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화산성 안파루(남문).
강화동종. 강화역사관에 있으며 강화성문을 여닫는 시간을 안내해주었다. 서울을 지키는 천연 요새
섬을 찾아가는 여정은 이제 강화도로 향합니다. 강화도는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 큰 섬으로 우리나라의 역사가 모두 축소되어 있다고 할 만큼 유적지가 많은 곳입니다.
단군이 하늘에 제사 지내기 위해 쌓았다는 참성단을 비롯하여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인돌군도 있고 팔만대장경판도 여기서 만들어졌습니다. 서울로 들어가는 길목이어서 다른 어느 곳보다 외침을 많이 받았으며 특히, 외세의 개방 압력에 제일 먼저 노출된 곳이었습니다. 유사시에는 도읍지인 개성과 한양을 대신하는 피난처로 활용되었고요.
서울을 지키기 위한 천연 요새였던 이곳에는 섬 구석구석 군사시설로 꽉 차 있었습니다. 강화도로 떠나는 여행은 이렇게 강화도에 있는 관방시설을 둘러보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외규장각, 되찾아야 할 기록
고려 고종 때입니다. 몽골의 침입에 맞서 항쟁하던 고려는 드디어 개성을 떠나 강화도로 천도를 단행합니다. 서기 1232년의 일입니다. 도읍을 옮겼으니 성을 쌓고 궁궐을 지어야 하겠죠? 그 흔적이 강화산성과 고려궁터에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강화도는 39년간 항몽의 근거지였습니다.
강화산성은 원래 토성이었는데 조선 초에 이르러 석성으로 개축되었습니다. 동문 망한루, 서문 첨화루, 남문 안파루, 북문 진송루의 4대문을 두었으며 강화성문을 여닫는 시간을 알리는 데 쓰던 강화동종이 현재 강화역사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고려궁터라고 하지만 막상 그곳에는 고려시대 궁궐의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그곳에서 볼 수 있는 건물들은 조선시대 관아 건물이었던 동헌이나 이방청, 도서관이었던 외규장각 건물뿐이죠. 강화유수부 동헌은 조선시대 강화도가, 유수가 다스리는 유수부(留守府)였으며 이곳이 서울을 지키는 군사적 요충지였음을 말해줍니다. 서울을 둘러싼 개성이나 광주, 수원이 강화도와 함께 유수부가 설치된 곳이었죠.
이곳에 있던 외규장각은 1782년 2월 정조가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설치한 도서관입니다. 하지만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서적을 약탈하고 불에 태우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더군다나 그때 약탈해간 고서들을 아직도 돌려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기록이요, 되찾아야 하는 기록인 셈입니다.

지난 1993년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찾아와 한국의 고속철도기종으로 TGV를 선정하면 외규장각 도서를 돌려주기로 하고 ‘휘경원 원소도감의궤’를 반환하는 시늉을 했습니다. 하지만 고속철도기종으로 TGV가 낙찰되었건만 아직껏 그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약탈한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동안 오랜 시간이 지났다. 따라서 이제는 프랑스 소유의 문화재가 된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억지주장일지 모르겠습니다.
한 포털사이트에서는 외규장각 도서 환수 모금 운동을 펼치고 있고 민간단체에서도 프랑스 정부를 상대로 적극적으로 반환운동을 펼치고 있는 중입니다. 〈르몽드〉지에 실린 외규장각 도서 반환과 관련한 광고 문구처럼 외규장각 도서가 반환될 때 대한민국 국민은 휴식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울러 전 세계 낯선 땅에 잠들어 있는 7만여 해외 문화재가 하루빨리 우리 곁으로 돌아오기를 기원합니다.
정족산성, 살아 있는 기록
외규장각과 달리 정족산성 내 정족산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실록 등 소중한 자료는 다행히 화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양헌수 부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1866년 프랑스는 자국의 선교사를 처형한 것을 구실로 7척의 군함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습니다. 병인양요입니다. 당시 양헌수 장군은 강계포수 300여 명과 함께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과 맞서 싸웠고 그들을 물리쳤습니다. 이로써 사고(史庫)가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죠. 삼랑성이라고도 불리는 정족산성을 막 통과해 전등사로 가는 길에 양헌수 장군 승전비를 만날 수 있지요.
