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는 독일군의 진격을 재촉했고 영국군과 프랑스군 34만여 명은 덩케르크에서 탈출하지 못했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달랐다. 히틀러는 1940년 5월 24일 돌연 독일군의 파죽지세 진격을 중지시켰고 그로 인해 시간을 번 영·불군은 아슬아슬하게 덩케르크에서 철수할 수 있었다. 히틀러가 진격을 중지시키지 않았더라면 제2차 세계대전 초기의 전황은 어떻게 달랐을까? 제2차 세계대전 초반전은 ‘당나귀전쟁’이라 비판받지만 영국과 프랑스도 개전 초에 독일군의 북유럽으로의 진격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등 실책을 범했다. 독일은 폴란드를 전격적으로 점령한 데 이어 덴마크 전역과 노르웨이의 주요 항구들을 점령했다(1940. 4~6). 영국과 프랑스는 군대를 투입해 노르웨이를 지원했으나 독일 공군에 압도당해 철수했다. 독일은 1940년 5월에 네덜란드를 5일 만에, 벨기에를 2주 만에 장악했다. 그리고 난공불락의 마지노선을 뚫은 후 파리를 장악한(6월 15일) 독일은 6월 22일에 프랑스의 3/5를 장악했다. 소련 또한 라트비아 3국에 이어 핀란드를 침공하는 등 이른바 ‘대조국전쟁’에 나섰다.

최고의 전략가임을 자랑한 히틀러는 독소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소련을 침공해 자신의 몰락을 재촉했지만 전쟁 초기 덩케르크작전에서도 큰 실책을 범했다. 개전 초기의 벨기에 전선. 연합군의 북부군과 남부군 사이의 모든 연락은 아르덴에서 솜강을 향해 활(弓) 대형으로 서진하던 독일군에 의해 차단되었다. 브뤼셀 동쪽의 다일 방어선에서 셸트 강으로 퇴각한 북부의 연합군은 포위되었고, 영국군 사령관 거트 공(公)은 이미 1940년 5월 19일에 바다를 통한 영국군(BEF)의 철수를 고려했다. 그러나 그는 공세적 작전을 펴라는 런던으로부터의 명령에 따라 5월 21일에 아라스로부터 남쪽으로 독일군의 오른쪽을 공격했다. 하지만 그의 반격은 독일군 사령부를 잠시 놀라게 했을 뿐 작전의 성공에 필요한 무력(武力)이 크게 부족했다. 그 사이 하인츠 구데리안 휘하의 독일 탱크들이 볼로뉴와 칼레를 휩쓸고 올라온 다음 덩케르크 부근 방어선을 지나고 있었다. 그러나 5월 24일. 불가사의한 히틀러의 명령이 그들의 진격을 멈추게 했다. 그래서 구데리안의 탱크들은 덩케르크로 돌진할 수 있는 위치로부터 해협방어선으로 물러났다.
당시 덩케르크는 영국군의 주력부대가 유럽대륙으로부터 철수하는 데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항구였고,

영국 내각은 결국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철수를 결정했다. 영국군의 해안으로의 철수는 독일군이 덩케르크를 점령하기 전에 이루어져야 했다. 절체절명의 다급한 상황에서 영국 해군성은 철수작전에 도움이 될 경우 아무리 작은 배일지라도 징발했다. 철수는 5월 26일에 시작되었지만 27일에 이르러서는 분초를 다투는 일이 되었다. 발터 폰 라이헤나우 휘하 독일 6군단의 진격으로 좌익과 중앙이 무너진 벨기에가 휴전을 호소한 데다 독일공군(Luftwaffe)이 27일에 폭탄을 퍼부어 덩케르크의 부두가 기능을 거의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10마일에 걸치는 해변에 모여 있던 수만 명의 영국군은 해군으로 징발됐지만 대개 아마추어 뱃사람이 운행하는 소형 선박들에 올라타 철수해야만 했다. 다행인 것은 다수의 영국군이 파괴된 부두의 방파제를 이용할 수는 있었다는 점이다.
작전은 6월 4일에 종료됐고, 영국군 19만 8000명과 프랑스군과 벨기에군 14만 명이 구출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중무기와 장비의 대부분을 포기해야 했으며 41척의 구축함 중 6척은 침몰하고 19척은 심한 손상을 입었다. 구출된 병사들은 영국군 정예병의 상당 부분을 점했고 따라서 연합국 측으로서는 매우 값진 작전이었다.
