 17세기 조선시대로 돌아가 보고자 합니다. 한국을 서방에 최초로 소개한 하멜은 조선인들의 신앙을 어떻게 보았을까요? 김태진이 옮긴<하멜표류기>(서해문집, 2003)를 통해 장승신앙과 관련한 당시 민초들의 믿음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일반인들은 그들의 우상 앞에서 일종의 미신을 지키지만 우상보다는 공직에 있는 관리에게 더 경의를 표한다. 고관과 양반들은 우상을 숭배하지 않는데 자기 자신들이 우상보다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여기서 말하는 우상숭배는 아마도 장승이나 돌탑과 같은 마을 공동체 신앙물을 의미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런 민초들의 믿음에 반해 일부 양반이나 탐관오리들의 횡포가 심했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들은 선한 일을 한 사람은 나중에 복을 받고, 악한 일을 한 사람은 벌을 받는다고 믿고 있다.
하멜은 조선인들의 국민성을 이야기하면서 ‘물건을 훔치고, 거짓말하고, 속이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므로 그들을 지나치게 믿어서는 안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도 ‘성품이 착하고 곧이 잘 듣는 사람들이라 원하는 것을 믿게 할 수 있다’고 기술함으로써 권선징악에 대한 소박한 믿음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설교와 교리문답 같은 것은 전혀 없으며, 그들의 신앙을 서로에게 가르치지도 않는다. 그들이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다 해도 종교에 대해 논쟁하는 법은 결코 없다. 그 이유는 전국에 걸쳐 우상에 대해 동일한 방식으로 예배하기 때문이다.
전국에 걸친 우상숭배의 형태가 동일하다는 그의 지적은 아마 장승과 같은 마을 공동체 신앙을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절대신을 숭배하는 당시 서양의 종교와는 달리 조선인들의 다신 숭배는 뚜렷한 경전도 필요 없고, 그 믿음을 설교하는 사람도 없으며 전국적으로 공통된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상대방의 종교를 두고 논쟁거리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질병 특히 전염병에 대해서는 대단한 혐오감을 가지고 있다. 전염병에 걸린 환자는 당장 읍이나 마을 밖 들판의 작은 초막으로 데려가 거기서 살게 한다. 그 근방을 지나가는 사람은 그 환자의 앞쪽에 있는 땅에 침을 뱉는다.
하멜은 ‘조선인들은 피를 보기 싫어하며 어떤 사람이 싸우다 쓰러지면 다른 사람들은 도망간다’고 기록해 두었습니다. 이것은 두 번씩이나 큰 전쟁을 치르면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는 아픔을 겪었고 전쟁 후엔 돌림병으로 인해 더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기에 전쟁에 대한 거부감이 만연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천연두, 콜레라, 수두 등의 돌림병이나 흉년 또한 나쁜 귀신이 붙어 생기는 것으로 믿었기에 역신들을 물리치고 달랠 수 있는 장승신앙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위 하멜의 기록을 통해 두 차례 큰 전쟁 후 국토의 황폐화, 돌림병의 유행, 자연재해에다 일부 탐관오리의 횡포 등으로 인해 민초들로서는 장승과 같은 마을 지킴이가 절실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남쪽엔 돌장승, 중부엔 나무 장승
