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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트르대제, 20년만 더 통치했더라면

그의 통치가 이어졌다면 러․일전쟁에서의 패배나 볼셰비키혁명은 없지 않았을까. 또한 소련이 단독으로 발을 빼지 않아 1차 대전의 양상도 크게 달라졌을 것이고, 스탈린의 피의 숙청도 아마 없었을 것이다. 혹 동유럽의 공산화나 세계의 공산주의운동은 물론 미국과 소련 중심으로 전개된 냉전도 그 모양을 달리했을지 모른다.

“표트르대제. 감기를 이기고 20여 년 더 통치해 러시아의 근대화를 크게 진척시켰다.” 사실과는 다른 이야기다. 표트르 1세는 한창 일할 나이인 52세에 타계했고, 따라서 그가 열성적으로 추진하던 러시아의 서구화도 늦어지게 되었다. 표트르대제가 50대 초반에 타계하지 않았을 경우 러시아의 역사는 과연 달라졌을까? 그것과 관계없이 볼셰비키혁명은 일어났고 스탈린의 피의 숙청도 감행되었을까?

흔히 북극곰으로 불리는 러시아. 냉전시대의 소련만 못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강대국으로 행세하는 러시아. 9세기 중엽 이래 바이킹의 지배아래 있었고 -그들은 모스크바지역에 노보고로드왕국을 건설했다- 13세기 이후에는 몽골의 지배를 받아오다 15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야 겨우 몽골의 지배를 벗어나 독립했지만 후진의 굴레를 벗지 못한 러시아. 그 러시아의 근대화에 큰 족적을 남긴 표트르 1세(1682-1725) 이야기다.

후진국 굴레 벗지 못한 러시아

16세기에 접어들어 이반 4세가 짜르(tsar)를 칭하고, 17세기 초에 미하일 로마노프가 로마노프왕조를 연 후에도 러시아는 후진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표트르대제에 의해 서구적 근대국가의 모습을 갖추어가기 시작했다. 2m의 장신에 말(斗)술을 사양하지 않은 그는 즉위 즉시 내정을 개혁하고 산업의 근대화를 추진했다.

표트르는 이복형 이반과의 왕위계승 싸움에 이겨 10살에 제위에 올랐지만 그 후에도 정치적 위기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반의 지지 세력이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14세기에 건설된 궁궐인 모스크바의 크레믈린을 장악한 이반 측 총병대는 어린 표트르 1세의 면전에서 7일 동안 별별 못된 짓을 다했다. 모후와 함께 크레믈린을 버리고 모스크바 교외로 탈출한 표트르는 죽음의 문턱을 수차례나 넘나들다 1689년에 제권을 회복했다. 그로부터 5년 뒤 섭정을 하던 모후도 타계해 22세의 표트르는 제국을 직접 통치할 수 있었다.

친정체제를 구축한 표트르 1세는 우선 강력한 해군의 창설을 시도했다. 흑해로 진출하기 위해 오스만제국에 도전했으나 -그 무렵 소아시아․중동․발칸반도․북아프리카 등지에 걸쳐 있던 오스만제국은 크림반도를 포함해 흑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보기 좋게 패한 후 해군을 창설하는 한편 서유럽 선진국들의 우수한 기술 도입에 진력했다. 표트르는 소년시절에 모스크바에 살던 서유럽인들과 매우 가까이 지내면서 항해와 기계․기술 등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사회적으로 자유롭고 지적으로 적극적인 서구적 분위기를 체험했기 때문에 제국을 친정하는 즉시 서유럽의 활기차고 개방적인 생활방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할 수 있었다.

강력한 해군 창설, 서유럽 문화 도입

표트르대제는 친정 15년여 만인 1697년에 250명으로 구성된 선진기술학습 사절단[Grand Embassy]을 이끌고 네덜란드로 향했다. 조선이 1881년에 일본에 파견한 신사유람단과 비교되지만 황제 자신도 사절단의 일원으로 참가한 점을 고려할 경우 서구의 선진 기술과 문물을 익히려던 그의 열정은 오히려 신사유람단의 그것을 능가하고도 남았던 것 같다.

