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대통령 후보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낙선해 뉴딜정책을 펼 수 없었다.” 아니다. 당선된 루스벨트는 후보 때 구상한 뉴딜(New Deal)을 중심으로 대공황 타개에 전력을 쏟았고, 결국 공항을 극복하고 미국은 다시 번영의 길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가 낙선했거나 법원의 위헌결정 등 이런저런 이유로 뉴딜정책이 제대로 집행되지 못했다면 미국은 언제 공황에서 벗어났을까? 과연 미국과 세계가 공황을 극복할 수나 있었을까?
W. G. 하딩의 급서로 1923년부터 1929년까지 미국을 이끈 C. 쿨리지 대통령은 이른바 ‘쿨리지의 번영’을 자랑했다. 쿨리지 시대의 전설적 번영은 주식시장 성장을 살펴보는 것으로 족하다. 주가는 천정부지로 올랐고 증권거래소에 드나들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쿨리지는 “미국이 해야 할 일은 경제 활동뿐이다”라고 자랑했다.
미국은 본격적 대량생산 - 대량소비 시대로 들어서고 있었다. 급성장한 자동차 산업은 도로망의 건설을 촉진했고 철강·유리·고무 공업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당연하지만 국제교역에서의 미국의 지위는 가히 독보적이었다. 어떤 나라도 미국의 경쟁국이 될 수 없었다. 고작 7개월 뒤면 닥쳐 올 대공황을 상상도 못한 H. 후버는 대통령 취임연설(1929)에서 “우리의 국토는 자원이 풍부합니다. 풍광이 아름답습니다. 거기에 수백만의 행복한 가정이 있습니다. 안락과 기회로 충만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미국은 그러나 갑자기 내습한 ‘대공황’으로 남북전쟁 이후 최대의 시련을 겪어야 했다. 1929년 10월 21일에 이어 24일(검은 목요일)에 주식가격이 폭락하고 뒤이어 월가(街) 전체를 강타해 29일(공포의 화요일)에는 50여 개 주요 주식가격이 평균 40% 급락했다. 투자자들과 그들에게 돈을 빌려 준 채권자들은 물론 은행도 견디지 못해 파산하기 시작했다. 미국발 공황으로 많은 나라가 곤경에 처했지만, 패전의 잿더미에서 허우적거리던 독일을 제외하고는 미국이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 1929~1932년 사이에 미국의 산업생산은 47%나 감소했다. 전체 노동인구의 1/3에 달하는 1600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고, 1929년에 1000억 달러가 넘던 국민총생산이 1933년에는 550억 달러밖에 안 될 정도로 떨어졌다.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많이 늘어난 미국의 산업생산은 전후에 오히려 더 증가했지만 영국과 프랑스 등 전쟁 채무국의 구매력은 크게 감소했다. 거기에다 공산품의 수출이 감소된 채무국이 금(金)으로 전채(戰債)를 지불하면서 금값이 폭락했고, 결국 ‘과잉생산 - 조업 단축 - 실업 - 저생산 - 물자 부족’의 악순환의 경제공황이 일어났다. 공산주의 소련의 저가 공산품도 공황을 확대시켰다.
수많은 실직 노동자와 파산한 농민이 불을 끄고 일당을 벌기 위해 워싱턴 주의 아름다운 산야에 고의로 불을 지르기도 했다. 후버가 자랑한 행복한 수백만 가정의 잠자리는 공원의 벤치로 바뀌었다. 최악의 해인 1932년 여름에 제1차 세계대전의 참전용사 2만 5000명이 걷거나 지나가는 차에 편승해 무작정 워싱턴으로 모여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일자리를 찾기는커녕 잠자리조차 얻을 수 없었다. 무일푼의 떠돌이 무리가 도시와 농촌의 거리를 메웠다. 가장은 가족과 함께 펜실베이니아 길가의 빈집을 찾거나 강변에 판잣집을 지었다.
“그들에게는 이제 유랑할 수 있는 서부 전체의 땅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일을 찾아서 허둥지둥 뛰어다녔다. 국도는 사람들의 물결이었다. 도로변의 도랑 둑에는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그 뒤에도 이동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1939)의 한 구절이다. 경이로운 경제성장, 안락과 무한한 기회로 충만했던 미국은 갑자기 6000명의 숙련공을 모집하는 러시아의 한 구인광고에 10만 명이 넘는 취업희망자가 몰려드는 나라로 전락해 버렸다. 미국의 자존심이 여지없이 무너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자신감마저 잃게 되었다.