1940년 독일군의 진격으로 덩케르크 해안지대에 포위된 영국, 프랑스군들.사실 영국에서 출격한 영국 공군기의 폭격도 덩케르크 철수작전의 기적적 성공에 기여했다. 하지만 화급한 상황에서 별다른 희생 없이 작전을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은 구데리안의 탱크들을 멈추게 한 히틀러의 24일의 명령이었다. 그는 여러 가지를 고려해 그 명령을 내린 것으로 평가받는다. 즉, 독일 공군사령관 헤르만 괴링은 히틀러가 공군만으로도 덩케르크에 집결한 연합군을 격파할 수 있다고 잘못 확신했고, 히틀러 자신도 영국군이 굴욕적으로 항복하지 않을 경우라야 평화조약을 더 용이하게 받아들일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독일 육군사령관 발터 폰 브라우비슈가 히틀러를 설득해 독일군을 덩케르크로 재진격시켰을 때는 이미 연합군이 철수한 3일 이후의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독일군은 전열을 재정비한 영국군의 보다 강력해진 저항에 부딪혀야 했다. 히틀러는 독일군의 진격을 다시 중지시키고 남쪽으로 진군케 하는 한편 솜-아이슨(Somme-Aisne)선 공격을 준비했다. 프랑스 북부에서의 전투는 구데리안과 라이헤나우가 남쪽으로 향한 후 퀼러 휘하의 전사들에 의해 마무리되었다. 독일군은 3주 동안 6만 명의 희생자를 낸 대가로 100만 명 이상의 포로를 손에 넣었다. 하지만 22만의 연합군이 북서 프랑스의 항구들(셰르부르, 생말로, 브레스트, 생나제르)에서 구출되었다. 그리하여 덩케르크에서 철수한 병사들과 합쳐 모두 55만 8000에 이르는 연합군이 사지에서 철수할 수 있었다.
대전의 추이를 따라가 보기로 하자. 마지노선이 뚫리고 뒤이어 파리가 점령되고(6월 15일) 국토의 3/5이 점령되자 프랑스는 어쩔 수 없이 휴전을 제의해 성사되었다(6월 22일). 그리고 페탱 원수를 수반으로 하는 꼭두각시 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런던으로 탈출하여 자유프랑스를 이끈 드골장군은 다음 날 BBC 방송을 통해 “우리의 패배는 최종적인 것인가? 그렇지 않다. 프랑스는 고립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탈리아도 구축국의 일원으로 참전한(6월 10일) 가운데 유고슬라비아에서 그리스에 이르는 동남부 유럽을 석권하고 북아프리카까지 장악한 히틀러는 1940년 8월부터 공군기를 동원하여 영국 도시들을 무차별 폭격했다. 영국은 수상 처칠의 지도하에 타협을 거부했고, 히틀러는 결국 영국 상륙계획을 포기해야 했다.
영국의 저항으로 서부전선에서 결정적 승리를 얻지 못한 히틀러는 1941년 6월 22일에 독·소 불가침조약을 파기한 다음 소련을 침공함으로써 결국 나폴레옹의 전철을 밟기 시작했다. 소련을 과소평가한 히틀러는 소련을 제압해 서부전선에 전력을 집중 투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를 타도하고 나아가 독일의 생활권을 동유럽에서 확보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생각했던 것이다. 9월에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 육박하고 10월에 우크라이나를 점령하는 등 파죽지세의 진격을 자랑하던 독일군은 그러나 소련의 후퇴작전과 동장군(冬將軍)에 무릎을 꿇고 결국은 수비태세를 취해야 했다.
한편 미국은 1941년 3월에 영국에의 전쟁물자 공급을 승인함으로써 중립을 포기했다. 이어 동년 8월에는 루스벨트 대통령이 처칠과 더불어 대서양상의 영국전함에서 ‘대서양헌장’을 발표하고 전후에 추구할 민주주의의 원칙들을 선언했다. 이후 일본이 진주만공격(1941년 12월 8일) 직후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자 독일과 이탈리아도 미국에 선전포고 하여 미국도 본격적으로 참전하게 되었다. 그 사이 전선은 더욱 확대되어 일부 중립국(포르투갈·스위스 등)을 제외한 전 유럽이 전쟁에 휩쓸려 들어갔다. 하지만 1942년 가을에 볼가 강에 도달한 독일군은 사력을 다했으나 스탈린그라드 공방전에 패해 후퇴해야 했고, 그것은 전쟁의 한 전환점이 되었다.
