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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인의 마음과 멋을 나타내는 노리개

우리나라 옛 여인의 대표적 장신구인 노리개.
노리개는 단순한 겉치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국 여인의 착하고 담담한 마음을 표현해준다.
기지와 재치를 가진 은근한 한국의 멋을 만나보자.


예부터 여인들은 입고 쓰고 꾸미는 것을 좋아했다. 지금의 여인들은 더욱 그렇다. 여름이면 꾸밈이 극대화된다. 요즘 거리에는 치장을 하지 않은 사람 찾기가 더 어렵다. 여인이나 남성이나 장신구로 자신을 치장하여 남에게 멋지게 보이고자 하는 마음은 똑같다.

고려시대부터 유행한 전통 노리개
우리 전통 장신구에는 비녀나 뒤꽂이와 같은 머리 꾸밈장식부터 목걸이, 귀걸이, 반지 등 몸에 바로 착용하거나 노리개와 같이 옷과 함께 꾸며 자신의 마음과 멋을 표현한 것 등이 있다.

많은 장신구 중 우리나라 옛 여인들의 저고리 앞섬 위 치장치레인 노리개는 그 여인의 마음과 멋을 나타낸다. 노리개는 매듭을 이용하여 다양한 멋을 발휘하였다. 또한 외부와 단절된 유교적인 사회에서 여인들이 앞섶에 매달려 있는 노리개를 만지작거리는, 심심하거나 따분한 마음을 달래는 놀이기구 역할도 있었으리라.

경기가요에는 노리개를 읊은 가사가 있다. 이별을 서러워하는 여인이 절절히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여인이 먼저 “한양 낭군님 날 다려가오. 나는 죽네, 나는 죽네, 임자로 하여 나는 죽네”하며 눈물겨워 하면, 남자는 “네 무엇을 달라느냐. 네 소원을 다 일러라. 노리개치레를 하여 주랴. 은조로통 금조로통 산호가지 밀화불수(蜜花佛手) 밀화장도 곁칼이며 삼천주(三千珠) 바둑실을 남산 더미만큼 하여나 주랴”하면, 다시 여인은 “나는 싫소, 나는 싫소, 아무 것도 나는 싫소. 금의옥식도 나는 싫소”하고 애절해 하는 정경이 경기민요 ‘방물가(方物歌)’ 가사에 나와 있다.

자기가 짓밟은 여인의 순정을 하찮게 여기며 돈이나 패물로 자신의 행동을 덮으려는 사내들에게 노리개치레는 집치레, 세간치레, 의복치레와 함께 여인들을 유혹할 수 있는 엄청나게 매혹적인 재물이었음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여인들의 웃옷에 단추를 비롯하여 금은보옥의 패물들을 장식하는 유습이 고려의 옛 무덤에서 적지 않게 발견되고 있는 것을 보면 노리개는 이미 고려시대에도 유행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삼작노리개를 비롯한 격식을 차린 조선의 노리개 양식은 고려시대 유물에서는 아직 알려진 것이 없다. 이는 아마도 다른 문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당, 송, 원, 명의 중국 장신구 양식이 오랜 동안 우리나라에 영향을 끼쳐 오는 동안 우리 민족 정서 속에서 점진적으로 정리 순화되어 한국 삼작노리개 양식이 자리 잡혀 온 것이라 생각된다.


조선시대 여인들은 귀족이건 서민이건 기녀이건 숙녀이건 그 집안 지체에 따라 또는 처소와 예법에 따라 노리개를 가슴에 달고 다소곳이 기품을 가누곤 했다. ‘미인도(신윤복 作)’의 여인도 삼작노리개를 살포시 매만지고 있다. 한국 여인들이 마음처럼 착하고 담담한 표현을 노리개로 표현했다. 노리개는 단순한 것 같아도 그리 간단한 것만도 아니다.

행복 염원하는 여인들의 마음 담아
노리개는 한복 저고리의 겉고름, 안고름 또는 치마허리에 차는 여성 장신구의 일종을 말하는 것이나, 어원의 느낌으로는 놀이처럼 만질 수 있는 기구로 여겨진다. 특히 손동작이 어색할 때 살짝 팔을 올려 가만히 노리개를 만지는 여인의 하얀 손을 보면 그 어떤 모습보다도 사랑스러웠을 것이다.

