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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분강개의 커뮤니케이션


얼마 전에 겪었던 일이다. 어떤 기관에서 부진아 문제의 교육적 대안을 모색하기 위한 전문가 협의회에 참석해 줄 것을 요청해 왔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연구하려 할 때, 관련 전문가들의 아이디어를 빌린다는 취지로, 이런 종류의 협의회가 활용된다. 미리 회의 자료를 보내 주면서 잘 검토를 하고 오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주최 측의 자세가 진지하고 성실하여 나는 이 회의에 호감과 기대를 가지고 참석하기로 했다.

문제는 협의회가 시작되면서 발생했다. 참석한 인사 중의 한 사람이 자신이 가진 특정의 견해를 밝히면서, 학습부진아 문제의 발생을 당국의 정책 부재 탓으로 나무라기 시작하는 것과 동시에 서서히 비분강개하기 시작했다. 그의 비분강개는 계속 다른 국면으로 전이되었다. 그는 이 문제와 관련해서 사람들이 기회균등의 교육철학을 제대로 가지지 못했다는 공격적 발언으로 불특정의 여러 학자 전문가들을 격렬하게 비난했다. 비분강개의 와중에도 그는 자신이 이러저러한 힘과 경력의 소유자임을 빠트리지 않고 끼워 넣었다.

“고정하시지요”하는 말을 꺼내기도 무색할 정도로, 그는 분기탱천하여 주먹을 불끈 쥐고, 언성을 높였다. 다른 참석자들은 마치 문제의식도 없고, 정의감도 없는 부류의 인간들로 순식간에 내몰리는 분위기이었다. 그가 비분강개하는 동안, 어정쩡하기 그지없는 침묵이 흘렀다. 협의회에서 의미 있는 대안들을 생산하려던 개방적 소통의 분위기가 금방 유실되는 듯했다. 속된 말로 김새는 분위기이었다. 이런 성격의 회의에서는 자유로운 소통이 생명이다. 그 사람의 비분강개의 정도가 하도 심하여 나는 이런 의심도 해 보았다. 혹시 저 양반이 다른 무슨 이유로 이미 화가 나 있었던 것은 아닐까.

회의를 주재하는 사회자가 몇 번씩 사과 아닌 사과를 해서 겨우 진정시켰다. 사실 생각해 보면 사회자가 그 사람에게 사과를 해야 할 이유는 없다. 나는 심리적으로는 마치 폭력에 휘둘리는 느낌을 받았다. 참으로 가당치 않은 억압의 분위기이었다. 나와 비슷한 느낌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나중에 확인할 수 있었다. 이어진 회의는 부자연스러웠다. 그 사람과 반대되는 의견을 가진 분들은 극심한 마음의 부자유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 사람과 반대되는 의견을 가지지 아니한 사람들까지도 모두 부자연스럽고 부자유스러웠다. 그날 회의는 총체적으로 실패한 회의이었다. 다음 회의 날짜를 기약했지만, 유쾌하고 의욕적인 약속으로 받아들일 사람이 누가 있을 것인가. 나는 그날 ‘소통의 적’을 보았다.

그는 아마도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를 것이다. 자기가 소통 파괴의 주역이 되고 말았다는 것을 뒤에라도 진정으로 깨닫게 되었을까. 그걸 깨달을 수 있다면 애당초 그런 행동 패턴을 보일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는 오히려 자신이 오늘 그 누구도 하지 못하는 의로운 행동을 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참석한 사람들에게 큰 깨우침을 불러 일으켜 준 데 대해서 스스로 만족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른 장소에 가서 다른 사람들에게 무용담처럼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오늘 회의에서 교육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정신 번쩍 나게 해주었지.”
자기중심의 소통으로 일관하는 자위적(自慰的) 소통의 전형이다. 이처럼 일방성의 극치를 보이는 소통은 형식상 대화를 가장할 뿐, 내용상으로는 폭력의 속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는 조직폭력배 사회의 담화구조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소통의 자질에서 보면 가히 ‘소통의 적’이라 할 수 있겠고, 정신건강의 차원에서 보면 일종의 정서불안에 연결된다. 이렇게 자기 존재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과 소통을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이 있다. 그것은 자기존재를 보지 못하게 하는 감정의 안개가 바로 비분강개라는 점이다. 비분강개 현상에 대한 의미 부여를 어떻게 할 것인가. 비분강개에 대해서 우리의 잘못된 사회적·문화적 고정관념이 잘못된 소통 패턴을 유발하게 하는 면이 없지 않은 것 같다.

비분강개(悲憤慷慨)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으면 ‘슬프고 분하여 마음이 북받침’으로 설명이 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 말 자체는 슬픔과 분노로 가득 찬 감정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다. 비분강개는 그런 감정 현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이 말이 실제로 사용되는 맥락을 살펴보면, 단순히 감정 노출 현상을 넘어서서, 더 확장된 가치 개념이 은연중에 작동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즉, 비분강개는 그 감정을 표출하는 사람이 지닌 의로운 태도나 의지까지도 포함하는 뜻으로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시 부연한다면, 비겁하고 소심하고 옹졸한 사람이 슬프고 분하여 마음이 북받칠 경우에 ‘그가 비분강개했다’라고 쓰면 왠지 잘 어울리지 않는 말로 받아들여진다. 그런 고정관념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비분강개를 용기나 정의감에서 슬픔·분노를 토로할 때만 사용해야 하는 표현으로 인식한다.

