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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발트함대, 대한해협에서 승리했다면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했더라면 적어도 일본이 한반도 전체를 식민지로 삼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태국이 미얀마까지 진출한 영국과 인도차이나를 장악한 프랑스 사이의 완충국으로 독립을 지킬 수 있었듯이 우리 또한 혹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서 주권을 보전하지 않았을까? 가정적 접근은, 기존의 역사체계를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에 사가들은 대체로 피하려 하지만, 사건의 역사적 본질을 바르게 파악하는데 도움을 주고 역사의 흐름을 옳게 인식하는 혜안을 기르게 한다.

“발트함대, 1905년 대한-쓰시마해협에서 일본 함대를 완패시키다.” 물론 사실은 전혀 달랐다. 발트함대는 일본해군에 완패했고, 더불어 러․일전쟁도 끝났다. 그리고 대한제국도 곧 숨을 거두었다.

1905년 5월 27~29일의 진해부근 해전에서 발트함대는 전함의 3분의 2가 침몰하고 6척이 나포되는 등 문자 그대로 참패했다. 겨우 4척만 블라디보스토크로 도주해 침몰을 면했다. 세계 최강으로 소문난 발트함대였지만 7개월의 지루한 항해로 함선도 수병도 지칠 데로 지친 상태에서 기동력과 무기에서 우세한 데다 하늘을 찌를 듯한 상하 병사들의 사기를 자랑한 일본 함대에 무릎을 꿇었던 것이다.

청일전쟁(1894~95)에서의 승리로 조선을 손아귀에 넣을 수 있게 된 위에 랴오뚱반도와 타이완 등을 얻어 욱일승천의 기세에 들떠있던 일본은 뜻하지 않게 삼국간섭에 부딪쳤다. 독일․러시아․프랑스의 위세에 눌린 일본이 결국 1895년에 랴오뚱을 청에 반환했지만 이후 한반도는 청․일 대신에 러․일의 각축장이 되었다. 삼국간섭을 주도해 해 일본의 랴오뚱 반환을 이끌어낸 러시아는 청과 비밀협약을 맺고 시베리아철도의 남만주 통과권을 얻었다. 그리고 랴오뚱반도의 전략적 요충지 뤼순을 따련과 함께 25년간 조차하는데 성공했다.

그처럼 만주를 자국 세력권으로 만드는데 성공한 러시아는 다시 한반도에 눈독을 들였다. 그들은 블라디보스토크와 뤼순을 연결하기 위해 마산의 조차를 기도하는가(1900) 하면 1903년에는 압록강을 넘어와 용암포의 조차를 요구했다. 한반도와 만주를 먹기 위해 청일전쟁까지 치른 일본은, 완강히 항의해 용암포를 개항케 했을 뿐 조차하는 것은 막았으나, 새로운 장애 러시아를 제거하지 않고는 목적달성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리하여 일본은 발트해와 지중해 등지를 통해 대해로 나오려는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줄곧 견제해온 영국과 동맹을 맺는(1902) 등 러시아와의 일전을 준비하는 일방 러시아와의 협상에 나섰다.

1903년 10월부터 다음해 1월 6일까지 러시아와 일본은 한반도를 놓고 협상했지만 서로의 주장이 팽팽히 맞설 뿐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일본은 최종적으로 한국에서의 일본의 최우등의 이익을 인정할 것과 러시아의 특수이익을 인정하되 일본 상인의 만주진출을 허용할 것을 요구한 반면 러시아는 일본이 한국을 군사적 목적으로 이용하지 말 것과 북위 39도를 경계로 북쪽에는 러시아군이 진주하고 남쪽에는 일본군이 진주할 것을 제의해 협상은 결렬되었다. 열강은 그때부터 38선이니 39선이니 하면서 한반도를 자기들 구미에 맞게 요리하려 했다.