영국은 거국연립내각을 수립하고 영국연방 제국과의 특혜관세협정과 무역협정(오타와협정, 1932)을 중심으로 하는 블록(Bloc)경제로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가려 했다. 프랑스 역시 사회당 중심의 인민전선내각이 혼신의 노력으로 공항을 극복해 나갔다. 반면 파시즘 체제인 데다 국내시장이 좁고 식민지가 없던 독일·이탈리아·일본 등은 이웃 나라들을 식민지로 희생시켜 대공황에서 탈출하려 했다.
대통령에 취임하던 1933년 3월 4일에도 은행의 파산을 목격해야 했던 루스벨트는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라며 불퇴전의 용기와 결의를 과시했다. 39세에 앓은 소아마비로 두 다리가 마비된 신체적 악조건에도 3선 대통령이 되고(1940),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다시 당선돼 미국 역사상 유일의 4선 대통령으로 기록되어 있는 루스벨트. 확고한 신념과 단호한 태도로 경제적 회복은 물론 국민의 자신감과 희망을 회복시키기 위해 노력한 그의 모든 정책의 밑바탕은 ‘인간의 존엄성’이었다.
‘뉴딜’은 루스벨트가 1933년부터 1939년까지 연방 정부의 활동 영역을 확대해 단행한 경제적 구조 및 산업·농업·재정·수력·노동·주택의 개혁 프로그램을 의미한다. 뉴딜정책은 구제(Relief)와 부흥(Recovery)은 물론 개혁(Reform)을 포함했기 때문에 흔히 3R 정책이라고 부른다. 루스벨트는 그처럼 구호·복구·개혁의 목표 아래 일련의 입법 및 행정 조처를 통해 공황에 대처했는데 정책 추진에 필요한 법률은 대통령 취임 100일 안에 거의 다 제정할 수 있었다. 루스벨트는 취임 다음 날 금(金) 거래를 중지시킨 후 ‘은행의 휴일’을 선언했다. 그리고 3월 9일에 정부가 지불능력이 있는 은행을 지원하고 재조직해 영업을 재개할 수 있게 하는 ‘비상금융법’을 의회에 제출했고, 상·하원은 그 법안을 통과시켰다.
뉴딜정책의 최우선 과제 중의 하나는 거대한 실업인구의 고통을 덜어 주는 것이었다. 정부가 단기원조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임시 일자리를 마련하고 건설 사업을 일으켰으며 젊은이가 국립 산림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공공사업국(WPA)과 민간식림치수대(CCC)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기업과 농촌을 부흥시키기 위해 국가부흥국(NRA)에 기업 활동·임금·노동시간·어린이 노동·집단계약 등을 통제해 산업규약을 만드는 권리를 부여했다. 농업과 농민을 지원하기 위해 1933년에 농업조정법(AAA)을 제정했다. 곧 연방 정부가 개입해 농업생산량을 조절하고 과잉생산물을 정부가 매입하되 농민으로 하여금 계획 생산하게 해 공급과 수요를 조절하려 했다. 이어 전국산업부흥법(NIRA)을 마련해 산업부문 전반의 생산조절과 최저가격을 정하게 했다. 물론 거기에는 고임금과 실업자 구제책이 포함되어 있었다.
뉴딜정책은 또한 1929년의 그것과 같은 주식시장의 붕괴 및 그에 따른 은행파산을 막기 위해 재정 체계를 통제했다. 즉, 연방예금보험조합(FDIC)은 연방 준비제 회원 은행들의 예금 지급을 정부가 보증할 수 있게 했고 주식시장의 부정거래로부터 공적 자금을 지키기 위해 증권거래위원회(SEC)를 만들었다. 거기에 더해 연방 정부는 테네시강계곡개발계획(TVA)을 통해 전력 부문에도 개입했는데, 그 계획은 일자리를 만들어 실업자를 구제하는 것 외에 7개 주에 걸쳐 값싼 전기를 공급하고 홍수를 막았으며 관개(灌漑)를 개선하고 질산칼륨비료를 생산할 수 있게 했다. 테네시 강의 여러 지류에도 댐을 건설하는가 하면 약 8000㎞의 송전망을 가설해 인근 지역에 값싼 전기를 보급했다. 그것은 지역 개발의 필요성 및 가능성과 함께 공공사업의 타당성을 입증한 것이었다. 관개와 홍수 조절 등 치수, 전력 개발, 관광자원 개발, 일자리 창출 등 다목적 TVA는 주지하듯이 후일 개발도상국 국토 개발의 모델이 되었다.