몸에 차는 패물류(佩物類)는 원래 칼, 숫돌과 같이 실제 필요한 물건을 허리에 찼던 북방 유목민의 습속이었는데, 이후 허리띠에 온갖 장식적인 요패(腰佩)를 단 형태로 발전하였다. 노리개는 화려하고 섬세하여 한복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한층 강조해 준다. 노리개는 모양과 형태가 다양하여 궁중에서는 물론 일반 평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여자들이 널리 즐겨 찼다. 그중 대삼작은 국가의 궁중의식이나 집안에 경사가 있을 때에 패용하였고, 단작은 평상시에 달았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고려시대 귀부인들이 허리띠에 금탁(金鐸), 금향낭(錦香囊)을 찼다는 내용이 있다. 고려 후기에는 저고리의 길이가 짧아지자 허리띠에만 차던 것을 옷고름에도 찼다. 그 후 조선시대에는 대부분 옷고름에 달았다. 국가의 궁중의식이나 집안에 경사가 있을 때 달았고, 간단한 것은 일상 시에도 달았는데 양반계급에서는 집안에 전래(傳來)하는 노리개를 자손 대대로 물려주기도 하였다.
지난 2월 왜장을 죽이는 데 공을 세워 논개와 더불어 임진왜란 때 ‘2대 의기(義妓)’로 꼽히는 평양 기생 계월향(桂月香·?~1592)의 초상화를 고미술품수집가 안병례(46) 씨가 조선일보에 공개했다. 공개한 이 그림은 가로 70㎝, 세로 105㎝ 정도로 일본 교토에서 최근 입수됐는데, 한지에 그린 채색화다.

옥비녀를 한 계월향은 반달 같은 눈매에 이중으로 된 옅은 눈썹, 도톰하면서도 오뚝한 코 등 전형적인 조선 미인이다. 그림에는 ‘1815년 그린 것으로, 그를 기리는 사당(장향각·藏香閣)에 걸고 1년에 한 번씩 제사를 지냈다’고 적혀 있다. 저고리 길이가 짧고 소매폭도 좁은 등 몸에 착 달라붙는 상의로 당대의 패션 감각을 반영한 ‘섹시한’ 느낌을 주면서도, 손을 ‘X자로 곱게 교차한 뒤 가슴에 찬 노리개에는 ‘재계(齋戒 -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함)’라고 적어 그를 현창(顯彰)한다는 의미를 더하고 있다.

노리개는 외형상 섬세하고 다채로우며 호화로운 장식이기도 하였지만, 정신적으로는 부귀다남, 불로장생, 백사여의(百事如意) 등의 길상적인 의미나 행복을 염원하는 여인들의 마음을 담기도 하고, 나약하지만 속 깊이 나라를 염려하는 충정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다양한 크기, 재료 등으로 독창성 뽐내
노리개는 삼작(三作), 단작(單作)으로 구분되고 띠돈[帶金], 끈목[多繪], 패물, 매듭, 술 등 5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삼작(三作)노리개는 3개의 노리개를 한 벌로 꾸민 것으로 대삼작(大三作), 중삼작(中三作), 소삼작(小三作)으로 구분한다. 대삼작노리개는 가장 호화롭고 큰 것으로 주로 궁중에서 사용했고, 중삼작노리개는 궁중과 상류계급에서, 소삼작노리개는 젊은 부녀자나 어린이들이 사용했다.

띠돈은 가장 위에 있는 고리로서 노리개를 고름에 걸게 만든 것인데, 재료에 따라 순금 또는 도금으로 만든 금삼작, 순은 또는 여기에 칠보장식을 수놓은 은삼작, 백옥을 비롯한 옥 종류로 만든 깔끔한 옥삼작, 주먹만한 밀화덩이나 산호가지 그리고 청강석이나 옥나비 중 세 가지를 곁들인 호사스러운 대삼작, 청강석 산호 밀화로 만든 불수촌이나 산호가지, 밀화덩이, 옥나비의 콤비로 된 중삼작, 비취, 자만옥, 백옥, 산호, 청강석, 밀화를 재료로 나비, 호도, 동자, 가지, 호로병, 박쥐, 투호 등을 주로 만든 약식의 소삼작 등으로 이루어진다.

모양은 정사각형, 직사각형, 원형, 화형(花形), 나비형, 사엽형(四葉形) 등과 화문(花文), 쌍희자문(雙喜字文), 용문, 불로초문 등의 길상무늬를 사용한다. 끈목은 동다회(圓多繪)를 주로 쓰는데, 띠돈과 패물, 술을 연결하며 매듭을 맺는다. 또 노리개의 주제에 따라서 박쥐삼작, 불수삼작, 동자(童子)삼작, 장도(粧刀)삼작으로 부르고, 삼작노리개가 세 가지 종류의 주제를 콤비로 해서 표현했을 경우는 동자, 바늘집-방아다리, 은삼작이라고 구분하기도 한다.

단작노리개는 삼작노리개 중의 한 개를 따로 달거나, 처음부터 하나만으로 만들어진 노리개이다. 그리고 소삼작노리개는 예장이 아닌 경우에도 달 수 있고 평상복에 쉽게 장식할 수 있는 단식노리개들, 즉 옥장도, 은장도, 또는 향낭 같은 것도 있는데 요즘 브로치나 양장의 액세서리 같은 가벼운 단장에 애용하던 것이다.

노리개의 색조는 삼색(三色)부터 12색까지 사용하였다. 삼작노리개는 홍색, 남색, 황색의 3색을 기본으로 썼고 분홍, 연두, 보라, 자주, 옥색 등을 쓰기도 하였다. 노리개의 위쪽에 다양한 매듭이 있는 부분은 짧은 저고리의 길이와 비례하고, 길게 드리운 술 부분은 긴 치마의 길이와 같은 비례로 하여 만들었다.