사절단에 동행한 황제 표트르는 신분을 속이고 사르담에 있던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 조선소에서 기름때 묻은 작업복 차림으로 기술습득단원들과 함께 기술을 익혔다. 하지만 4개월 여 후 황제신분이 탄로나 구경꾼들이 모여들자 황제는 암스테르담의 한 조선소로 옮겨갔다. 네덜란드에 머무는 동안 표트르 1세는 조선소에서 직접 기술을 연마했을 뿐만 아니라 각종의 공장들은 물론 미술관․병원․양육원․천문대 등을 견학했다. 그때 그에게 편의를 제공한 인물은 네덜란드 총독을 겸하고 있던 영국의 윌리엄 3세였다 - 주지하듯이 명예혁명(1688)으로 축출된 제임스 2세의 딸 메리의 남편이었던 네덜란드의 윌리엄공(公)은 영국 국왕으로 초빙되어 윌리엄 3세가 되었다.

표트르대제는 이후 윌리엄 3세의 배려로 당시 세계의 공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잉글랜드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갈망하던 영국의 선진문물을 견학할 수 있어 더 없이 흡족했던 황제는 윌리엄 3세로부터 호화 요트를 선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최신예 군함을 시찰할 기회도 얻었다. 황제는 그밖에도 영국의 의회․대학․조폐국과 대소의 공장을 두루 견학했는데 네덜란드에서와 같이 그때마다 노트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영국에 머무는 동안 황실 근위대(스트렐치)의 반란소식을 접하고도 선진문물의 견학을 마무리한 다음에야 귀국해(1698년 여름) 반란 주동자 등 100여명을 처형하고 근위대를 해산했다.

표트르대제는 또한 효율적 정부를 겨냥해 행정개혁을 서두르는 일방 서구식 교육과 문화를 도입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국민, 특히 상류 지배층의 서구식 사고와 행위를 북돋우기 위해 귀족들에게 수염을 깎고 -1895년에 시행된 우리의 단발령과 비교된다- 서구식 옷을 입고 댄스파티에 참석하고 커피를 마시게 했다. 황제의 전방위에 걸친 서구화노력은 당연히 상당한 결실을 거두었다. 국민의 서양 제도와 문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유럽의 서적들이 활발하게 수입․번역되었다. 러시아 최초의 신문 베도모스티(기록)가 발행되고(1703) 영국과 프랑스에 이어 과학아카데미도 등장했다(1724).

재임기간 대부분 전쟁과 산업진흥

표트르 1세는 그밖에도 1718년에 전면적 개혁을 계획하고, 인구조사를 실시하여 인두세를 부과했다. 한편 국민은 그의 치하에서 군역과 중세에 시달렸는데, 그것은 그가 친정기간 30여 년의 대부분을 전쟁과 산업진흥 등으로 보낸 점을 고려할 때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인두세도 재정 강화의 한 방편으로 채택되었는데, 그것으로 국가재정수입은 3배 가까이 증가했지만 징수를 맡은 귀족의 농간도 한 몫 거들어 농민들은 이중삼중의 고통을 받았다. 1722년에는 14단계로 된 공무원 직제를 만들어 이론상으로는 최하위 공직자도 최상위 직으로 승진할 수 있게 했다. 그는 또한 1721년 이후 페르시아와의 전쟁에 승리하여 러시아의 남쪽 국경을 카스피해 연안까지 확장했다.

표트르의 서구화정책에 관한 이야기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은 상트페테르스부르크 건설이다. 그가 제위기간 내내 유념한 일 중의 하나는 북방진출이었다. 그는 북해와 대서양 같은 대양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트해의 관문을 손에 넣기 위해 1700년에 스웨덴을 침공해 대(大)북방전쟁(1700-21)을 도발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서전에서 무참하게 패했다. 러시아군은 18세의 소년 왕 칼 12세가 지휘한 스웨덴군이 지키던 나르바요새를 선공했으나 병력의 1/3과 다수의 장교를 잃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스웨덴은 그것으로 전쟁이 끝난 것으로 착각하고 모스크바로 진격하지 않았다. 결국 표트르 1세에게 흩어진 전열을 수습할 여유를 준 셈이었다. 새로이 10개 연대를 편성한 표트르는 병사들에게 황제가 아니라 조국 러시아를 위해 싸우도록 독전해 결국 승리했다. 중상을 입은 칼 12세는 후퇴하던 중 포탄을 맞고 처참한 최후를 마쳤다. 러시아는 나르바의 패전을 9년 만에 설욕하고 핀란드만과 발트해의 동쪽을 장악함으로써 북해로 나갈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한 셈이다.