돌이켜보면 우리나라 실록의 역사는 고려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춘추관과 예문관을 상설하고 사관을 두어 기록하게 하였으며 전왕시대의 역사를 기록해 실록이라 해서 사고에 보관해왔습니다. 대개 사고에는 실록을 보관하는 사각(史閣)과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璿源寶閣)이 함께 있습니다. 조선왕조는 1409년부터 1413년까지 4년간의 태조실록 15권을 편찬한 것을 시작으로 정종실록 6권, 태종실록 36권을 편찬하고 위 3조실록 각 2부씩을 등사하여 서울의 춘추관과 충주사고에 보관하였습니다. 그러나 2부의 실록만으로는 향후 보존이 염려돼 1445년에 다시 2부를 더 등사하여 전주와 성주에 사고를 신설하고 보관하게 됩니다. 하지만 1592년 임진왜란으로 인해 전주사고를 제외한 나머지 사고의 실록은 모두 소실되고 맙니다. 전주사고의 경우 실록을 내장산 용굴암에 옮겨 보관했기 때문에 무사했던 것이죠.

1606년(선조 39년) 전주사고본은 서울과 가까운 강화로 옮겨져 명종대까지의 실록이 더해져 3부가 더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전주사고본 원본은 마니산사고에, 나머지 3부는 춘추관·태백산·묘향산 사고에 보관합니다. 오대산사고에는 교정본을 보관하였죠. 사고의 관리는 인근의 절에서 담당하게 했습니다. 이후 병자호란과 이괄의 난 등으로 춘추관과 마니산에 보관되어 있던 실록이 불에 타거나 파손되었으므로 다시 4부의 실록이 작성되어 이곳 정족산, 태백산, 적상산, 오대산에 1부씩 보관합니다. 이 중 오대산에 있던 실록은 일본으로 옮겨졌다가 관동대지진 때 대부분 불타버렸고 적상산의 것은 북한에 있습니다. 지금 규장각에 남아 있는 실록은 정족산사고본, 태백산사고본입니다. 정족산사고본이 남아 있게 된 데는 외규장각 침탈과 같은 문화적 만행을 막아낸 양헌수 부대의 승전이 있었기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정족산성 내에는 가궐터도 남아 있습니다. 가궐을 짓고 마니산 참성단에서 제사를 지내면 몽골이 물러가고 주위 대국들이 와서 조공할 것이라는 풍수설에 의해 지어진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역사의 시곗바늘은 그 예언을 벗어나버렸군요.
어재연 장군기 (인천시립박물관에 원본이 있다). 신미양요의 격전지 광성보강화도를 여행하다 보면 ‘진(鎭)’, ‘보(堡)’, ‘돈대(墩臺)’등이 어떻게 다른지 궁금하실 겁니다. 이 군사시설들은 수장이 누구냐에 따라 그 위상이 달라지겠습니다만 대략적인 규모를 기준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진은 덕진진, 초지진, 월곶진, 제물진, 용진진 등 모두 다섯 군데가 있었습니다. 강화지역 문화유산을 안내해주시는 분에 의하면 진은 지금으로 치면 대대급 규모를 말한다고 합니다. 보는 광성보, 철곶보, 장곶보, 선두보와 같은 곳으로 모두 일곱 군데에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중대급 규모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돈대는 해안가나 고지에 설치된 소규모 군사시설로 그 형태는 원형, 타원형, 네모형 등 다양합니다. 오늘날 초소 정도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몇몇 돈대가 모여 하나의 진이나 보를 이루게 됩니다. 강화도에는 5진 7보 53돈대와 8포대가 해안을 따라 설치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1970년대 복원사업을 거쳐 관광지로 알려진 곳은 덕진진, 초지진, 광성보, 용진진, 갑곶돈대 등이 대표적입니다.
광성보의 경우도 광성돈대, 손돌목돈대, 용두돈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곳은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입니다. 미국의 장삿배인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와서 무역할 것을 요구하자 사람들이 그 배를 불태워버렸습니다. 이 사건을 빌미로 해서 미국은 1871년 군함을 앞세워 조선을 침략하는 데 이것이 신미양요입니다.
초지진을 거쳐 강화해협으로 들어선 미군함은 광성보 근처에서 어재연이 이끄는 조선군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당시 미국은 1861년부터 4년간 남북전쟁을 겪으면서 풍부한 전쟁 경험을 갖추었으며 근대화된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상대적으로 조선군의 무기는 형편없어서 전쟁은 어쩌면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이었다고 하겠습니다.