협상이 결렬되자 일본은 연합함대를 편성하는 등 전쟁준비를 서둘렀다. 그리고 1904년 1월 12일에 어전회의를 열고 2월 2일까지 답을 요구하는 최종안을 러시아에 보냈다. 러시아가 회답을 보내는 대신 만주의 군대를 재편성하자 일본은 러시아와 단교한 다음 2월 10일 러시아에 선전포고했다. 하지만 일본함대는 그 이전인 2월 8일에 이미 인천 앞 바다에서 러시아함대를 포격해 2척을 침몰시켰다(러시아는 러․일전쟁 100주년인 2004년에 제물포해전에서 포함 카레예츠호와 함께 14척의 일본함대에 포위되어 힘겹게 싸우다 자폭을 택해 장렬한 최후를 마친 순양함 바략호의 영웅적 활약을 기렸다). 8일 밤과 9일에는 아래에서 보듯이 뤼순에 숨어든 일본의 구축함이 러시아 함대를 공격하고 뤼순을 봉쇄했다. 태평양전쟁 때 진주만을 기습공격 해 막대한 피해를 입힌 후 미국에 선전포고한 것을 연상케 한다.

시베리아철도를 남만주까지 연장하는 등 만주진출을 서둘렀지만 만주 일대의 러시아 군사력은 미미했던데 비해 일본은 한반도와 그 주변에 꾸준히 군사력을 증강시켰었다. 전술했듯이 도고 헤이하치로 휘하의 일본해군은 선전포고를 발하기 전인 1904년 2월 8/9일 밤 선전포고 없이 뤼순의 러시아군을 기습공격 해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경계를 소홀히 하던 가운데 예기치 못한 일격을 받은 러시아해군은 두 달도 더 지난 4월 13일에야 공세에 나섰지만 오히려 마카로프제독이 전사하는 등 큰 손상을 입었을 뿐이었다.

한편 제물포와 남포에 상륙한 4만의 일본군은 5월 1일 신의주 부근의 전투에서 러시아군 2200명을 사살했다. 다시 5월 26일의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서 러시아의 뤼순 주둔 해군과 랴오뚱 주둔 육군을 분리시키는데 성공한 일본은 6월 14일과 8월 25일의 전투에서도 이겼다. 그러나 일본은 뤼순을 쉽게 함락하지는 못했다. 일본은 1주일이면 함락할 것으로 예상하고 1904년 여름 이후 뤼순을 포위하고 수차례 값비싼 공격을 감행했으나 1905년 1월 2일에야 러시아군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러시아의 뤼순 주둔군 사령관운 3개월의 식량 외에 적절한 보급품을 약속받고 뤼순을 일본 해군에 넘겨주었다.

러시아는 그 2개월 후 뤼순을 탈환하고 랴오뚱에서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러일전쟁 중 최대의 육전인 선양회전을 벌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선양으로 후퇴해 건곤일척의 결전을 벼루든 러시아군 사령관 쿠로파트킨은 1905년 2월말에서 5월초의 전투에 33만 병력을 투입했으나 27만의 일본군에 참패했다. 8만 9000의 러시아군과 7만 1000의 일본군이 전사했다. 선양회전 후 프랑스는 러시아 주재 대사를 통해 강화회의를 주선하려 했지만 러시아 황실의 결전의지가 워낙 확고해 포기했다. 여하간 만주에서의 육전에 완패한 러시아로선 발트함대가 펼칠 해전에 최후의 운명을 걸 수밖에 없었다. 정비하느라 여름을 보낸 발트함대는 1904년 10월에 발트해의 리에피를 떠났다. 하지만 북해에서 영국 트롤어선을 일본 어뢰정으로 오인해 침몰시켜 영국에 사죄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해야했다.

그렇지 않아도 일본과 동맹을 맺은 영국은 수에즈운하 통과를 거부해 발트함대는 희망봉을 경유하는 긴 항로를 택해야 했다. 마다카스카르 부근을 항해하던 중 뤼순항 함락소식에 접한 사령관 Z. P. 로제스트벤스키는 회항을 건의했으나 증원군을 약속받고 항해를 계속했다. 그리고 수에즈를 경유해 달려온 증원함대와 베트남의 캄란만에서 합류한 발트함대는 7개월 여 만인 5월 27일에 대한-쓰시마해협으로 접어들었다.

발트함대의 항로를 예측할 수 없던, 그렇다고 일본 앞의 넓은 태평양 여기저기에 전선을 흩어 작전을 펼 수도 없던 일본 해군사령관 도고는 쓰시마해협에 국운을 걸기로 하고 함대를 집결시켰다. 오랜 항해에 기진맥진한 발트함대는 그의 소원대로 블라디보스토크 행 지름길인 대한-쓰시마해협 항로를 택했고, 그곳에 포진하고 호시탐탐 발트함대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전의를 불태우던 일본함대에 그처럼 완패했다. 도고는 심각한 열세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때 한산대첩과 명량해전 등에서 왜의 수군을 연파한 이순신장군의 작전과 전략 등을 주도면밀하게 연구했다던가.