노리개의 색조는 주로 매듭노리개에서 다양한 색상을 볼 수 있다. 매듭노리개의 매듭은 명주실을 꼬고 합사(合絲)하여, 각색으로 염색해서 끈목을 친 다음, 굵고 가느다란 끈목을 늘어뜨려 각종 모양으로 맺는 공예기법이다. 노리개의 긴 삼색줄은 짧은 저고리에 긴 치마를 상징한 것이라 한다. 같은 모양으로 엮은 매듭에 색상과 형태가 다른 보석 세 개를 청, 홍, 황의 세 줄에 꿴 대삼작노리개는 대례복에 찼다. 같은 모양이면서도 크기가 비교적 작은 것은 소삼작이라 부르며 소례복에 사용하였다.

노리개를 만든 옛 장인들은 크기, 개수, 모양을 자유자재로 구상하고 만들면서 어떤 것이 최고의 아름다움인지를 찾고 또 찾아 노리개에서 극치미를 맛보았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재료는 재료대로 모양은 모양대로 크기는 크기대로 자기가 하고 싶은 모양을 다섯 요소를 채워가며 독창적으로 만들어 아름다움을 창조할 수 있었으니 노리개를 만드는 장인은 화려하고 섬세한 손재간을 한껏 뽐낼 수 있었을 것이다.

시간, 장소, 직위에 맞는 노리개 착용
노리개는 거기에 달리는 패물의 종류나 규모에 따라 예복용과 평복용으로 구분되고, 크기나 모양에 따라 어른용과 어린이용으로 나누어 사용되었다.

대례복에 차는 대삼작노리개에는 손바닥 크기가 넘는 산호가지와 백옥나비 위에 진주, 청강석(靑剛石), 산호 등의 구슬을 배열하여 금속 세공을 한 나비 한 쌍, 주먹만한 밀화불수(蜜花佛手)를 달아서 진귀한 조형미를 보여준다.

궁중에서는 철에 따라 5월 단오절부터는 백옥, 비취로 된 외줄노리개를 달고, 8월 추석부터는 삼작노리개를 달았다고 한다. 가례, 탄일 등 특별한 축의일에는 왕비를 비롯하여 귀부인들까지 삼작노리개를 달았으며, 평상시에도 왕비가 대비전에 문후를 드릴 때는 금박 스란치마에 당의(唐衣)를 입고 삼작노리개를 달았다고 한다. 또 왕비만이 달 수 있었다는 삼천주(三千珠)노리개는 불교에서 말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상징하는 것으로 큰 진주를 3개씩 꿰었다고 한다.

소삼작이나 외줄 노리개는 소녀용으로 분홍, 연두, 노랑색으로 하거나 색동으로 만들었다. 도리매듭, 국화매듭, 가지방석매듭 등을 맺고 봉술, 딸기술을 쌍으로 늘였으며, 패물로는 동자(童子), 탑, 가지, 도끼, 방울, 나비, 주머니, 오리, 호리병, 고추 모양의 금속 세공품에 금을 올리거나 칠보를 올려 작은 은고리에 끼었다.

민간에서는 주로 은삼작을 달았는데, 혼례 때 사용한 후 백지에 싸고, 비단보에 싸서 보물상자에 간직해 두었다가 친척의 혼례 때나 꺼내 썼다고 한다. 방아다리, 장도(粧刀), 투호(投壺), 박쥐, 나비, 호리병 등의 모양을 은으로 세공하여 달았다.


뜨거운 속내 감추는 은근한 아름다움
우리나라 여인들의 가슴에 달린 노리개들은 경우와 처소에 따라 하나의 예장구실을 했지만 그 노리개들의 격조나 취미를 살펴보면 그 집안의 가도나 그 여인의 교양이 드러나 보였다. 마치 요새 저고리 적삼에 다는 브로치의 선택이 그 여인의 인품을 드러내는 경우와 다름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조선시대 상류면 상류대로 화사한 노리개를 자랑삼기도 했고, 서민은 서민대로 수수한 은삼작에 아롱지는 칠보무늬로 조촐한 아취를 표현해서 여인 풍정을 돋보이게 했다. 말하자면 조선의 노리개는 무슨 권위나 호사에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다양하고 복잡하면서도 주제가 통일되어 있고 화사하고 뽐내는 듯해도 한국의 어진 어머니들처럼 은근하면서도 포근한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여인들이 자신을 꾸미는 일은 거의 본능적이다. 현대 여인들은 더욱 다양하고 새로운 장신구를 개발하여 많이 그리고 즐겨 사용한다. 그러나 우리 옛 여인들이 뜨거운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고 앞자락에 간접적으로 표현한 노리개의 아름다움은 기지와 재치를 가진 한국 여인의 은근한 아름다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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