백병전으로 전개된 전투에서 총지휘관인 어재연과 그의 동생 어재순 등 조선군은 거의 전멸하고 미군은 3명만 희생되었다고 합니다. 여러 모로 보나 비교가 안 되는 불리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싸운 그들의 희생정신을 높이 사고 싶습니다.
용두돈대에 있는 강화전적지정화기념비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적혀 있습니다. 격전지였던 강화도를 핵심적으로 잘 나타낸 말이 아닐까 싶네요.
강화는 한강 어귀에 있어 사면에 물이 둘리고 섬 안에는 산악이 중첩하여 천연적인 요새지다. 역대를 통하여 전란 때에는 피란처가 되었지만 다른 한편 병화를 입어 편안한 날이 없었기에 이 언덕 저 갯가 풀 한 포기 돌 한 덩이에 역사의 사연이 서리고 끼치지 않은 것이 없다.(이하 생략)
손돌목과 수자기
용두돈대에서 강화해협을 바라보면 물살이 급한 곳이 있습니다. 이곳을 손돌목이라고 부릅니다. 이곳에는 뱃사공 손돌과 관련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광성보 손돌목고려 고종(혹은 이괄의 난을 피해 강화도로 향했던 조선 인조 때라고도 합니다)이 몽골의 침입을 피해 강화로 피난을 가는데 손돌이라는 뱃사공이 뱃길을 안내하게 되었습니다. 강화해협을 건너 강화도로 향하던 배가 점점 여울목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피난길에 있던 왕은 손돌을 몽골의 첩자로 의심해 즉시 처형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손돌은 이곳의 지형이 원래 그렇다고 했으나 왕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죽기 전 바가지를 배 앞에 띄워 그 바가지가 가는 대로 따라 가면 강화도에 도착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손돌이 죽고 난 후 상황은 더 악화되어 결국 사람들은 손돌이 말한 대로 바가지를 띄워 그 바가지가 떠가는 대로 가게 되었는데 정말로 무사히 강화도에 도착할 수 있었답니다.
그 여울목이 손돌목인 것입니다. 손돌목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손돌의 묘가 있습니다. 뱃사공의 말도 믿 지 못해 민초의 억울한 희생이 있었던 것입니다. 왕은 살아남기 위해 섬으로 피신해야 했던 절박한 상황이었겠지만 이 이야기를 통해 전쟁 동안 얼마나 많은 민초들의 희생이 뒤따랐을지 짐작해봅니다. 이를테면 고려 정부가 강화도에 머물던 39년간 육지에 살고 있던 민초들의 삶은 얼마나 비참했을까요. 또 16년간에 걸쳐 팔만대장경판을 만들면서 외딴 섬에서, 혹은 깊은 산 속에서 후박나무며 자작나무를 채취해 강화도로 옮기기까지 얼마나 많은 민초

들이 목숨의 위협을 느꼈을까요.
광성보에 있는 쌍충비각은 어재연, 어재순 장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입니다. 참, 이 전투에서 어재연 장군기인 수자기(帥字旗)가 미군에 의해 약탈당했습니다. 이 기는 누런 삼베 천에 장수를 나타내는 수(帥)자를 새긴 것입니다. 미군에 의해 약탈당한 후 미국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가 지난해 국내에 들여와서 현재 인천시립박물관에서 보관 중입니다. 2010년 개관 예정인 강화역사박물관에서 상설 전시될 예정이랍니다. 우리 문화재이지만 최대 10년간 대여형식으로 가져온 것이라 기간이 끝나면 다시 돌려주어야 한다는군요. 136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수자기가 두 번 눈물 흘릴 일이라 하겠습니다.
쌍충비각 근처에 있는 신미순의총(辛未殉義塚)은 미군과 싸우다 순국한 이름 없는 용사들의 묘입니다.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51위를 7기의 분묘에 합장하여 두었습니다. 열악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싸웠던 그들의 모습을 떠올리면 자못 숙연해집니다.
1월입니다. 제가 <새교육>에 연재를 시작한 지도 지도 만 5년이 지났습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만날 수 있게 해주신 독자 여러분, 고맙습니다. 아울러 그동안의 친분을 빌미(?)로 살짝 제 자랑도 한번 할까 합니다. 전교생 22명의 우리 분교 아이들이 문화재청 스토리텔링 콘테스트에서 당당히 금상을 차지했습니다. 이 기쁨을 독자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2월에도 강화도에서 만나 뵙겠습니다.