1943년부터 주도권을 장악한 연합군은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에 상륙했다. 8월 15일에는 연합군이 프랑스의 지중해 연안에 상륙했다. 그 이전에 아프리카전선에서 롬멜의 독일군에 반격을 개시해 튀니지를 탈환한 연합군은 1943년 7월에는 시칠리아에 상륙하고 9월에는 이탈리아 본토에 상륙했다. 무솔리니 정권은 무너지고 이탈리아는 연합군과 제휴했다. 이탈리아 주둔 독일군의 완강한 저항에 연합군의 진격이 일시 멈칫했으나 1944년 6월에 결국 로마를 탈환했다.
동부전선에서도 스탈린그라드전 이후 독일군을 추격하던 소련군은 1944년 말에 독일국경에 도달했다.

생포된 독일군은 잔혹한 보복을 당했고 요새들은 파괴되었다. 동시에 서부에서도 연합군이 독일 국경을 넘었다. 문자 그대로 사면초가에 처한 히틀러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독일은 1945년 5월 7일에 항복했다. 그리고 일본의 진주만공격으로 촉발된 태평양전쟁도 1945년 8월 6일에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투하되고 9일에는 소련이 일·소 불가침조약(독일의 소련 침공 2개월 전인 1941년 4월 13일에 일본과 소련은 ‘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을 깨고 만주로 진격하던 중 일본의 무조건항복으로 막을 내렸다.
제2차 세계대전은 여러 면에서 제1차 세계대전과는 비교되지 않는 전쟁이었다. 폭격기나 전투기는 물론 개량된 화포와 자동화기 등이 엄청난 살상력을 자랑했다. 특히 원자탄의 가공할 파괴력은 세상을 놀라게 했다. 원자탄의 파괴력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폭격기 편대들은 인구밀집 도시들을 순식간에 폐허로 만들었다. 1945년 11월의 교황청 통계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의 전사자는 2200만이 넘고 부상자는 3440만이었다. 다른 통계에 따르면 교전국의 사망자와 실종자는 1500만이 넘었다. 미국도 1940년 경우 미국인 450명 중의 1명에 해당하는 30만 명이 전사했다. 물론 중국·한국·필리핀 등 아시아인도 다수 희생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3배를 넘는 희생자들 가운데는 민간인도 다수 포함되었다. 전쟁물자의 수요 또한 엄청나게 증대해 국가가 온통 군수공장으로 변하고 전 국민이 군수품의 생산에 매달려야 할 형편이었다.
더불어 이전의 사회질서는 완전히 무너졌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강제로 추방되거나 적군의 공격목표가 되었다. 특히 독일·폴란드·소련 거주 유대인을 비롯해 다수의 유대인은 집단수용소의 가스실 등에서 살해되었다. 독일군이나 일본군에 점령된 여타 지역의 사람들도 살육당하거나 비인간적 학대를 받았다. 피정복민이나 포로 군인들은 독일과 일본의 전시경제를 위해 착취당했으며, 어떤 저항도 폭력으로 진압되고 털끝만한 혐의도 죽음으로 다스려졌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때와는 달리 전쟁도발자들은 전후 개별적인 책임도 져야 했다. 뉘른베르크전범재판과 맥아더사령부에 의한 일본의 전범재판에 의한 처벌이 그것이다.
히틀러가 오판하지 않았고, 따라서 연합군을 덩케르크로 몰아붙이면서 쇄도하던 독일군의 작전을 5월 24일에 중단시키지 않았다면 대전의 초반 전황은 어떤 양상으로 진행되었을까? 영·불 연합군은 덩케르크에서 치명적 손실을 입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영국이 전의를 상실해 히틀러와 협상테이블에 마주 앉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 북부의 연합군이 독일 탱크부대의 노도와 같은 공세에 포위되거나 후퇴해야 할 정도로 위기에 처해 있었다는 점, 그리고 덩케르크에서 철수한 연합군이 34만에 달했고 그들이 정예군이었음을 염두에 둘 경우 히틀러의 불가사의한 명령이 없었을 경우 연합군이 개전 초반에 입었을 손실과 그 손실이 대전 전반에 끼쳤을 영향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