대북방전쟁 후 표트르대제는 북해 및 대서양으로 나가는 현관을 마련하고 서유럽과의 교류를 보다 원활히 하기 위해 핀란드로부터 뺏은 네바강 어구 소택지에 도시를 건설해 새 수도로 삼았다. 10년의 세월과 연인원 5만 명이 동원된 그 공사는 3만 여명의 인명손실을 낳았다. 그처럼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 서구의 도시를 본떠 건설된 도시는 완공된(1713) 후 ‘표트르의 도시’란 뜻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불리었다. 그리고 수도가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바뀜에 따라 러시아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이 서유럽 쪽으로 옮겨갔다.

감기 하나에 무너진 근대화

그처럼 의욕적으로 근대화를 추진하던 표트르대제는 그러나 꿈을 못다 펼치고 52세에 타계했다. 1724년 11월 어느 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병기창으로 행차하던 대제는 병사를 가득 실은 배가 핀란드만의 여울 톱에 걸려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보고 허리까지 올라오는 물로 뛰어 들었다. 하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의 11월 추위는 50대에 들어선 황제에게는 역시 힘겨운 것이었다. 그로 인해 감기를 얻은 황제는 결국 타계했다. 1725년 1월 28일. 표트르대제는 힘을 다해 “모든 것을 맡긴다”고 쓴 후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누구에게? 유약했던 황태자 알렉세이는 이미 10년 전에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후 자살인지 타살인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죽었다.★ 결국 천한 신분출신이었으되 표트르가 죽기 4년 전에 황후가 된 예카테리나가 제위를 이었다(예카테리나 1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광장에 서 있는 대제 표트르의 동상에는 “어떤 정신이 이마에 새겨져 있고 어떤 힘이 그 속에 간직되어 있을까? 그의 말(馬)에는 어떤 불이 붙어 있을까? 자랑스런 말이여, 네가 뛰어오를 때 어느 곳에 발을 내릴 것인가?” 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러시아의 문호 푸슈킨의 글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유물변증법에 근거해 예상한 공산혁명은 자본주의의 후기단계는커녕 자본주의의 초기단계도 경험하지 못한 러시아에서 일어났지만(1917년의 볼셰비키혁명), 표트로대제가 1725년에 죽지 않고 10, 20년 더 통치했더라면 러시아의 역사는 어떤 길을 걸었고 나아가 유럽 현대사 또한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렇게 되었을 경우 아마도 서구화, 산업화가 보다 진척되는 등 러시아는 후진적 굴레를 더 일찍이 벗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러․일전쟁에서의 패배나 볼셰비키혁명은 없지 않았을까. 또한 소련이 단독으로 발을 빼지 않아 1차 대전의 양상도 크게 달라졌을 것이고, 스탈린의 피의 숙청도 아마 없었을 것이다. 혹 동유럽의 공산화나 세계의 공산주의운동은 물론 미국과 소련 중심으로 전개된 냉전도 그 모양을 달리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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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심만만하고 적극적이며 활달했던 거구의 표트르대제와는 달리 외아들 알렉세이는 유약하고 허약했다. 대제와 그로부터 버림받은 황후 예브도키아 사이에 태어난 알렉세이는 아버지의 개혁정치에 무관심했을 뿐만 아니라 자라면서 아버지에게 반감을 품었다. 대제는 기사적 생활을 싫어하고 하찮은 일에 몰두하는 등 제왕의 자질을 의심케 하는 태자 알렉세이 때문에 적지 않게 고심했다. 상속권 포기와 사제의 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받은 알렉세이는 억압을 견디다 못해 독일로 도피했다. 그후 아버지의 뜻을 쫒아 마지못해 귀국했지만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자살설과 독살설이 있으나 여하간 그는 사형이 집행되기 전에 감옥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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