1935년에 이르러 뉴딜정책의 중심은 노동자를 비롯한 도시민을 지원하기 위한 조처들로 옮겨갔다. 1935년의 ‘와거너법’(WA)은 노동자의 단결권과 단체교섭권을 인정한 위에 산업 부문에서의 연방 정부의 권능을 크게 증대시켰으며 노동쟁의조정국(NLRB)을 세워 노동조합의 조직력을 향상시켰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공정노동기준법을 제정해 일부 산업에서 최대 근로시간과 최소 임금제를 도입했다. 그리고 기존의 직능별 노동조합인 미국노동자총동맹과 별도로 산업별 노동자회의를 새로 조직해 노동자에 대한 지원과 노동자의 복지 향상을 기했다.
뉴딜정책 중 가장 넓은 범위에 걸친 것은 1935년과 1939년에 제정된 사회보장법(SSA)인데, 그것은 연방 정부가 65세 이상의 노인에게 적절한 금액의 은퇴 수당을 지급하고 실업자 수당을 지급하는 것을 비롯해 빈곤자·불구자·무능력자·과부 등을 구제할 수 있게 했다. 1935년 이후 제정된 법률 중에는 연방 준비제도 강화를 위한 은행법, 일자리를 창출해 고용을 확대시키기 위한 긴급구제금법 등도 있다. 또한 그동안 지원에서 소외된 주택소유자를 지원하기 위한 법률이 만들어져 저당설정을 가능하게 하고 나아가 주택개량이나 저당금을 위한 은행융자를 보장했다. 즉, 도시민이 저당 5년 후 다시 저당할 수 있는 기금 마련을 위해 만든 주택소유자대부법을 제정하고 중산층의 주택 개선을 지원하기 위한 연방주택관리국을 설립했던 것이다(1934).
하지만 뉴딜정책은 위헌 시비에 시달렸다. 특히 ‘산업부흥법’은 대법원의 위헌 결정으로 적잖게 위축되었다. 헌법상 산업을 통제하고 사회·경제적 개혁을 추진할 권리가 연방 정부에게 없다는 것이 위헌 판결의 근거였다. 뉴딜정책의 모든 조처들의 합법성을 믿은 루스벨트는 1937년 초에 법원의 재조직을 제의했지만 격심한 반대에 부딪혀 실패했다. 그러나 그는 논쟁을 불러일으킨 법률들을 제정할 수 있었다. 사회주의 세력 등의 저항에도 뉴딜정책은 공항을 점차 극복해 갔고, 따라서 국민적 지지를 얻어 갔다.
뉴딜정책은 결국 미국으로 하여금 공황을 극복하게 했고 루스벨트는 1936년 선거에서 압승했다. 그것은 자유경쟁 및 개인주의 원리를 바탕으로 하는 미국적 이념에서 벗어나는 통제 정책이었고 국가가 재화의 분배에 관여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맹목적 자유경쟁을 지양했을 뿐이지 완전한 국가 통제 체제는 아니었고 따라서 사회주의적 정책으로 규정할 수 없는 정책이었다. 그것은 재화의 합리적 분배를 통해 피라미드형 부자 - 빈자 구성 형태를 다이아몬드형의 그것으로 바꾸려는 것이었다.
뉴딜정책은 위헌 시비에 이어 실패한 정책으로 보는 평가가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다. 곧 경기를 침체시켜 공황을 장기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빈부차를 격화시켰고 TVA도 예산만 낭비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미국이 공황을 이긴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덕분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뉴딜정책이 공황을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나아가 자본주의에 탄력을 부여했음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것이 위법성 시비에 말려 비틀거렸거나 그것의 여러 조처들이 위기를 극복하는 데 미흡했을 경우 미국과 세계는 대공황의 고통을 더 오래 겪어야 했을 것이다. 작금 미국발 금융위기가 세계를 짓누르기에 새삼스레 뉴딜정책을 되짚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