발트함대에 완승을 거둔 일본은 그러나 5월 31일 미국 대통령 D. 루스벨트에게 휴전교섭의 중재를 요청했다. 당시 일본은 장기전으로 초래될 전력의 고갈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고, 따라서 강대국 러시아와 장기전을 벌리는 것을 가능하면 피하려 했던 것이다. 거기다 러일전쟁 중 런던과 뉴욕에서 거액의 국채를 발행한 일본은 그것의 상환을 위해 새로운 외채를 발행해야 할 상황이었다. 결국 미국의 포츠머드에서 강화회의가 열렸지만 일본은 러시아에 대한 영토와 배상금 요구를 관철시키지 못한 채 한국에서의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우월권을 인정받는 외에 남만주철도와 남사할린을 얻었다

대한제국은 러일전쟁의 위기가 고조되어 가자 1904년 1월에 대외중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일본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서울로 침입해 각종 건물을 점탈했다. 그리고 이어 무력으로 위협하여 일본이 한국의 영토와 독립을 보전해 준다는 한일의정서를 맺어(1904, 2) 한국을 정치적, 군사적으로 간섭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아울러 한국이 러시아와 맺은 일체의 조약은 폐기되었다. 일본은 1904년 8월 다시 한일협정서를 체결하고 일본이 추천하는 외국인을 외교고문으로 초빙하며 외국과의 조약체결도 일본과 협의하게 했다.

러․일전쟁은 ‘격량에 나부끼는 일엽편주’ 한반도를 국제뉴스에 자주 등장시켰다. 하지만 그것 뿐 청과 러시아를 따돌린 일본에게는 이제 거칠 것이 없었다.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는 일본의 한반도 점유를 러시아 견제를 위해 바람직한 일로 보았는가 하면 미국이 필리핀을 차지하는 대가로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인정하고자 했다. 그 결과 맺어진 것이 1905년 7월의 테프트-가쯔라 비밀협약이었다. 영국 또한 러일전쟁 이전에 맺은 영일동맹을 개정해 일본이 조선을 병합하는 것을 인정했다(1905.8). 그리고 1905년 11월에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지 않았는가.

주지하듯이 러․일전쟁은 조선과 일본은 물론 러시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국민적 저항에 부딪친 니콜라이 2세는 입헌체제를 약속했지만 짜르체제의 내적 한계가 여실히 드러나면서 러시아정국은 결국 볼셰비키혁명으로 치달았다. 러시아의 대외정책도 크게 바뀌었다. 한반도를 포함한 극동을 대신해 발칸반도가 러시아 대외정책의 중심자리를 차지했고, 이후 발칸반도를 둘러싼 범게르만주의 독일과 범슬라브주의 러시아의 과도한 제국주의적 대립은 결국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발트함대가 승리했더라면.” 적어도 일본이 한반도 전체를 식민지로 삼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태국이 미얀마까지 진출한 영국과 인도차이나를 장악한 프랑스 사이의 완충국으로 독립을 지킬 수 있었듯이 우리 또한 혹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서 주권을 보전하지 않았을까? “발트함대가 승리했더라면.” 러시아는 물론 유럽의 역사도 달라졌을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도 볼셰비키혁명도 없었을지 모른다. 일본에 패한 후 러시아가 발칸반도로 눈을 돌림으로서 발칸반도에서의 제국주의 세력 간의 충돌을 격화시켰고, 또한 러시아의 패전은 ‘비효율적 정부․상층시민의 봉건성․근대적 산업의 부재․지식층의 이데올로기적 무기력․대중의 무지 등 러시아의 후진성이 치유되지 못하는 중에 정치적 불만과 경제적 악화를 심화시켜 저항과 소요를 불러왔고 급기야 볼셰비키혁명으로 치달았기 때문이다.

러․일전쟁이 러시아의 패배와 일본의 승리로 끝난 이후 세계의 역사, 특히 극동과 동유럽의 역사는 그처럼 마치 예정된 길을 따라가듯이 전개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러시아가 러․일전쟁에서 일본을 꺾었거나 혹은 러․일전쟁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을 경우를 가정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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