이번 호에서는 나무장승을 찾아갑니다. 나무장승은 나무의 재질상 썩기 때문에 매년 혹은 2년에 한 번씩 장승제를 통해 새로운 장승이 탄생하게 됩니다. 산업화로 인해 장승제가 생략되고 나무대신 돌장승으로 바뀌기도 하지만 장승제를 통해 새롭게 태어난 나무장승은 새것과 오래된 것이 서로 어울려 형제인 듯, 쌍둥이인 듯 정겹게 느껴집니다. 이전에 만들어진 놈들은 키가 짧아졌고 명문도 희미해지고 풍우를 겪은 상처가 드러나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돌장승은 남부지방에, 나무장승은 중부지방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나무장승이 밀집된 곳은 경기도 남한산성 일대와 충남 칠갑산 일대입니다. 먼저 경기도 광주로 떠납니다. 남한산성 동문매표소를 통과하여 산성방향으로 달리다 보면 오른쪽 길가에 선 검복리 장승을 만날 수 있습니다. ‘천하대장군’이란 명문을 단 남장승입니다. 반대쪽 개울 너머에 ‘지하여장군’이 풀숲에 우뚝 서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2년에 한 번씩 장승제를 열고 장승재료로는 오리나무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현재 각각 네 기씩 서 있습니다. 솟대로 치장한 장승은 옛날 할머니가 비녀를 풀어 귀에 살짝 꽂으실 적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광주 엄미리장승은 병자호란 이후 엄씨 성을 가진 이가 자신의 성씨로 마을 이름을 짓고 임금을 지켜달라는 소원으로 장승을 세웠다는 데서 유래합니다. 광주시와 하남시의 접경인 은고개에서 좌회전하면 엄미리가 나옵니다. 계곡을 따라 난 도로는 한창 공사 중인데 그 길을 따라 가다 보면 상호명이 ‘잣나무집’인 음식점이 나오고 그 식당 좌우에 한 쌍의 장승이 서 있습니다. 인근 미랴울 마을의 장승과 생김새가 같습니다. 동일한 사람이 조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엄미리, 미랴울 마을의 장승은 잣나무집 장승을 지나다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남자 장승의 수염은 턱 부분에 구멍을 뚫어 그곳에 볏짚이나 풀 껍질 등으로 수염을 만들어 붙여 놓았습니다. 시원시원한 장승의 생김새에다 더 입체감을 불어넣는 제작자의 예술 감각이 돋보이는 부분입니다. 관모에다 눈은 수직에 가까울 정도로 비뚤하고 굵은 칼집으로 처리한 입 부분 등에서 대개의 나무장승이 이빨을 붓으로 그리거나 깎아내는 방법과는 차별화되어 있습니다. 여장승인 지하여장군은 민머리에 단촐한 느낌입니다. 현재 남장승이 네 기, 여장승이 두 기 남아 있습니다. 한 마을아낙은 남장승을 바깥장신, 여장승을 안장신으로 불렀습니다. 부부간 호칭을 안사람과 바깥사람으로 지칭하듯 장승에게도 그런 호칭을 붙인 듯합니다. 이 미랴울 장승은 또 장승 아랫부분에 ‘수원 七十里’, ‘서울 七十里’라고 안내해놓은 글귀가 보입니다. 10리 혹은 30리마다 노표(路標)역할을 하던 장승이 섰다고 하는데 이곳에서나마 이정표 역할을 했던 장승의 역할을 느껴볼 수 있습니다.
엄미리 장승은 두 곳 모두 명문이 같고 개울을 사이에 두고 남녀장승이 돌 무지 위에 서서 서로 마주하며 서 있습니다. 단지, 잣나무집 장승의 경우 오른쪽에 여장승이, 왼쪽에 남장승이 서있다는 점이 다르다 하겠습니다. 2년마다 장승제를 지내고 있으며 이때 삭아 넘어져 가는 장승들을 뒷산에 묻어주어 지킴이로 임무를 다한 장승에 대한 제사를 베푼다고 합니다. 광주에는 이곳 외에도 하번천리 양짓말 장승, 서하리 연골 장승, 사마루 장승, 무갑리 장승, 관음리 장승 등을 만날 수 있어 가히 장승의 고장이라 일컫기에 부족함이 없는 고장입니다.[PAGE BREAK]
칠갑산의 ‘축귀대장군’
칠갑산을 중심으로 한 충남권 일대는 아직도 장승제가 실시되는 곳이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청양지역은 장승공원을 조성하여 지역의 다양한 장승들을 한 곳에서 만날 수 있고, 해마다 ‘칠갑산 장승문화축제’를 개최할 만큼 장승에 대한 관심이 많은 곳입니다. 축제기간 동안 칠갑산 장승대제와 장승 깎기, 솟대 제작, 장승제 시연, 장승 명문식, 가족 장승 깎기 대회 등의 프로그램이 운영됩니다.