이해가 전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민족의 근현대사가 일제에 의한 식민지 고난으로 점철되고, 다시 전쟁과 궁핍과 민주화의 역정을 거쳐 오면서, 슬프고 억울하고 분하고 한탄스러운 정서를 우리는 얼마나 많이 경험했던가. 슬프고 억울하고 분하고 한탄스러운 정서를 토로하는 장면 자체가 독립과 자유와 해방과 생존을 갈구하여 저항하는 역사적 장면으로 나타나곤 하였다. 따라서 슬프고 억울하고 분하고 한탄스러운 정서를 사회·문화적 가치로 축적하는 사이에 비분강개는 긍정적 가치의 감정으로 수용되고 발현될 수 있었으리라 본다.

이런 인식은 비분강개를 연출하는 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여러 사람 앞에서 비분강개의 감정을 거침없이 보여주는 쪽에서도 이 비분강개의 내용이 일종의 정의감과 협기(俠氣)에서 연유되는 것임을 알게 모르게 내어 비친다. 자신이 얼마나 용감하며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사람인 줄 아는지를 비분강개와 더불어 토해 내는 것이다. 우국충정(?)의 울분을 가득 담아내는 선거 유세 등에서 보여주는 정치인들의 비분강개 스타일의 연설도 실은 비분강개의 사회적 문화적 전통에 기대는 것으로서, 비분강개는 일종의 언어적 문화형(文化型)으로 자리 잡아 정치인들의 스피치 기법으로 자동화되는 국면에 이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화와 근대화가 조화롭게 이루어졌다는 세계적 평가를 받는 현재에 이르러서는 우리는 개방적 자긍심을 가지는 것이 좋겠다. 민주화와 근대화를 관류하는 핵심어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소통’이라고 말하고 싶다. 더 자세히 말하면 ‘개방적 소통’이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이때의 소통이란 문화적 가치의 수준에서 일컬어지는 개념이다. 그런 점에서 이제 비분강개라는 말(또는 현상)은 현 시점에서 재개념화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비분강개는 소통을 방해할 수 있다. 개방적 마인드를 가두어 버릴 수 있다. 상투화 된 비분강개는 대화를 돕지 못한다. 비분강개는 쌍방적 대화와는 무관한 말이다.

비분강개를 감정의 작용으로 본다면, 비분강개의 감정이 가 닿는 대상은 자기 자신이라고 보는 것이 적실하다. 그러니까 비분강개를 통해서 일종의 감정의 카타르시스[淨化]를 경험하는 것이다. 여기에 비분강개의 순기능이 있기도 하다. 만약 일상적 대화에서 비분강개의 구체적 대상이 있다면, 그 비분강개는 잘 다스려지지 않는 적개심의 변종일 가능성이 높다.

어떤 텔레비전 토론회에서 서로 대립되는 관점을 가진 양측이 나와서 토론을 전개하다가, 한쪽 패널이 상대 패널을 향하여 날이 선 목소리로 ‘부끄러운 줄 아시오!’ 하고 일갈하는 장면을 보았다. 고도의 개방된 공적 공간에서의 대화와 소통 토론 장면, 이를테면 텔레비전 토론 등에서는 비분강개는 금물이다, 소통의 양식과 태도를 존중해 주는 데서 토론의 참 기능이 살아나는 것이다. 무슨 자격으로 상대를 그렇게 비분강개하여 나무랄 수 있는가.

상대방이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면, 시청자들로 하여금 ‘아 저 사람이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구나’하고 판단하게 하는 데에 이르도록 해 주는 것이 개방적 토론 문화 속의 패널이 갖추어야 할 소통 자질이다. 내 감정으로 상대를 모두 주관화하여 야단치고 개탄하고 하는 것은 혼자 있을 때 하는 것이다. 국민 대중이 환시하는 텔레비전 토론에서 쌍방의 대화적 소통 형식을 무시하고, ‘부끄러운 줄 아시오’하고 내 감정만으로 상대를 재단하려 한다면, 그 발언의 동기가 아무리 진정하다 하더라도, 마침내는 국민으로부터 ‘부끄러운 줄 아세요.’라는 소리를 되돌려 듣기에 꼭 알맞다.

국권상실의 비통함을 안으로 깊이 아프게 새기며 ‘절명시(絶命詩)’ 56자에 그 비분강개의 소회를 묵시록처럼 전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매천(梅泉) 선생의 비분강개에 새삼 숙연해 진다. 속인(俗人)들의 얄팍하고 요란하고 감정 배설적인 비분강개를 우리도 이제는 비판할 수 있는 수준에 왔다. | 경인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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