청양 지역 장승을 찾는 의의는 바로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에 익숙한 장승의 명문에서 벗어나 동서남북 및 중앙 등 오방(五方)과 관련한 명문을 많이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지킴이로서 장승은 무섭게 새긴다고 새긴 장승의 모습보다 명문에서 더 막강한 영향력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장승에 명문을 쓰거나 새기는 순간 장승은 무사나 장군의 단계를 넘어온 세계를 잡귀로부터 지키는 신적 존재로 탄생하는 것이고, 그러한 권능이 있음을 온 세계에 선포하는 셈이지요. 즉, 우리 마을이 장승이 지키는 소우주로까지 승화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신성한 우리 마을을 오방(五方)에서 침범하는 사악한 귀신으로부터 쫓아내려는 의도를 명문에서 찾아볼 수 있지요.
칠갑산 육중한 산세를 뒤로하고 천장리 장승이 서 있습니다. 길쭉한 몸에 코를 강조하여 돌출시키고 전체적으로 앞부분을 납작하게 다듬어서 키만 멀쭘해 보입니다. 길 양쪽에 남녀장승이 각각 두 기씩 서 있는데 명문이 ‘동방청제축귀대장군 지위(東方靑帝逐鬼大將軍 之位)’로 동일합니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이 동쪽으로만 나 있기에 이곳에 동쪽을 지키는 장승을 세워 비보하고 잡귀의 침입을 막고자 하는 의도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송학리 장승은 나무장승, 솔대, 솟대, 금줄 등을 모두 볼 수 있습니다. 남장승은 ‘서북방백흑제축귀대장군(西北方白黑帝逐鬼大將軍)’이고 여장승은 ‘동남방청적제축귀대장군(東南方靑赤帝逐鬼大將軍)’입니다. 각각 세 기씩 서 있는데 새끼줄로 동여매어진 채 키가 달리 붙어 마치 친형제 자매 같습니다. 이빨을 일일이 다듬어 잘 표현했고 솟대에는 먹으로 새의 형태를 그려 넣었습니다. 남장승은 사모에 수염을 길렀고, 여장승은 머리에 족두리를 그려 놓았습니다. 장승제를 앞두고 새 장승을 훔쳐 가면 득복한다고 하여 이웃 마을에서 호시탐탐 노리므로 도난당하지 않으려고 주민들이 밤을 새워가면서 장승을 지키기도 했답니다.
해남골 장승은 ‘서북향흑제축귀대장군(西北向黑帝逐鬼大將軍)’과 ‘동남향적제축귀대장군(東南向赤帝逐鬼大將軍)’이라는 명문이 적혀 있습니다. 서북방향이라면 ‘백흑제(白黑帝)’로 동남향이면 ‘청적제(靑赤帝)’로 이름 붙여져야 할 것 같은데 ‘흑제(黑帝)’와 ‘적제(赤帝)’로 이름붙인 그 의도가 궁금합니다. 원래 나무장승이었던 것을 1960년대초에 돌장승으로 교체하였다가 근래에 나무장승이 다시 섰다고 합니다. 인근 대박리 장승은 근래에 돌장승으로 바뀌었습니다.
용두리에서는 남장승 ‘천상천하축귀대장군(天上天下逐鬼大將軍)’과 여장승 ‘동서남북중앙축귀대장군(東西南北中央逐鬼大將軍)’을 만날 수 있습니다. 당수나무 아래에서 각각 솟대를 끼고 있습니다. 남장승은 천상천하의 수직적 세계를, 여장승은 사방의 수평적 세계를 관장하도록 하여 그야말로 빈틈없이 경계태세에 접어든 것 같습니다. 네모난 입모양에 이빨을 대칭되게 그려놓았는데 그 생김새가 장방형에 옥수수 알처럼 친근합니다. 당수나무 뒤편에는 오래되어 뽑혀나간 장승 한 쌍이 놓여 있습니다. 일제시대 일본인 지서장이 장승을 불태우고 몹쓸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난 후 장승을 함부로 손대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용두리장승에 비하면 부여 은산장승은 우락부락한 눈매에 마치 드라큐라를 연상시키는 들쭉날쭉한 송곳니를 묘사하여 느낌이 많이 다릅니다. 얼굴에 황토칠한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9호로 지정된 부여 은산별신제는 억울하게 죽은 장군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사방에 장승을 세우는 내용입니다. 생김새로 볼 때 은산장승은 티끌만한 실수도 용납하지 않고 원칙에 충실한 장승이라면, 용두리장승은 한 번씩은 일부러 못 본 척해줄 듯 어리숙함과 인정스러움이 느껴집니다.
마을을 떠나다
절집에서도 나무장승을 볼 수 있습니다. 국립민속박물관 제2전시관에 들어서자마자 머리를 풀어헤친 듯한 나무장승 둘이 우뚝 서 있습니다. 이 장승은 60년대까지 지리산 쌍계사를 지키다 새 장승이 들어서면서 현역생활을 접고 박물관으로 수집돼 온 것입니다.
장승목은 뿌리 쪽 방향이 장승의 머리 부분이 됩니다. 그래야만 장승의 머리 부분이 몸통에 비해 왜소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뿌리까지 활용해서 장승 머리털로 조성한 이른바 산발형 장승은 그리 흔하지 않았습니다. 아산 외암마을에서와 같이 요즘에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장승이 되었지만요.
순천 선암사 목장승은 몸 전체에 붉은색을 칠했는데 호법선신(護法善神)과 방생정계(放生淨界)의 명문이 보입니다. 오른쪽 호법선신은 불법을 수호하며 일체 중생을 성불하도록 돕는 착한 신들을 뜻하며 왼쪽 방생정계는 이곳부터는 더욱 모든 생명을 아끼고 사랑하며 매인 것들에게 자유를 베풀어야 함을 뜻합니다. 낙안읍성 가는 길에 자리한 금둔사에도 선암사의 것과 똑같은 장승을 볼 수 있습니다. 해남 대흥사 입구에도 금귀대장(禁鬼大將) 등의 불법을 수호하는 장승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편 80년대 이후 각 대학에서는 ‘백두대장군’, ‘한라대장군’, ‘민족천하대장군’ 등 통일을 소재로 한 다양한 시국장승이 부활되었습니다. 오늘날에는 개인의 염원까지 담아 ‘대입합격기원대장군’, ‘수능시험우수여장군’ 등 명문이 등장했고, 강릉 선교장 일대에 조성된 장승중에는 ’산촌대장군’, ‘어촌대장군’, ‘수두예방’, ‘감자대장군’, ‘논개여장군’ 등 다양하고 재미있는 명문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마을을 떠난 장승이 다양한 영역에서 활약하고 있는 것이죠.
실속보다는 겉치레에 치중하는 젊은이들을 일컬어 ‘된장녀’니 ‘된장남’라고 부릅니다. 왜 하필이면 ‘된장-’ 일까요. 분명 된장을 비하하는 의미가 다분하다고 하겠습니다. 이틀 걸러 한 번씩은 꼭 된장국을 먹어야 하는 저로서는 왜 그들을 된장에 비유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내 돈이니까 내 맘대로 해도 되고, 내 삶이니까 내 스타일대로 살면 되고, 내가 살기 위해서는 내 것, 가족 것부터 챙기는 것이 우선이라는 이 세태에 공동참여, 공동창작, 공동신앙의 산물이었던 장승을 돌이켜 봅니다. | 울산 옥현초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